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유이시엘이 일어났다.
“하아.”
기억을 찾은 그는 자신을 더욱더 싫어한다.
“란을 지키기 위해서였어요.”
그것 말고는 다른 마음은 없었다.
“정말로…….”
심장이 뛰고 있다. 마음이 아파서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구하고 싶어서…….”
어린 시절에는 이 순간이 오면 오열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란을 놓아 버리고 난 뒤에 이상하게도 울지 못하게 되었으니까.
울음을 잃어버렸으니까.
“그런 건데…….”
그런데 카드란이 자신을 저주한다.
어린 시절 추억도 엉망이 되고, 망가졌다고 토로하고 있었다.
기억을 봉인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오라버니.”
‘왜 기억을 푸신 건가요.’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혼란만 남아 버렸다. 자신이 안고 죽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장치를 없애지 않은 지에렌이 원망스럽다.
그러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자신은 반년 뒤에 죽는다. 그러니 이 고통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자신을 원망하는 카드란을 보니 더욱더 삶의 의지가 사라졌다.
유이시엘은 눈을 감았다. 잠이 몰려왔다.
그냥 안식에 빠지고 싶었다.
* * *
어둠이 내려온 호수, 거기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공원에 있는 작은 호수에 온 카드란은 숨을 몰아쉬었다.
“폐하, 괜찮습니까?”
레카린이 옆에서 묻자 카드란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괜찮지 않다.”
어머니는 불에 타 돌아간 탓에 시신조차 없었다. 그렇기에 생전 좋아하던 공원을 무덤으로 삼았다. 이곳을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몇 번이고 찾아왔었다.
가만 생각하면 유이시엘의 행동에 짚이는 게 많았다.
어머니와 함께 갔던 성녀의 의식을 하는 장소에서 만난 것도 그렇고, 그녀가 좋아하는 꽃들이 모두 다 어린 시절 소녀가 좋아하는 것이었단 사실도 그랬다.
그런데도 카드란은 인정할 수 없었다.
여전히 기억이 조작됐을 거라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선 다른 자신이 치고 올라왔다.
기억이 풀리기 전에 이미 유이시엘을 이용해 복수를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그녀를 그냥 놓아주자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다른 자신이 삿대질을 했다.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했던 어린 날의 자신이 찾아와 복수는 끝까지 해야 한다고, 얼마 남지 않았다고 속삭였다.
두 자아 속에서 혼란스러워하던 카드란은 호수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복수를 멈출 순 없다.
하지만 유이시엘을 죽일 수 있을까?
과거를 몰랐을 때도 그녀가 죽어 가는 것에 힘들고 혼란스러웠는데, 과연 그녀가 그 소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가능할 것인가.
카드란이 호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기에 어머니는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도 묻고 싶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왜 침묵하셨는지, 왜 유이시엘이 그렇게 일을 하게끔 가만두었는지.
차라리 그때 전쟁터에서 죽을 것을 그랬다. 그랬더라면 이런 고뇌는 없었을 텐데.
그는 이렇게 되도록 일을 벌인 유이시엘에게 뭐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지에렌이 준 일기장을 떠올렸다. 그곳에 또 다른 진실이 있다고 했다.
“하아.”
그래, 유이시엘이 그냥 그런 일을 벌일 사람은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을 잃었을 때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카드란은 입술에 힘을 주었다.
일단은 보고 판단하자.
도대체 지에렌이 말하고자 한 바가 무엇이었는지 파악해야 했다.
* * *
“황제 폐하께서 기억을 찾으셨다고 합니다.”
어둠이 자욱한 방에서 마르켈린이 거울을 통해 체렌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 그래?
체렌은 무심히 말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마도구가 부서진 모양이야.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기억이 조작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으시다 합니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이란 말인가. 체렌은 좀 당황했다.
- 황제가 그렇게 전했다고?
“꼭 부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그럼 일정을 잡아서 황제를 만나러 가 볼까? 혼란스러운 모양이군.
“그러신 것 같습니다.”
- 봉인된 기억이 깨어났으니…….
단순히 혼란스럽다는 이유로 이런 일을 부탁할 남자 같지는 않았지만, 불안정한 기억을 하나라도 찾으면 좋아하던 남자가 왜 그러는 것일지에 대해선 호기심이 들었다.
뭐, 사정이야 만나서 들어 보면 될 것이다.
- 황제에게 직접 내가 가겠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마르켈린은 고개를 숙였다.
* * *
레카린은 문을 열었다. 그러자 짙은 와인 냄새가 풍겼다.
“폐하?”
“레카린, 왔나?”
“밤새 마시신 겁니까?”
“일단은.”
카드란은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머리가 어지러워 몸이 휘청거렸다.
“폐하!”
“괜찮다.”
카드란은 몸의 균형을 다시 잡은 채 레카린을 보았다.
“현자의 탑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레카린이 서신을 카드란 앞으로 건넸다. 카드란은 편지를 읽고 쓴웃음을 지었다.
“현자의 탑으로 간다.”
“저도 같이 갈까요?”
“그래, 호위는 있어야 할 것 같군.”
그렇게 말하고 카드란은 천천히 숨을 몰아쉬며 현자의 탑으로 향했다.
그 전에 지에렌이 줬던 일기도 같이 챙겨 마차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어제 일기장을 통해 보았던 내용들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유이시엘이 쓴 일기장은 자신의 기억과 일치했다. 낡은 일기장은 조작이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진짜로 최악이군.”
정말로…… 자신이 믿던 것들은 무엇일까.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진실을 확인하고, 정리를 하지 않으면 머리가 폭발할 것 같았다.
* * *
세안은 연락망을 최대한 가동했다. 로이체란 가문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수소문해서 그들을 만나 돈을 주고 정보를 얻었다.
그들의 말은 한결같았다.
“정말로 류크는 끔찍하군요.”
세안이 앉은 책상 앞에서 보고서를 읽던 칠론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러게.”
세안 역시 믿기 어려운 듯 보고서를 여러 번 보았다.
유이시엘 로이체란, 어린 시절 몸이 약해 요양원에서 자라 사교계에 늦게 얼굴을 비쳤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류크의 총애를 받았던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카드란 역시 그것을 믿고 유이시엘 로이체란에게 복수의 칼날을 겨누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것을 폐하께서 믿으실까요?”
칠론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겠어.”
세안의 표정이 굳었다.
보고서에는 류크가 유이시엘에게 했던 몇 가지 일들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진실은 이보다 더 참혹할지도 몰랐다.
* * *
현자의 탑에 도착한 카드란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온몸에서 악취가 나는 것 같았다. 자신의 머릿속에 담긴 것들에서 썩은 내가 나는 것 같아 코를 막고 싶었다.
“오셨습니까.”
마르켈린이 카드란에게 다가왔다.
“로드께서는 어디 계시지?”
“저기 방에 계십니다.”
카드란은 마르켈린을 따라 걸어가자 하얀 문이 그를 반겼다.
이 문안으로 들어가면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카드란은 입매를 굳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체렌이 싱긋 웃으며 카드란을 맞이했다.
- 진실을 알고 싶다고?
“기억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고 싶습니다.”
- 마법으로 조작한 게 아닌가 의심하는 건가?
“네.”
카드란의 말은 진지했다. 체렌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 이리로 오도록.
카드란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문득 두려움이 앞섰다. 진실을 알게 된 뒤에 자신은 어떻게 될까.
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지만 곧 고개를 체렌에게 내밀었다.
“시작하십시오.”
무엇이 다가온다 해도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 **
자욱이 안개가 낀 공원 호수를 바라보며 어린 카드란이 말했다. 출생의 비밀을 안 후 아버지를 만나고 오는 길에 들른 공원, 그곳에서 셀린이 물었었다.
〈아버지를 이해하니?〉
그러자 카드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결국 아버지는 어머니를 지키지 못한 거잖아요.〉
카드란은 냉정히 웃었다.
〈전 그럼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럼?〉
〈유이시엘을 지킬 수 있는 그런 남자가 될 거예요.〉
〈그래.〉
셀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카드란이 그분을 순순히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심할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그런 남자, 멋지잖아요.〉
〈그럼.〉
어린 카드란은 환하게 웃었다.
어른이 된 카드란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는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가면서 체렌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기억에 조작된 것은 없다. 일기도 모두 다 진짜야.〉
모든 것을 알게 된 그는 좌절했다.
허탈하게 웃던 그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하늘 위에 뜬 달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참혹한 진실을 알게 된 그를 비웃듯이.
카드란은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 * *
황궁에 도착한 그는 집무실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세안을 만났다. 그녀는 얼른 카드란에게 서류를 주었다.
“조사한 자료예요.”
카드란은 자료를 천천히 읽었다.
“류크는 유이시엘을 어느 날 갑자기 데려와서 도망치는 그녀를 감금하고 괴롭혔다고 해요. 그리고 유이시엘을 학대했다고 다들 똑같이 진술했고요.”
세안의 말에 카드란은 보고서를 찢었다. 분노가 치솟았다.
“폐하.”
“정말로 기분이 최악이군.”
카드란은 류크가 한 짓을 알고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했던 복수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알고 좌절했다.
그녀가 왜 자신의 기억을 봉인했는지 이해한다.
성녀가 되었으니 같이 도망쳤다면 자신은 죽었겠지. 거기에 류크는 유이시엘을 이용해 자신을 끈질기게 찾으려고 했다. 유이시엘을 이용한다면 자신은 당연히 거기에 휘말릴 것이었다. 기억을 없애고 도망치게 한 건 그것을 막기 위한 최선이었다.
하지만 원망이 치솟았다.
왜 상황이 이렇게 되기까지 그녀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일까.
물론…… 말을 했다 해도 믿지 않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