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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54/97)

54화

* * *

세안은 문을 열었다. 카드란이 정부가 아니라고 한 순간부터 그녀는 오지 않아도 되었다. 그런데 짐을 챙기다가 문득 생각나서 그를 마지막으로 보러 침실에 들어섰다.

“그대군.”

카드란은 소파에 기운 없이 앉아 있었다.

“술을 마셨나요?”

세안은 그의 안색을 살피며 질문했다. 카드란이 공허한 웃음을 터뜨리더니 어깨를 흔들었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술을 마시면 더 미칠 것 같아서 말이야.”

술을 마시면 유이시엘을 다그칠 것 같았다.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껍데기만 남은 그녀를 더 몰아세울 것 같다.

“미친 짓을 그만두는 거군요.”

세안의 말에 카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말로 지독한 운명이야.”

기억을 잃기 전 유이시엘에게 지켜 준다고 했다.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결국 운명은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주었다.

“유이시엘이 류크와 다른 사람이란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 그런데 알면서도 나는 나를 속이고 복수를 한다는 이유로 그녀를 죽음으로 몰았다.”

기억이 없었다 해도 이상한 점은 많았다.

그렇지만 자신은 어리석어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넘겼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오늘 떠나나?”

“아마도요.”

“그렇군, 필요하면 의뢰를 하도록 하마.”

“네. 앞으로는 그런 의도로만 만나요.”

세안은 그 말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남은 카드란은 얼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유엘.”

그는 통로가 없는 미로에서 갇혀 버리고 말았다.

2. 성물의 기록

성녀는 죽을 때가 다가오면 수시로 잠이 들었다. 곤히 잠을 자다가 편안하게 안식을 맞이하는 게 보편적이었다.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성녀의 경우 이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유이시엘은 손을 바라보았다. 카드란이 직접 생명력을 주입한 이후로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왜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일까. 무엇을 알았기에 방황을 멈추고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일까.

어디까지 알아냈는지 캐 봐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그것을 카드란에게 묻고 싶지 않았다.

유이시엘은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다.

“어디 가는 거야?”

성물이 나타나 물었다. 날갯짓을 하는 성물은 여전히 순진하고 착해 보였다. 사실은 짓궂은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정원에 나가려고요.”

“과거를 추억하려고?”

성물의 말에 유이시엘은 잠시 답변을 망설였다.

자신은 추억을 하기 위해 가는 것일까? 과연 그런 것일까.

“아니요.”

성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왜 가?”

“그냥 가고 싶어요.”

유이시엘은 외투를 입었다. 바람이 차기에 따뜻한 겉옷을 입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무 의미 없어요.”

이제 추억 속에서 행복한 기억을 찾는 것은 그만하고 싶었다.

그 추억 때문에 카드란도, 유이시엘도 고통받았다. 추억을 회상하는 것은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힘들구나.”

“그런 것도 잘 모르겠어요.”

유이시엘의 말에 성물이 은빛 가루를 뿌리며 유이시엘에게 나직이 속삭였다.

“황제가 보낸 선물이야.”

“선물이요?”

“잠을 못 자게 해 주는 약이야.”

그의 생명력이 담긴 가루인 게 분명했다.

“이런 건 부담스러워요.”

“음, 황제의 뜻이라 나도 어쩔 수 없어.”

그에게 직접 말을 해야 하나? 유이시엘은 정원보다 황궁에 먼저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 이야기를 꼭 해야 할 것 같았다.

* * *

황제의 집무실에 헬몬 공작인 라젤란과 슈렌이 카드란과 같이 서류를 가지고 의논을 하고 있었다.

내년 예산안을 최종적으로 점검하기 위해 모인 그들은 각자 취향에 맞게 차를 마셨다. 슈렌은 달콤한 차, 라젤란은 쓴 차. 카드란이 마시는 건 그중에서 가장 쓴 커피였다.

“내년 예산을 줄이시는군요.”

라젤란의 말에 카드란이 중얼거렸다.

“……정부가 이제 없으니.”

그의 말에 슈렌과 라젤란이 카드란을 보았다. 그러자 카드란이 쓴웃음을 지었다.

“세안은 원래 있던 데로 돌아갔다.”

그러자 슈렌은 고개를 끄덕였고 라젤란은 미소를 지었다.

둘이 연인이라 하기에는 눈빛이 꽤 건조했다. 뜨거운 사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수상해 보이기도 했었고.

슈렌과 라젤란은 은근히 느끼고 있었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산 쓸 곳이 많이 사라졌다.”

“그렇군요. 그런데 황비궁 예산을 늘리시는 게 맞습니까?”

슈렌이 확인차 물었다. 그러자 카드란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대답했다.

“어찌 되었든 지금 부인은 유이시엘이니까.”

그는 그렇게 말하고 차를 마셨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겁니까?”

유이시엘을 비참하게 만들려고 했던 결혼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예산에서 황비궁의 예산은 뺄 줄 알았다. 그런데 예산을 늘리다니?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지.”

슈렌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라젤란은 흥미로워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황비마마를 괴롭히는 걸 그만두시려는 겁니까?”

슈렌은 자세한 것은 묻지 않았다. 그가 말해 줄 것 같지도 않았고, 일단은 앞으로 카드란의 행동이 중요했기에 그리 물었다.

“그래야지.”

그의 한숨이 섞인 말에 슈렌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로이체란 가문을 압박하는 것은?”

“그것은 로이체란 수장을 만나고 결정할 것이다.”

라젤란은 카드란을 바라보다 싱긋 웃었다.

“그럼 성녀님을 제가 만나 뵈어도 될까요? 궁금한 것도 있고 해서 말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물어도 되나?”

“만나고 나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카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회의가 끝나고 라젤란과 슈렌이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그 앞에 유이시엘이 서 있었다.

“여기는 어째서 온 건가?”

카드란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유이시엘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이시엘이 고개를 숙인 채 그에게 말했다.

“말씀드릴 것이 있어서 왔어요.”

라젤란과 슈렌은 얼른 자리를 비켜 주었다. 카드란은 유이시엘을 들어오게 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건조하고 삭막했다.

“저를 깨우는 것은 그만두세요.”

유이시엘은 딱 잘라 말했다.

“폐하의 생명력이 줄어들어요. 솔직히 부담돼요.”

유이시엘의 단호한 말에 카드란은 잠시 먹먹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러 온 말이 그것인가?”

그는 찻잔을 움켜쥐었다.

그토록 찾던 소녀를 찾았다. 하지만 자신은 이전처럼, 과거처럼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는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다. 차라리 그것들을 무시하고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아무것도 몰랐다고, 나는 기억을 잃어서 그런 일을 한 거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한 짓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군.”

그는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살 수 있는 날이 반년밖에 안 남았다고 들었다.”

“맞아요.”

“그사이에 하고 싶은 게 있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깨어 있는 게 나을 텐데?”

카드란은 지금까지 단호하게 외치던 태도를 바꾸었다.

그동안 자신이 유이시엘에게 했던 행동을 떠올렸다. 복수를 한다고 너무나도 잔인하게 그녀를 대했다. 그런 행동부터 멈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거 없어요.”

유이시엘이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을 돌려 나갔다.

“그러니 그만두세요.”

그 말만 남기고.

그녀가 닫고 나간 문을 바라보며 카드란은 다시 절망에 빠졌다.

차라리 원망을 했으면 좋겠다. 이제 와서 그런 짓을 해 봤자 달라지겠느냐고, 이전처럼 윽박지르라고 소리치면 차라리 나을 것 같다.

무심한 그녀를 보니 미칠 것 같았다.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자신을 바라봐 달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아야만 했다.

“더 이상 실수하면 안 돼.”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또 남기는 짓은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성물이 나타났다.

“이야, 유이시엘이 제대로 무심해졌네.”

날갯짓하며 카드란의 주변을 도는 그녀의 웃음은 무척이나 잔인해 보였다.

“뭐 자업자득이지만.”

성물의 말에 카드란은 성물을 응시했다.

“유이시엘에게 뭔가를 주려는 것을 몰래 할 거야?”

성물이 나직이 물었다. 성물의 말에 카드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속이는 짓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유이시엘이 모든 것을 거부한 채로 무심히 있다. 대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카드란이 날갯짓을 하는 성물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위적으로 성녀를 만든 겁니까?”

그의 말에 성물이 싱긋 웃었다.

“나도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나지 않아.”

성물은 흥얼거리다 카드란에게 속삭였다.

“새로운 성녀가 자연스럽게 나타나기 전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 이번에도 유이시엘이 뒤를 이을 성녀의 후보로 될 만한 아이도 아직 어리고. 너도 만들어. 다들 했던 짓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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