55화
카드란은 헛웃음을 쳤다.
“하지 말라고 하는 게 정상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 때문에 유이시엘이 고통받았는데 그 짓을 또 하라고요?”
“그건 뭐…….”
“절대로 그럴 일은 없습니다. 말도 꺼내지 마십시오.”
그의 단호한 말에 성물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알았어.”
황제의 강한 의지를 확인한 성물은 날갯짓을 하다 그에게 속삭였다.
“그럼 선물을 주지.”
“무슨 선물 말입니까?”
“유이시엘이 잠들지 않도록 내가 힘을 줄게. 그럼 너의 생명력을 안 써도 되니까 유이시엘이 거절을 못 할 거 아냐.”
카드란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성물이 그런 것을 그냥 해 줄 리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무슨 속셈입니까?”
“그냥 호의야.”
“유이시엘이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해 주십시오.”
카드란의 말에 성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런 말을 하지?”
“이제 그녀의 의지가 아닌 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쓴웃음을 지었다.
“처음부터 이랬다면 우리는 달라졌겠죠.”
그의 눈에 후회가 담겼다.
“복수를 해야 했잖아.”
성물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성녀를 죽일 수밖에 없었다고. 류크가 그렇게 유이시엘을 총애하는 것처럼 속였잖아. 너는 죄가 없어!”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받은 상처가 사라집니까?”
그러자 성물은 입을 다물었다.
“미친 짓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고요. 그리고 유엘이 누구보다 정직하고 깨끗하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 사람이 류크의 총애를 받은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겠죠.”
차라리 마음을 알아차렸을 때, 그때 멈추었다면…….
유이시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녀를 끌어안았을 때 그 마음을 따랐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녀의 마음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자신이 너무나도 어리석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눌렀다.
“인간은 괴로우면 술을 마시던데.”
“안 마십니다.”
카드란은 단호히 말하고 커피 잔을 움켜쥐었다.
“너는 왜 보통 인간하고 달라?”
성물은 그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내가 만났던 인간들하고 너무 달라.”
“그러면 안 됩니까?”
카드란이 도리어 반분했다. 그러자 성물은 할 말이 없다는 듯 가만히 있다가 피식 웃었다.
“그 말이 맞아. 그럼 너의 뜻대로 할게.”
성물은 웃으면서 사라졌다.
* * *
유이시엘은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황제의 허락을 받았다며 온 남자는 헬몬 공작인 라젤란이었다. 그는 카드란의 측근이기도 했고 유이시엘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이시엘과 인연이 있기야 했지만 딱히 지금 그녀를 찾아올 이유는 없었다. 유이시엘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개인적인 궁금증으로 왔습니다.”
“궁금증요?”
유이시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궁에 지내시는 게 편하십니까?”
그의 말에 유이시엘의 표정이 굳었다.
“어디든 다 똑같아요.”
“폐하와 부딪히는 게 불편하실 텐데요.”
유이시엘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가 했던 말이 정확했다. 카드란의 곁에 있는 게 이제는 편하지 않았다. 그냥 성녀의 원칙대로 황궁을 나가고 싶었다.
“거처가 필요하시면 저의 가문의 저택에 오십시오.”
“어째서 저에게 그런 배려를 해 주시나요?”
“그거야, 제 아들의 목숨을 살려 주지 않았습니까?”
라젤란은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곁에 있는 것만이 답은 아니지요. 떨어져 있다 보면 머리가 말끔히 정리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까요?”
“모든 것에 무심해진 것은 좋은 일은 아니니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께서 찾던 소녀가 당신입니까?”
유이시엘은 라젤란의 말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과연 그가 찾던 소녀가 자신이 맞는 걸까. 그가 찾던 소녀는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 아닐까.
“아마도요.”
유이시엘은 그래서 이 말밖에 하지 못했다. 라젤란은 안타까워하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 나가고 싶다고 말씀드리고 저희 집에 있겠다고 하십시오. 그럼 들어주실 겁니다.”
“감사합니다.”
유이시엘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을 위해 방 한 칸 내어 준 라젤란이 고마웠다.
라젤란이 사라지고 성물이 나타났다.
“밖에 나가면 잠을 조금만 자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안 자게 해 줄게!”
성물의 대답에 유이시엘은 잠시 성물에게 시선을 주었다.
“폐하께서 부탁하신 일인가요?”
“아니야, 이건 나의 호의. 카드란의 생명력이 줄어들지는 않아.”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유이시엘의 미심쩍어하는 눈초리에 성물이 싱긋 웃었다.
“물론 약간의 목적은 있어. 하지만 비밀이야.”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너의 선택에 따르겠다고.”
유이시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럼 잠을 안 잘게요.”
지에렌을 만나서 이야기도 들어 봐야 한다. 계속 잔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생이 끝날 수 있다. 카드란의 목숨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황궁을 나가서도 잠을 계속 자면 다들 걱정할 테니까. 성녀의 마지막이 이런 거라고 설명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으니까.
생각을 마친 그녀는 잠시 카드란을 떠올렸다.
자신의 선택을 따르겠다고 했다는 말에 이전의 카드란이 떠올랐다. 그러다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녀는 황궁을 나가기로 결정했다.
* * *
추억에 잠겼던 카드란은 전쟁터에서 기억을 잠시 떠올렸다. 그동안 그녀가 왜 살렸는지 의문을 가졌던 그때의 기억을.
그때 복수를 선택한 자신이다. 그 말을 듣고 그녀는 울었을까.
“하아.”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 말을 하지 않을 텐데. 그는 고개를 숙이고 상념에 잠겼다.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 벗어날 기회가 없다.
“폐하, 황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레카린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오라고 해.”
카드란의 말에 유이시엘이 들어왔다. 고혹적인 모습을 한 그녀는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지금도 품에 끌어안고 싶을 정도로 탐이 났다.
그렇지만 카드란은 마음을 눌렀다.
“무슨 일이지?”
“나가고 싶어요.”
유이시엘의 말에 카드란은 심장이 뛰었다.
“성녀는 원래 죽을 때가 되면 나가요.”
“유이시엘.”
“나가게 해 주세요.”
카드란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도대체 어디로 간단 말인가.
“로이체란 가문으로 갈 건가?”
“아니요, 그곳에 좋은 기억이 있을 리 없잖아요. 헬몬 공작가로 갈 거예요.”
헬몬 공작이 곧 있으면 유이시엘과 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 거라고 하더니. 과연 그 말대로였다.
“꼭 나가야 하는가?”
“그냥 이곳이 불편해요.”
유이시엘은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가지 말라고 한다면?”
유이시엘은 잠시 그를 응시했다.
“그냥 있을 거예요.”
그녀의 건조한 말에 카드란은 웃음을 지었다.
“보내 주도록 하지.”
유이시엘이 의지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그것을 허락을 하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가서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요.”
유이시엘은 이미 삶의 의지가 없다.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를 원망하나?”
카드란의 질문했다.
그녀가 원망 한 자락이라도 보여 주길 바라면서 말이다.
“아니요.”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폐하는 그저, 모르시고 복수를 했을 뿐이에요.”
그녀는 그렇게 말한 뒤 몸을 돌렸다. 그녀가 나가고 난 뒤 카드란은 손이 떨렸다.
그녀의 무미건조함이 그의 심장을 찔렀다.
빈껍데기만 남은 그녀.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하고 말았다.
유이시엘을 대할 때마다 그는 자신이 한 짓이 어떤 짓인지 깨닫고 있었다.
* * *
라젤란은 방을 고르고 있었다. 그러자 지록스가 다가와 그에게 물었다.
“누가 오십니까?”
“황비마마께서 오신다.”
“황비마마께서요?”
지록스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냥 그분께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이 필요한 것 같아서 나섰다. 너를 구해 준 분이기도 하고.”
지록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폐하께서 복수를 멈춘 것 같더군. 아마도 관계가 달라진 것 같아.”
라젤란의 말에 지록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분이 로이체란 가문에 가졌던 분노가 크실 텐데?”
“황비마마는 로이체란 사람과 다르지. 지에렌 역시 로이체란 가문에서 그나마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었고.”
“그렇다면……?”
“로이체란 가문이 황제 폐하께 충성을 맹세한다면 위치가 달라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중심에는 유이시엘이 있었다. 그는 유이시엘이 카드란의 마음을 잡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유야 잘 모르지만 그가 황후로 삼고 싶어 하는 여자가 유이시엘인 이상 그녀를 이곳에 두어서 도움을 준다면 가문에도 아주 큰 보탬이 될 것이다.
물론 이런 계산 이전에 그녀를 순수하게 도와주려는 의도였지만 말이다.
“중요한 손님이 오시나요?”
그때, 라젤란과 지록스에게로 휴이가 다가왔다. 파란 드레스를 입고 밖에 나갈 채비를 한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주 중요한 손님이 와서 할아버지께서 직접 손님방을 꾸미고 계신다는 소리를 들었어요.”
휴이의 말에 라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비마마께서 오신단다.”
“그래요?”
휴이는 유이시엘을 떠올렸다. 왜인지 슬픔에 가득 찬 그녀가 기억난 것이었다.
“폐하께서 허락하셨나요?”
“하실 거다.”
그는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니까.
유이시엘의 청을 거절하면 그녀가 정말로 죽을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아는 황제다. 카드란은 그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분이 오시면 저도 말동무가 생길 테니 좋아요.”
휴이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녀는 흥얼거리며 유이시엘과 무슨 이야기를 할지 고민하듯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