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 2부 -
1. 출구가 없는 미로
카드란은 겨울의 추위를 막기 위해 창문을 가린 커튼을 옆으로 밀었다. 창문을 통해 본 하늘은 맑고 높았다.
손가락 마디에 힘을 주고 손으로 창문을 누르는 카드란의 얼굴에는 많은 상념이 머물렀다. 그는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다 고개를 침대 쪽으로 돌렸다.
침대에서는 유이시엘이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청색 머리카락이 가지런히 정돈된 채였다.
코넬에게 잠든 유이시엘을 돌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녀는 유이시엘을 진심으로 모시고 싶어 하는 시녀였기에 안심할 수 있었다.
그는 정돈된 머리카락 한 줌을 손가락으로 만졌다.
이러는데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유이시엘이 잠이 든 지 벌써 3일이 지났다. 카드란의 기억이 돌아온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잃어버린 기억 속의 그녀는 유이시엘을 많이 닮았다. 그녀가 그대로 컸으면 유이시엘이 되었을 것이다.
그냥 닮은 사람인 거다……. 그녀가 지금의 유이시엘일 리가 없다.
그는 그렇게 끝없이 부정했다.
“그 기억이 진실일 리가 없어.”
그러니 얼른 유이시엘이 일어나서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아직 안 일어났네.”
허공에 빛이 생기더니 성물이 나타났다. 성물은 카드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유이시엘은 계속 자는 겁니까?”
카드란의 질문에 성물이 웃으면서 말했다.
“죽기 전까진 그렇지.”
카드란은 주먹을 움켜쥐고 입술을 짓이겼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이시엘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고, 기억을 되찾은 지금 남은 건 혼돈과 분노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유이시엘을 향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머릿속에 박힌 그 기억을 믿고 싶지 않았다.
“강제로 깨어나게 할 방법은 없습니까?”
“있어.”
카드란의 말에 성물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알려 줄까?”
“네.”
“너의 생명력을 사용하는 거야.”
성물의 말에 카드란의 입매가 굳었다. 한참 생각하던 그는 잠이 든 유이시엘을 바라보다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성물은 날갯짓을 하며 유이시엘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이번 황제는 어떤 선택을 할까?”
성물은 웃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 * *
어둠을 헤치고 카드란이 말을 타고 달렸다. 레카린이 호위를 데려가라고 했지만 그는 홀로 가야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카드란이 말에서 내렸다.
얼마 전 유이시엘이 사냥터에 도착하자마자 왔던 곳, 그리고 자신이 기억을 잃고 처음으로 눈을 떠서 보았던 곳. 그가 도착한 곳은 사냥터에 있는 넓은 공터였다.
공터에 나무들이 곧게 서 있었다. 마치 그가 기억이 돌아온 것을 알고 있는 듯 고고히.
“나보고 어쩌라는 것이냐!”
유이시엘이 과거의 연인이라고 치자. 그녀가 기억을 봉인한 탓에 자신은 유이시엘의 생명력을 앗았다. 쉽게 말하면 소중한 이의 생명력을 제 손으로 없애 버린 것이었다.
모든 것을 인정하면 자신이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것도 같이 인정해야 한다.
그는 주먹으로 나무를 쳤다.
절대로 그런 일은 있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거짓이야!”
그는 그렇게 소리치며 고개를 숙였다.
겨울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바람은 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마음에는 황량함만이 가득했다.
그토록 원하는 소녀를 찾았지만, 그 진실은 그에게 너무나도 무겁기에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 * *
카드란의 어머니 셀린은 이따금 묘한 꿈을 꾸고 미래를 예측할 줄 알았다. 그날도 오늘따라 몸이 안 좋다고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그 예측이 맞았다.
유이시엘이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며칠 동안 그녀의 집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없는 듯 어떤 소리도 나지 않았다.
어디를 간 것일까. 더 늦기 전에 그녀를 찾아야 했다.
“아버지에게 부탁해야 할까요?”
초조함 섞인 카드란의 말에 셀린은 걱정 어린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래야 할 것 같다.”
아들이 결혼까지 하고 싶어 한 소녀다. 소녀는 무척이나 인성이 발랐고, 무엇보다 아들을 사랑했다. 이미 가족이나 다름없는 소녀였기에 셀린도 꼭 찾고 싶었다.
그분이 도와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내일 가서 도와 달라고……!”
그 순간 셀린이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카드란, 비상구에 숨어.”
셀린의 다급한 말에 카드란은 당황했지만 일단은 어머니 말대로 했다. 가끔 어머니를 찾아오는 귀족들이 있었다. 지금 황태자에게 만족하지 못한 귀족들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일에 연루되기 싫었기에 카드란은 종종 비상구에 숨어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했다.
모두 다 구역질나는 이야기였다.
“카드란, 절대로 나오지 마렴.”
셀린은 그렇게 단단히 말했다.
카드란은 비상구 안에 들어가서 어머니가 귀족들과 하는 이야기를 엿듣고 있을 생각이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몇몇 사람이 들어오는 듯했다.
일단 그들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찬양하겠지. 어머니의 환심을 산 뒤, 자신을 찾아 황자가 되라고 말해야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카드란은 여유롭게 그들이 나가길 기다렸다. 그런데 오늘 들어온 이들은 달랐다.
“아들은 어디 있지?”
다짜고짜 자신을 찾았다.
‘저 목소리는…….’
류크 로이체란, 로이체란 가문의 실질적인 수장이었다. 이따금 일하는 세무서에 찾아와 부당한 짓을 하는 사람이었기에 잘 알았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의 배다른 동생의 외할아버지였다. 그런 류크가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그리 좋은 조짐은 아닐 것이었다.
나가야 하는 걸까.
“내 아들은 찾지 못할 거예요.”
셀린의 말에 류크가 소리쳤다.
“말하지 않으면 죽을 텐데?”
그러고 뭔가 찌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직 살아 있어. 그러니 얼른 말해. 칼 받이가 되기 싫으면.”
어머니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칼에 찔리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류크는 다시 한번 카드란의 행방을 물었다.
그것이 몇 번이 반복되었다. 카드란은 작은 통로 속에 갇혀 그 소리를 생생히 들었다.
어머니가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이곳만 가리키면 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당장 나가서 그들을 물리쳐야 한다. 하지만 검술도 배우지 않은 카드란은 그들을 죽일 수 없었다.
끼어들면 그냥 둘 다 죽을 뿐이었다.
〈나오지 말렴.〉
어머니는 항상 사람들이 찾아오면 그렇게 말했다.
혹시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것일까.
카드란은 그제야 어머니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독한 년.”
류크는 그렇게 말하고 어머니에게 무슨 짓인가 하는 듯했다. 그리고 주변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시신을 없애기 위해 불을 지핀 것이었다.
‘어머니.’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를 구하지도 못하고 나가서 그들을 물리치지도 못했다.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는 이렇게 숨어 어머니가 죽어 가는 소리를 듣는 것뿐이었다.
그의 마음이 천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어머니가 죽는 순간을 생각하며 그는 이를 악물었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울음을 삼키며 마음도 눌렀다.
* * *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는 미쳐 갔다. 그래서 복수를 맹세하고 황자가 되어 황제를 찾아갔다.
황제는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류크를 없앨 수는 없다며 자신을 별장에 숨겨 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왔다. 전서구에는 쪽지가 달려 있었는데 별장 근처에 폐가로 와 달라는 내용이었다. 유이시엘의 필체였다.
유이시엘이 자신이 있는 곳을 어떻게 안 것일까.
의문을 안고 그는 유이시엘을 만나러 걸어갔다. 폐가에는 아무도 없어 보였다. 같이 온 호위 기사를 밖에 세워 두고 카드란은 안으로 들어갔다.
폐가의 공기는 어둡고 무거웠다. 금방이라도 죽은 자가 튀어나와 하소연을 할 것 같았다.
그리고 폐가의 가장 구석진 방 안에 유이시엘이 서 있었다. 어딘가 수척해지고 아슬아슬한 분위기였다.
“란, 왔어?”
유이시엘이 카드란에게 다가왔다.
“응, 유엘.”
카드란은 얼른 유이시엘에게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셀린 님이?”
“그것도 비참하게…….”
“류크가 죽인 거구나.”
카드란은 유이시엘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에 놀랐다.
“란, 사실 난 성녀야. 그리고 내 원래 이름은 유이시엘 로이체란이래.”
카드란의 몸이 굳었다. 그는 잠시 유이시엘에게서 떨어졌다. 그녀가 슬픈 눈으로 카드란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거짓말이지? 류크가 어머니를 죽이는 소리를 내가 듣고서, 로이체란 가문에 복수를 꿈꾸고 있는데! 어째서 유엘이 로이체란 사람이라는 거야?”
카드란이 소리쳤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운명을 원망하고 싶었다.
그는 소리를 치다 허탈하게 웃었다.
“그 말을 하러 온 거야?”
“아니.”
유이시엘은 그에게 저벅저벅 걸어왔다.
“란은 내가 로이체란 사람이라 해도 사랑할 거야.”
“그렇겠지. 유엘이 로이체란 사람이라고 해서 이번 일과 관련 있는 건 아니잖아?”
카드란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어떻게 성녀가 된…… 거야?”
“류크가 강제로 만들었어.”
“그 자식이! 도망치자. 복수는 일단 뒤로하고 유이시엘이 성녀면 황제의 것이 되는 거잖아!”
“복수는?”
“복수는 할 거야. 하지만 유이시엘이 성녀가 된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어. 류크가 강제로 성녀로 만들었으니 좋은 목적이 아닐 거야. 그러니 도망쳐서……!”
“카드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유이시엘이 카드란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다음 그녀가 뭔가를 외웠다. 카드란은 머리가 미친 듯이 아파 왔다.
“나를 잊어.”
유이시엘의 말을 마지막으로 카드란은 정신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