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3화 (53/97)

53화

카드란은 세안을 보고 말했다.

“정부는 그만두어라. 그대는 자유다.”

그의 말에 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류크가 유이시엘을 아끼지 않았다면 복수의 의미가 없다. 아니, 그가 했던 모든 것들이 이미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런 죄가 없는 그녀를 죽음으로 몰았다. 어린 시절 스스로 소중한 사람을 지킨다고 했던 맹세를 지키지 못했다.

모든 것을 인정하고 난 뒤, 그는 오열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울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허망했다.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방을 나온 그는 황비궁으로 갔다. 유이시엘을 깨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소엘과 코넬이 유이시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그의 말에 두 사람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성녀님이 이틀 동안 깨어나지 않습니다.”

카드란의 안색이 굳었다.

* * *

〈란은 어떤 남편이 되고 싶어?〉

첫 키스를 하고 며칠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소녀 유이시엘은 소년 카드란에게 질문을 했다. 카드란은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을 하더니 손으로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매일 이런 일을 하는 남편?〉

〈진지하게 묻는 거야!〉

〈응, 농담이야.〉

카드란은 어깻죽지를 흔들며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는 유이시엘을 빤히 바라보다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에 걸어 주었다. 잔잔한 바람에 살포시 흔들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마음도 함께 흔들리는 것 같았다.

〈언제나 내 아내를 지켜 주는 남자.〉

그렇게 말한 그가 몸을 돌려 저벅저벅 걸어가더니 다시 그녀를 응시하며 다정한 시선을 주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보호를 받지 못했어. 그래서 그 집에서 나와야 했지.〉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렇게 말한 뒤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해는 하지만, 그렇다고 마음으로 받아들인 건 아니야.〉

어두운 이야기를 하는 와중이었지만 카드란은 화사하게 웃었다.

〈그런 일은 없게 할 거야.〉

〈정말로?〉

〈응, 너를 지켜 주고 싶어.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할 거야.〉

카드란은 다짐하듯 유이시엘의 손을 꼭 잡았다. 유이시엘은 말없이 그 손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말이든 좋다. 그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자신은 어둠 속에 있었다. 그런데 그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을 비쳐 준 사람이 카드란이었다.

카드란의 빛은 너무나도 다정하고 따뜻했다. 한겨울의 햇살처럼 밝지만 서늘한 게 아니라, 봄날의 햇살처럼 따뜻하고 다정했다. 그 감각에 취해 놓아줄 수 없었다.

「기억이 돌아온 그가 너를 원망하네.」

성물의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갇힌 작은 공간에서 거울을 바라보던 유이시엘은 거울 앞에 다가가 손을 댔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 이곳에 있었다.

네가 추억을 망가뜨렸다고 원망하는 그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

자신이 원한 것은 이게 아닌데

「일어날 거야?」

성물이 물었다.

“아니요.”

자신을 원망하는 그를 보고 싶지 않다. 그냥 자신을 사랑했던 그만을 기억하고 싶었다. 카드란이 자신을 냉정히 대할 때마다 과거의 그가 부서지는 것 같아 싫었다.

그는 기억을 찾고 자신을 원망하고, 자신은 그 원망에 슬퍼하고. 언제까지 그 상황을 반복해야 할까.

유이시엘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녀가 원한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그저 혼자서 모든 것을 안은 채 죽으려고 했다. 그가 복수를 멈추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일부러 침묵했다.

그런데 지에렌이 모든 것을 망쳤고 카드란은 자신을 더욱더 원망하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이 지경이 되었는데 깨어난들 무슨 소용일까. 이대로 추억만 회상하다 잠들고 싶었다.

안식을 맞이하고 싶었다.

「미안한데 황제가 너를 깨우래.」

“왜요?”

유이시엘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이유는 직접 들어 봐.」

성물은 그렇게 말하며 유이시엘에 뭔가를 주었다. 유이시엘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카드란의 생명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을 뜬 그녀는 앞을 바라보았다. 카드란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그의 뒤에서는 성물이 날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폐하?”

유이시엘은 몽롱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일어났군.”

카드란은 두 주먹을 쥐고 있었다.

“왜 깨지 않았지?”

유이시엘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다가 그냥 허탈하게 웃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복잡하다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라면 카드란이 저런 눈을 하지 않을 테니까.

“자고 싶었어요.”

“유이시엘.”

“조용히 자면 모든 게 다 잊힐 줄 알고.”

유아시엘의 말에 카드란의 손이 떨렸다.

“그냥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어서.”

그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런데 자는데 자는 게 아니었어요. 과거의 추억이 떠올라서 그냥 슬픔만 느껴졌어요.”

과거의 추억이라는 말에 카드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무슨 추억이지?”

“그냥, 옛사랑이 지켜 준다고 했던 기억이에요.”

유이시엘은 옛사랑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과거의 카드란과 지금의 카드란을 구분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의 카드란과 과거의 카드란은 다르니까.

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이었다.

카드란은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있었다.

“옛사랑?”

그 말을 읊조리던 카드란이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대에게 그 남자는 옛사랑인가?”

그의 질문에 유이시엘은 지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서릿발처럼 눈을 부릅뜨고 물어서 피곤했다.

“폐하와 상관이 있나요?”

자신을 원망만 하는 그인데, 차라리 이렇게 구분 짓는 게 낫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졸음이 왔으면 하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 * *

카드란은 유이시엘의 말을 곱씹었다. 과거의 자신을 옛사랑이라고 한 거에 충격을 받았기에 더 이상 말이 나오지 못했다.

유이시엘이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을 다르게 보고 있다. 같은 사람이라고 보지 않았다.

참을 수가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그는 가슴을 꾹 누르고 다른 손으로 유이시엘의 손을 잡고 물어야 했다.

“그대에게 그 남자는 옛사랑인가?”

“페하와 상관이 있나요?”

무슨 관련이 있느냐고 유이시엘이 되물었다. 카드란의 기억이 돌아온 것을 알면서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상관이 있다.”

카드란이 천천히 단어를 곱씹으며 대꾸했다. 그러자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유이시엘이 살며시 눈매를 접고 미소를 지었다.

“상관이 없을 거예요.”

그녀가 자신을 밀어낸다. 상관이 없을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짐작하기엔 너무나도 두려웠다.

“이미 늦었을지도 몰라.”

성물이 뒤에서 둘을 바라보더니 말을 걸었다.

“유이시엘의 마음은 이미 죽었어. 성녀가 삶의 의지를 완전히 놓으면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

성물의 말에 유이시엘은 멍하니 성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성물은 안타까워하는 시선으로 유이시엘을 바라보았지만 유이시엘의 눈은 한없이 건조하기만 했다.

“성물의 말이 맞아요. 전 그저 쉬고 싶어요.”

“유이시엘!”

“폐하께서도 마저 갈 길을 가세요.”

유이시엘이 싱긋 웃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원망조차 없는 듯한 눈동자. 그곳에선 체념조차 보이지 않았다.

유이시엘의 상태를 깨달은 카드란은 말없이 손을 놓았다.

“쉬어라.”

그는 자리를 떠나기 전에 유이시엘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그러고 나온 밖에는 어둠이 깔려 있었다. 카드란은 짙게 깔린 검은색 세상을 천천히 걸었다.

유이시엘은 정원에 있는 꽃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곳에서 꽃을 바라보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카드란은 레카린과 호위 기사들을 물리고 홀로 정원에 섰다.

「유이시엘을 다그치지 않네.」

성물이 나타나지 않은 채 머릿속으로 말을 전했다.

“옛사랑과 저를 구분하는 것 말입니까?”

「응, 그거 때문에 기분이 별로였잖아.」

성물에게 읽힐 정도로 감정을 드러냈던 모양이다. 하긴 그런 순간에는 어떤 누구라도 감정을 나타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왜 그러냐고 그녀를 다그쳐야 할까요?”

성물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카드란은 정원에 서서 꽃들을 바라보았다.

“저를 차라리 원망이라도 했으면 그랬을지 모르죠.”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유이시엘에겐 체념, 원망 등등 그 어떤 감정도 없었다. 이미 모든 것을 놓아 버린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며, 안식을 기다리는 것 말고는. 그런데 그녀에게 무엇을 말한단 말인가.

몰아세우는 것을 할 수 없다. 몰아세운다고 해서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하아.”

이렇게 그녀를 몰아세운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류크보다 더 잔인한 짓을 해 버리고 말았다.

그녀에 대한 것을 알고 나니 자신이 한 짓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로이체란 가문에서 꾸민 음모일 거라고, 자신을 몰아세우는 것이리라고 몇 번이고 합리화했던 자신이 어리석었다.

그사이 유이시엘의 마음은 죽었다.

그렇게 카드란 역시 그녀에게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어졌다.

그 사실은 그를 한없이 추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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