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저건…….”
「네가 가장 행복했을 때야.」
거울 속에서 카드란이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어린 유이시엘의 죽음을 듣고 그가 슬퍼했을 때 성녀의 비밀을 알고 눈물을 흘리던 그, 자신을 끌어안은 그의 품에 있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더랬다.
기억을 봉인할 때 가장 중요한 기억은 흔적이 남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는 어린 유이시엘의 흔적이 남았다.
사라졌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것만 지웠는데 그래서 완전히 사라졌을 거라고 믿었는데.
그는 어린 유이시엘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기뻤어?」
성물이 물었다.
유이시엘은 벅차오르는 감동을 누를 수가 없었다.
“네.”
그가 자신을 기억해 줘서 기뻤다.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어린 유이시엘의 그림자만큼은 오래 간직하기를 바랐다.
이기적인 마음이란 것을 알지만, 그러기를 원했다.
「깨어나면 카드란이 있을 거야. 네가 잠이 들고 나서 계속 방에 있었어.」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빛을 마주하고 난 뒤 눈을 떴다.
성물의 말대로 카드란이 손을 꼭 잡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였다.
“폐하?”
꿈인 걸까?
유이시엘은 멍하니 그를 보았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새로운 성녀에 대해 이야기해야겠죠?”
그에 카드란이 그녀의 손을 놓고 말했다.
“아직 그대가 성녀다.”
“전 곧 죽어요.”
유이시엘은 사실을 말했다.
“그런데 새로운 성녀를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을 거라고 하시던데……. 그럼 성녀의 의무를 대신할 사람을 따로 뽑아야 할 거예요.”
“그렇군.”
“그리고…….”
유이시엘이 말을 하는 도중에 카드란이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넌 왜 아무런 감정이 없지?”
그는 몇 번이고 묻었던 말을 또 뱉어 냈다. 유이시엘이 무심해 보일 때마다 외쳤던 말이기도 했다.
“나를 원망해라.”
유이시엘은 그냥 웃었다.
“원망하면 달라지는 게 있나요?”
“유이시엘……!”
“폐하, 저는 원래 류크를 싫어해요. 폐하께서 이런 짓을 하지 않아도 그를 원망해요. 그러니 저를 다그치지 않아도 돼요.”
“그런데 넌 어째서 초연한 거지?”
“그냥 마음을 내려놓아서 그런 거예요.”
조용조용히 다가온 그녀의 말은 카드란의 심장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자신도 그렇게 내려놓은 것 같았기에.
“하아.”
카드란이 숨을 몰아쉬었다.
“모든 성녀 활동을 중지해. 지에렌만 치료해.”
그는 그렇게 선언하고 일어났다.
“성녀는 안식의 순간이 오면 황궁을 나간다고 하더군. 그렇지만 그대는 나가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다.
죽기 전까지 곁에 둘 생각인 것 같았다.
* * *
황궁으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더 길었다. 카드란은 본능적으로 유이시엘과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녀가 쓰러졌다는 말을 들으면 일부러 마차를 멈추고 기다렸다가 다시 일어나면 마차를 움직였지만 유이시엘의 얼굴은 보지 않았다.
오늘 유이시엘은 피를 토했다.
“성녀님.”
“괜찮아요.”
소엘이 외침에도 유이시엘은 말없이 웃으면서 피를 닦았다.
“정말로 괜찮으신 게 맞나요?”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힘을 많이 사용해서 그래요.”
자신이 곧 죽는다는 말을 할 수 없기에 유이시엘은 적당히 둘러댔다.
성녀의 죽음은 민감한 상황이었다. 카드란을 제외하고 다른 이들이 아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렇게 황도로 향하면서 유이시엘은 몇 번이고 피를 토했다. 그리고 황궁에 도착해 황비궁으로 향했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렸을 때, 카드란이 있었다.
“가도록 하지.”
오랜만에 보는 카드란의 얼굴이 반가웠다. 죽음이 다가오자 그가 많이 그리워진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아득히 밀려오는 잠기운에 유이시엘이 눈을 감았다. 쓰러진 그녀를 카드란이 부축했다.
“폐하.”
레카린도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소엘과 레카린은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유이시엘을 보았다.
“황비를 방에 두고 오지.”
카드란은 말없이 유이시엘을 그녀의 방에 옮겼다.
눈을 감은 그녀는 잠에 빠져 있었다. 이제 류크에게 유이시엘이 죽어 간다는 것만 말하면 된다. 그렇게 말하면 복수의 반은 성공한다.
‘하아.’
그런데 왜 눈물이 날 듯이 마음이 쓰린 것일까.
그녀가 죽어 가게 하는 것은 자신이 의도한 일임에도 후폭풍이 심했다.
그가 지그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그때 허공에 성물이 나타났다.
“드디어 황궁에 도착했네.”
성물은 카드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새로운 성녀 후보가 태어날 거 같아. 그런데 성녀가 되려면 15년은 걸려.”
“필요 없습니다.”
“그래?”
성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성물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황제는 그가 처음이었다. 성물은 고민하더니 그에게 속삭였다.
“유이시엘을 좀 더 빨리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아는데 왜 잠자코 있어?”
다른 사람을 좀 더 치료하게 하면 된다.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그녀에게 치료를 시키면 그녀의 안식 기간도 곧 끝난다.
그러면 그녀는 죽는다.
카드란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더 이상 성녀는…….”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다.
어머니가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도대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울고 싶었다. 자신을 누군가가 구해 주기를 바랐다.
그때, 문이 열리고 세안이 들어왔다.
“여기 계신다고 들었어요.”
“무슨 일이지?”
“폐하께서 돌아오시기를 너무 기다렸어요.”
세안은 그에게 서류를 내밀며 소리쳤다.
“다 가짜예요. 조사해 본 결과 황비마마는 류크 로이체란 저택에서 살지 않았다고 해요.”
“뭐?”
세안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카드란은 제 안의 뭔가가 무너짐을 느꼈다.
사실이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황비마마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고 해요. 그 전까지 그녀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몰랐고요.”
카드란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부정했다.
“……별장에서 키운 건가?”
그래야만 한다.
카드란은 속으로 외쳤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찝찝한 걸까.
그는 이안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세안, 유이시엘에게 치료를 받은 이들이 누구인지 모두 다 조사해.”
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이시엘에 대한 조사가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으면 이 불안감을 누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 * *
유이시엘이 일어났을 때, 곁에 코넬이 있었다.
“코넬?”
“폐하께서 보내셨어요.”
“……그래?”
왜 그의 마음이 약해진 걸까. 죽는다는 말을 듣고 불쌍해하는 걸까?
결정적인 순간에 마음이 약해진 그를 생각하며 유이시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래도 코넬을 봐서 기분이 좋았다.
“성녀님, 이상한 병에 걸리셨다면서요?”
“내가?”
“자꾸 주무신다고…….”
“그렇지.”
본래 성녀는 안식기에 들어서면 황궁을 나가니 그 마지막을 아는 이들은 드물었다.
유이시엘은 늘 하던 대로 일어나 지에렌을 치료하기 위해 오라버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를 치유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 * *
카드란이 서신을 보내 헬몬 공작인 라젤란을 불렀다. 황제의 급서를 받은 라젤란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저를 부르는 이유가 아무래도 성녀와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카드란은 성녀를 필요 이상으로 혹사시켰다. 얼마 안 남았던 목숨이 더 많이 사라졌을 것이었다.
“놀라실 테지.”
로이체란 가문의 사람이 자신을 몰래 도와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충격이 크실 것이다. 게다가 그 상대가 자신이 복수하기 위해 괴롭혔던 사람이라면 더욱더.
이를 어쩐다…….
유이시엘과의 약속은 지켜야 하지만 황제가 날뛸 텐데 말을 안 할 수도 없고.
고민을 하던 그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렇게 황제의 집무실에 도착한 그는 카드란의 앞에 섰다.
“왔는가?”
카드란의 앞에는 서류들이 있었다. 아무래도 유이시엘이 나서서 치료했던 이들에 대한 자료를 입수한 듯했다.
그것을 보며 카드란이 한마디 했다.
“유이시엘이 치료했던 이들 중에 그대의 아들도 있더군.”
“맞습니다.”
“그리고 대가가 무엇이었지?”
그러자 라젤란은 싱긋 웃었다.
“누군가를 지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카드란은 숨을 들이켰다.
“아바마마께서 짐을 지원해 달라고 명령을 한 것인가?”
“선황제 폐하께서 제 아들을 치료하라고 명령 하셨지만 그분의 온전한 뜻은 아니었습니다. 자세한 것은 말씀드릴 수 없군요. 누구에게도 사실을 알리지 않겠다고 약조를 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만 말해도 그는 눈치챌 것이다.
“헬몬 공작!”
카드란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다른 이를 추궁하십시오.”
“누구를 말인가?”
“지에렌 로이체란.”
카드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깨우십시오.”
그렇게 말은 했지만 라젤란은 끝까지 유이시엘이 비밀로 해 달라 당부했던 것은 언급하지 않았다.
“저 역시 진실은 밝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어서 말입니다.”
그에 카드란은 곧바로 지에렌이 있는 방으로 걸어갔다. 라젤란이 남긴 말이 그의 가슴을 쑤셨다.
도대체 유이시엘의 목적은 무엇일까. 무엇이기에, 이런 식으로 자신의 주변을 건드린 걸까.
잠이 든 그녀를 다그칠 수는 없으니 미칠 것 같다.
그리고 사실 그녀에게서 듣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직접 사실을 알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