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도와줘서 고마워요.”
“아니다. 외숙부가 너를 가두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걸.”
지에렌은 쓴웃음을 지었다.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성물에게 카드란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그는 지금 황제의 별장에 있어.」
“왜 저를 도와주는 거예요?”
그녀의 말에 성물이 대답했다.
「네가 그 남자를 도와주려고 하니까. 미래의 황제가 될지 모르잖아.」
* * *
유이시엘은 편지를 썼다. 이 편지를 본다면 카드란은 그 폐가로 올 것이었다. 폐가에 병사들이 있으면 카드란이 의심할 수 있다면서 류크에게는 나중에 오라고 했다.
“카드란.”
카드란이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 때문에 위험에 처할 것이었다. 류크는 그녀를 이용해 카드란을 죽일 계획을 계속 생각할 테니까.
그렇기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이다.
추억을 봉인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다.
성물은 류크는 끈질기다고, 자신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의 존재를 이용해 끝없이 카드란을 끌어낼 거라고 말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란의 기억을 봉인하면 되지 않느냐고 속삭였다.
성물이 황가의 핏줄을 봉인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지에렌이 가진 보물을 이용하면 된다고 알려 준 것도 성물이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오늘 기억을 봉인하게 위해 그를 불렀다.
폐가로 가는 마차에 탄 유이시엘은 카드란이 주었던 목걸이를 걸었다. 아마 이것을 착용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었다. 그가 혹시라도 기억을 할 수 있을지 모르기에, 관련된 것은 모두 다 숨겨 둘 생각이었다.
「오늘이 그를 보는 마지막이야.」
“알아요.”
유이시엘은 슬픈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하늘은 너무나도 청명했다.
* * *
카드란은 유이시엘이 도착하고 얼마 뒤에 들어왔다. 유이시엘은 자신을 끌어안은 카드란의 허리를 꼭 잡았다.
이 품을 영원히 잊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카드란의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자신의 앞인데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셀린 님이?”
“그것도 비참하게…….”
“류크가 죽인 거구나.”
유이시엘은 그가 어떤 짓을 했는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런 말이 나왔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카드란은 의아해하는 시선으로 유이시엘을 바라보았다.
“란, 사실 난 성녀야.”
이제 사실을 말해야 할 때다.
“뭐?”
카드란의 눈동자가 더욱 커졌다.
“그리고 내 원래 이름은 유이시엘 로이체란이래.”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왜 하필이면 사랑하는 남자의 원수 집안 핏줄인 걸까.
“어떻게…… 거짓말이지?”
카드란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류크가 어머니를 죽이는 소리를 내가 듣고서, 로이체란 가문에 복수를 꿈꾸고 있는데! 어째서 유엘이 로이체란 사람이라는 거야?”
카드란이 소리쳤다. 그의 마음이 무너지는 게 느껴졌다.
우리에게 왜 이런 잔인한 일이 생긴 걸까.
“그 말을 하러 온 거야?”
“아니.”
유이시엘의 손가락에 지에렌이 준 반지가 끼어져 있었다.
“란은 내가 로이체란 사람이라 해도 사랑할 거야.”
“그렇겠지. 유엘이 로이체란 사람이라고 해서 이번 일과 관련 있는 건 아니잖아?”
카드란은 그녀의 손을 잡고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런데 어떻게 성녀가 된…… 거야?”
“류크가 강제로 만들었어.”
“그 자식이! 도망치자. 복수는 일단 뒤로하고 유이시엘이 성녀면 황제의 것이 되는 거잖아!”
“복수는?”
“복수는 할 거야. 하지만 유이시엘이 성녀가 된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어. 류크가 강제로 성녀로 만들었으니 좋은 목적이 아닐 거야. 그러니 도망쳐서……!”
자신이 로이체란 사람이라 해도 그는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 유이시엘은 그 사실이 너무나도 고마웠고 서글펐다.
“카드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이번에는 자신이 그를 끌어안을 차례였다.
지에렌이 알려 준 주문을 외우자 반지에서 힘이 느껴졌다.
“나를 잊어.”
카드란이 고통에 휩싸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자신의 기억이 지워진다.
유이시엘은 정신을 잃은 카드란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그를 위해 자신과의 추억을 없앴다. 아마도 자신을 바라보는 다정한 눈은 오늘이 마지막일 것이었다.
앞으로 평생 그와 함께하는 일은 없겠지.
“오, 저기 있군.”
류크가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카드란이 쓰러진 것이 만족스러운 듯 입술을 혀로 축였다.
“잘했다.”
“죽이려고요?”
“당연하지.”
류크의 말에 유이시엘이 웃었다.
“당신이 나를 성녀로 만든 것은 실수예요.”
「황제가 허락했어. 카드란을 보호하래.」
성물의 소리가 들렸다.
유이시엘이 힘을 사용하자 빛이 났다. 거대한 빛에 휩싸이더니 카드란의 몸이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황제가 원하는 장소로 갔겠지.
성물이 자초지종을 황제에게 이야기했다고 했으니 그는 더욱 안전히 보호될 것이었다.
“네년이!”
카드란이 눈앞에서 사라지자 류크가 달려와 자신을 죽일 듯이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괴롭히려고요?”
“뭐?”
“이러다가 생명력을 소진해 제가 죽어 버리면 카드란을 꾀어낼 수 없을 텐데요?”
류크가 주먹을 쥐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고 유이시엘을 놓아주었다. 유이시엘은 흐트러진 소매를 다시 정리하고 손으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다시 만날 란은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날 원망하겠지.
나 역시 로이체란 가문의 사람이니까.
그의 원수니까.
같이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성녀가 도망치면 그 상대방도 죽어 버린다. 그렇기에 그녀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생명력을 많이 소모했어.」
공간 이동은 생명력이 많이 든다고 한다.
그렇지만 상관없다. 그가 죽어 버리는 것보다는, 그가 없는 세상에 사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리고 연회장에서 유이시엘은 그를 만났다.
자신을 잊어버린 카드란.
더 이상 자신을 상냥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 그.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그녀는 울음을 참았다.
아무도 없는 날, 홀로 울면서 그를 그렸다.
그러다 전쟁이 터지고, 그를 구하려 다시 생명력을 사용했다.
중간에 기적적으로 기억이 돌아온 그, 카드란은 더는 어린 날의 따뜻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는 복수를 원했고 유이시엘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게 카드란은 유이시엘을 놓았다.
유이시엘도 카드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과거와 관련된 모든 물건을 없애 달라고 지에렌에게 부탁했다.
지에렌은 모든 것을 다 없앴지만 유이시엘이 어린 시절부터 써 온 일기장은 남겨 두었다.
혹시나 일어날 기적을 위해서.
* * *
카드란은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입가에 머물렀다. 독한 술을 마시는데도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토록 찾고자 했던 사랑스러운 연인이 유이시엘 로이체란이라는 게 너무나도 괴로웠다.
이런 식으로 일을 끌고 간 류크에 대한 증오가 폭주했다. 당장이라고 검을 들고 가 류크를 찔러 죽이고 싶었다.
이성을 다스린 그는 와인 잔을 바라보았다.
“하하.”
카드란은 머리를 부여잡고 있다가 얼른 일어났다.
도대체 왜, 자신의 기억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이것은 유이시엘의 음모였다. 자신을 혼란하게 해 가문의 복수를 막으려는 속셈인 게 틀림없었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카드란의 호출에 달려온 세안은 고개를 숙였다.
“유이시엘 로이체란에 대해 모든 것을 조사해 오도록. 그녀가 로이체란 가문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몰래 조사하도록 해.”
이 기억들이 거짓임을 밝혀야 한다.
거짓임을 밝히는 증거가 하나라도 발견되면 된다. 그럼 이 혼란이 끝날 것이었다.
명령을 전달받은 세안이 고개를 숙였다. 문을 닫고 나서는 그녀를 바라보며 카드란은 다시 유이시엘을 떠올렸다.
“왜 하필이면 그대인 거냐.”
차라리 소녀가 죽었다고 했을 때가 행복했던 것 같다. 그때는 그래도 추억을 찾으며 소녀를 그릴 수 있을 거라고 믿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추억은 그에게 참혹함만 주었다.
「유이시엘을 죽여.」
성물이 속삭였다.
“그럴까요?”
그럼 이 고통이 끝날까.
카드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이 저기 있었다.
* * *
유이시엘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냥, 생각이 번잡해 강제로 잠이 오기 전까지 잠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눈을 감고 한참 동안 멍하니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깨어 있는 척하기 뭐해서 그냥 그대로 있었다.
소엘이 들어온 걸까?
“또 잠이 든 건가?”
카드란의 목소리가 위에서 들렸다.
“검으로 그대를 베면 마음이 나아질까.”
카드란의 말이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차라리 그의 칼에 죽는 게 나을까. 그것이 우리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길일지도 몰랐다.
유이시엘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카드란의 외침에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나!”
그가 마음의 한을 담아 말했다.
“그대가 한 짓이 무슨 짓인지 알고 있는가? 나를 이렇게 만들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한 거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것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그의 혼란이 느껴졌다.
“그대를 원망해. 내 기억을 망가뜨린, 추억을 없애 버린 그대가 증오스러워.”
그는 몇 번이고 감정을 터뜨리고는 숨을 내쉬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