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0/97)

50화

* * *

카드란은 눈을 감았다 떴다.

눈을 떴을 때, 그는 숲에 있었다.

소중한 것을 잃었다는 자각은 있었다. 흔적만 남은 기억은 그를 미치도록 서글프게 했다.

유이시엘은 그 소녀는 죽었다고 말했다. 마치 자신이 소녀가 아닌 양 그렇게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 말이 진실이라 믿고 있었는데. 그런데 지에렌이 기억을 돌려주며 아니라고 했다.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 유이시엘이 거짓말을 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지에렌이 자신에게 거짓을 말한 거라면 왜? 굳이?

수많은 생각이 오고갔다.

“하아.”

그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고 마음도 폭발할 것 같았다.

눈이라도 내리면 달라질까.

그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맑은 하늘은 금방이라도 무언가를 펑펑 쏟아 낼 듯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정말이지.”

둘 다 끔찍한 일이었다.

일단은 유이시엘이 일어난 뒤에 추궁을 해야 했다.

그런데 만약 이 기억이 맞는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머니의 비극이 다시 떠올랐다. 마음이 다시 혼란스럽다.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냥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 * *

지에렌은 천천히 로이체란 가문의 저택의 동쪽 끝, 개인 서고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제의 것, 이것을 가져간다면 카드란이 제 기억을 믿을까.

그가 기억을 믿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자신이 복수를 하려던 존재가 알고 보니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라니.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진실을 보여 주면 된다.

그는 일단 ‘그것’을 챙겼다.

지에렌은 곧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 * *

카드란은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서 성물이 날갯짓을 하며 그에게 속삭였다.

“내가 복수하지 못할 거라고 했잖아. 내 말을 들었어야지.”

성물은 카드란의 속을 긁었다. 카드란은 쓴웃음을 지으며 와인을 한 잔 들이켰다 요즘 유이시엘 일로 와인을 자주 마셨다.

그런데 그때, 레카린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지에렌 로이체란 후작께서 폐하를 뵙기를 원합니다.”

“들어오라 하도록.”

그러자 성물이 자취를 감췄다. 카드란 홀로 남은 집무실에 들어온 지에렌은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뵈옵니다.”

“왜 온 거지?”

“이것을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지에렌은 낡은 노트를 꺼냈다.

“이것은 무엇이기에?”

“유이시엘이 썼던 일기입니다. 저보고 태워 달라고 했지만 그러지 않고 남겨 두었습니다. 이런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지에렌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류크는 생각보다 잔인합니다. 유이시엘이 어째서 폐하의 기억을 봉인해야 했는지, 그 이유가 여기 담겨 있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되시면 이것을…… 혼자만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에렌은 그렇게 말하고 일기를 두고 나왔다.

일기를 바라보던 카드란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기억을 되찾았을 때보다 충격적인 일이 일기장 안에 있을 것 같았기에 두려움이 앞섰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알았던 것은 과연 진실인가.

어떤 것이 진짜인지 모르겠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

카드란은 속으로 읊조리며 일기장을 바라보았다.

일단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그는 일기장을 펼치지 못했다.

* * *

이번에 잠이 들었을 때는 꿈에 성물이 나타나지 않았다. 몽롱한 상태로 눈을 뜬 유이시엘은 일어나 주변을 바라보았다.

“일어났구나.”

지에렌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그래, 나다.”

그는 유이시엘의 손을 꼭 잡고 나직이 말했다.

“이번에는 얼마나 깨어 있을 수 있지?”

지에렌의 말에 유이시엘은 잠시 생각했다.

“모르겠어요.”

“성녀도 그것은 모르는구나.”

그는 그렇게 말하고 유이시엘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여전히 삶에 미련이 없니?”

“네.”

“그게 지금은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말에 유이시엘은 뭔가 잘못된 것을 알았다. 걸리는 것은 단 하나다. 그녀의 눈동자가 잔잔히 흔들렸다.

“나머진 폐하와 이야기하렴.”

“그분이 왜 저와?”

“짐작하고 있지 않니?”

지에렌은 안쓰러워하는 눈으로 바라보다 그녀의 손을 놓고서 방문을 열고 나갔다.

유이시엘은 홀로 있었다.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 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어딘가 수척해진 카드란이 유이시엘의 침대 앞에 앉았다.

“깨어났군, 유이시엘 로이체란.”

그가 유이시엘에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에게 숨기고 있는 거 없나?”

유이시엘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뭘 말인가요?”

“짐이 찾고 있는 소녀에 대해 거짓말한 게 없느냐는 말이다.”

유이시엘은 몸이 떨렸다. 그가 무엇을 알고 이런 말을 하는지 몰라 두려웠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카드란에게서 시선을 피했다.

“있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유이시엘은 한참 만에야 말했다.

“폐하께서는 복수를 해야 하고.”

“그런 식으로 피해 가는 건가?”

날카로운 추궁에 유이시엘은 더욱더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카드란이 손으로 그녀의 턱을 들었다.

그의 표정을 정면에서 본 유이시엘은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정말로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그 소녀가 죽었다고 다시 말하지 않는 거지?”

그가 원망하면서 읊조렸다.

“그 소녀는 그대가 아니라고 말해라.”

그가 명령했다.

“그 소녀가 죽었다고 다시 말해!”

그의 외침에도 유이시엘은 차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진실을 알았다. 어떻게 기억을 되찾은 걸까? 찾을 수가 없었을 텐데…….

“그녀는 죽었어요.”

유이시엘은 결국 카드란이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다.

“정말인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 정말로 대단한 일을 벌였군. 과연 어떤 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까.”

카드란이 이를 악물었다. 감정을 누르고 일부러 차갑게 말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정말로…….”

유이시엘은 더 이상 그를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카드란은 그녀를 한참 바라보다 나갔다.

홀로 남은 유이시엘은 허탈한 마음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이 뛰었다. 누군가 마음을 송곳으로 퍽퍽 찌르는 것 같다.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짙은 감정이 밀려왔다.

“아닐 거야.”

그가 진실을 알게 된 건 아닐 것이다.

이것은 거짓이었다.

그렇게도 바라지 않던 일인데, 혼자서 다 안고 죽으려고 했는데 그것이 어긋났다니 말도 안 된다.

“오라버니…….”

그는 도대체 왜 이런 일을 벌인 걸까.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고통이 찾아온다. 무심했던 마음에도 아픔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울음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 * *

강제로 성녀가 되었다.

소녀들의 목숨을 주입받아 성녀가 된 자신을 류크가 끌고 왔다. 그리고 지하 감옥으로 데려간 뒤에야 몸을 결박하고 있던 끈을 풀어 주었다.

“카드란은 어디 있지?”

“그는 왜요?”

“그놈이 황제의 사생이라서 말이야. 그놈의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입을 안 열었으니, 너라도 실토해야 하지 않겠어?”

그의 말에 유이시엘은 불안함을 느꼈다.

“난 몰라요.”

“그리 말할 줄 알았다. 그래서 대대적으로 로이체란 가문에서 유이시엘을 찾고 있다는 전단지를 뿌릴 예정이다. 그럼 그가 네가 위험한 것을 알게 되겠지! 미안하지만 그가 자기 발로 찾아오기 전까지 여기 있어야겠어.”

그는 그렇게 비릿하게 웃었다.

유이시엘의 마음에 절망이 흘러넘쳤다.

카드란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올 텐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데 그 순간 허공에 빛이 모여들었다.

“안녕.”

금발의 작은 소녀의 형상을 한 존재가 나타나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 작은 공간, 소녀들이 죽었던 공간에서 들렸던 목소리와 같은 소리를 가진 존재였다.

“성물인가요?”

유이시엘은 성물을 바라보며 물었다.

“맞아.”

성물은 싱긋 웃었다.

* * *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유이시엘은 류크에게 카드란에게 편지를 써서 그를 유인하겠다고 했다. 류크에게 자신이 성녀가 되고 카드란을 죽이는 데 협력할 테니 그에 따른 대가를 주라고 하고 류크와 거래를 했다.

그렇게 카드란을 만나러 가기 직전 유이시엘은 지에렌에게 갔다. 지에렌은 사무를 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오는 유이시엘을 보고 일어나 다가왔다.

“괜찮니?”

“오라버니.”

그래, 이 사람은 자신을 동정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까?

“오라버니는 저를 도와주세요.”

“무엇을 말이냐.”

“란의 기억을 봉인해 주세요.”

유이시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지에렌은 곧장 알아차렸다. 그는 잠시 동안 유이시엘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지?”

“성물이 가르쳐 주었어요. 오라버니라면 도움을 줄 거라고요.”

지에렌은 한숨을 내쉬었다.

“성물이 딱 맞추었구나.”

그가 유이시엘을 보았다. 유이시엘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그 남자를 구하고 싶니?”

“네.”

“알았다.”

지에렌은 굳은 유이시엘의 눈동자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그 마도구다.”

마도구는 지에렌의 반지였다.

“가주의 진짜 반지지.”

지에렌은 유이시엘에게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녀는 반지를 바라보며 잠시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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