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 * *
시간이 흘렀다. 카드란은 네제리안의 일이 마무리되고 다음 전쟁터로 떠났다. 그곳에서도 유이시엘은 힘을 사용했다. 그녀는 일반 병사들을 치료하며 생명력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날도 유이시엘의 목숨을 깎기 위해 카드란이 다음 전쟁터로 향하려고 했다. 그 전에 잠시 커피를 마시는데 성물이 허공에 나타났다.
“무슨 일입니까?”
카드란의 말에 성물이 웃었다.
“한 가지 말하지 않은 게 있어서.”
“성녀와 관련 있습니까?”
“응, 맞아.”
“너무 힘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라면…….”
“그런 거 아니야.”
성물은 고개를 얼른 저었다.
“이제 새로운 성녀를 뽑아야 하는데 후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아서 기다려야 해.”
성물의 재잘거림에 카드란의 몸이 굳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성물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성녀라니요?”
“유이시엘은 이제 반년 뒤에 죽어.”
그렇게 말하며 성물은 싱긋 웃었다.
“네가 바라는 대로.”
성물의 말은 잔잔했지만 그것이 일으킨 파문은 엄청났다.
카드란의 마음이 쿵 하고 떨어졌다.
9. 믿을 수 없는 사실
성물의 힘을 사용하고 서서히 목숨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삶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고 깨달은 것은 오늘 아침에 피를 다시 토했을 때였다.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성물이 더 이상 피를 토하는 것을 감출 수 없다고 했다.
카드란과 전쟁터를 전전했으니 이렇게 죽어 가는 것은 당연할지도 몰랐다.
“하아.”
“이제 새로운 성녀를 뽑아야 한다고 황제에게 알려야 해.”
성물이 나타났다. 피를 닦던 유이시엘은 더 이상 카드란에게도 감출 수 없음을 알아챘다.
“알겠어요.”
그녀의 말에 성물이 다시 사라졌다.
멍하니 앉아 있던 그녀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성녀의 생명력이 반년 남으면 황제는 새로운 성녀 후보를 기다리고, 이전의 성녀는 새로운 성녀에게 할 일들을 정리해 주며 죽음을 기다린다.
어느 순간부터는 성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반년 뒤에 새로운 성녀가 탄생하도록 일을 꾸몄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정리를 해야 하는데…… 과연 카드란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죽기 전까지 병사를 치료하는 일을 시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슬픔이 밀려왔다.
유이시엘은 심장을 잠시 진정시키기 위해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지금은 아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 * *
카드란은 성물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벌써 그녀가 죽는 겁니까? 그 정도로 힘을 사용하게 하진 않았는데!”
“일찍 죽어서 좋지 않아?”
“그건…….”
유이시엘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얼른 죽었으면 좋겠다고 스스로 몇 번이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로 그녀가 죽어 가고 있다니.
그리고 목숨이 반년밖에 안 남았다니.
“새로운 성녀는 어떻게 할 거야? 이전 황제들처럼 너도 성녀를 만들 거지?”
성물이 달콤한 목소리로 물었다. 성물은 유이시엘이 했던 말이 깨지기를 바라는 듯했다.
어차피 그 역시 소녀들을 희생해서 새로운 성녀를 만들지 않을까 하며.
카드란은 그런 성물을 바라보았다.
“제가 그러길 바라는 것 같군요.”
“모두 다 그랬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전 그런 짓은 안 합니다.”
성물은 의외라는 듯 물어보았다.
“왜 안 해?”
“제가 미친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런 짓까지 해 가며 황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무능력한 남자는 아닙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유이시엘을 만나러 갔다.
성물은 카드란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문이 닫히고 혼자서 남아 중얼거렸다.
“정말로 안 하네.”
유이시엘이 한 말이 맞다.
“으흠…….”
성물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일단은 카드란이 유이시엘에게 어떤 짓을 할지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 * *
유이시엘이 제 방에서 멍하니 있는 와중에 문을 열고 카드란이 들어와 유이시엘을 응시했다.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더군.”
“맞아요.”
그는 저벅저벅 걸어와 그녀의 멱살을 잡았다.
“도대체 어디에 쓴 거지? 고작 병사들 몇 명 치료한 것뿐인데 어째서 생명력이 다 사라진 거냐!”
“류크에게 복수를 하지 못해 화가 나신 건가요?”
유이시엘의 말에 카드란의 몸이 굳었다.
자신은 도대체 왜 화가 난 걸까
“어찌 되었든 제가 죽어 가면 복수가 완성되잖아요. 그거면 되었지, 무엇을 바라세요?”
유이시엘은 카드란의 손을 잡았다. 작은 손에 힘을 넣어 카드란의 손을 놓게 했다.
“제가 좀 더 괴로워하지 않아서 실망하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저의 의지가 아니에요.”
유이시엘은 조곤조곤 말을 했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다.
늘 각오하고 있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모든 삶의 의지를 놓아 버렸기 때문일까.
카드란은 그녀의 태도에 미칠 것 같았다. 게다가 왜 이렇게 그녀에게 화가 나는지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그는 한참을 이를 악물며 그녀를 바라보다 방을 나왔다.
“하아.”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기던 그는 얼른 몸을 돌려 굳은 표정을 지었다.
일단은 황궁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 * *
유이시엘은 마차에 올라탔다. 생명력이 줄어 체력도 얼마 없었다. 카드란은 유이시엘의 체력을 고려해 천천히 움직였다.
“아, 답답해.”
유이시엘의 마차 안에서 성물이 투덜거렸다.
“황제가 정말로 성녀를 뽑지 않잖아.”
성물은 투덜거렸다. 그러자 멍하니 있던 유이시엘이 고개를 돌렸다.
“제가 말했잖아요. 그는 정말로 성녀에 관심이 없어요.”
힘을 사용하게 하는 것도, 그녀를 죽이기 위해서다.
유이시엘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푸르른 기운이 넘쳤다.
“유이시엘, 그거 알아?”
“뭘요?”
“카드란은 역대 황제 중에서 가장 성녀에게 냉정해.”
유이시엘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로이체란 가문의 사람이라서 그래요.”
“그게 아니라…….”
성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역대 황제들 중엔 성녀와 적이었던 사람이 많아. 하지만 그들은 곧바로 성물의 힘에 반해 성녀 앞에 무릎을 꿇었어.”
하지만 카드란은 그러지 않았다. 성물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성물이 흥얼거렸다.
“그는 일반적인 황제와 달라. 그래서 지켜보는 재미가 있지.”
“다음 대의 성녀가 나타나도 재미있을 거예요.”
그러자 성물은 싱긋 웃었다.
“다음 대의 성녀는 당장은 찾기 힘들어. 생명력이 강한 사람이 없단 말이지.”
성물은 그렇게 휘파람을 불며 사라졌다.
홀로 남은 유이시엘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당장 성녀를 구할 수 없다면 카드란은 어떻게 할까. 그의 치세에 영향이 갈 텐데.
그녀는 걱정이 되었다.
그 순간 하늘이 노래졌다.
* **
“전쟁터를 돌겠다는 계획은 왜 취소하신 겁니까?”
레카린의 말에 카드란은 고개를 들었다.
“황궁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생겼다. 자세한 건 말할 수 없다.”
냉정한 말이었지만 레카린은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카드란은 수하들에게도 자신의 생각을 자주 말하지 않았다. 그저 필요한 말만 조금 할 뿐이었다. 그래서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숙소에 도착하자 마차가 멈추었다. 레카린과 카드란이 내리는데 소엘이 달려왔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지?”
“성녀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카드란이 얼른 유이시엘을 향해 달려갔다.
마차 안에 유이시엘이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잠이라도 자는 듯, 하지만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듯이 고요히 쓰러져 있었다.
“유이시엘!”
카드란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얼른 흔들었다. 하지만 유이시엘은 깨어나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그는 일단 유이시엘을 방으로 옮겼다. 레카린과 소엘에게 시켜 의사를 부르고, 혼자서 초조해하는 마음으로 유이시엘을 간호했다.
원수의 조카인데, 왜 이리 마음이 아픈 걸까.
이제 미련을 모두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 그녀 때문에 마음이 아플 일 따위 없을 거라 자신했는데.
그런데 자신의 마음은 생각보다 컸다.
그런 카드란 앞에 성물이 나타나 지금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성녀는 수명이 다하면 자주 잠을 자. 내일이면 일어날 거야.”
그에 카드란의 마음이 무너졌다.
그녀가 죽는 것은 언제나 바라던 일인데 왜이리 마음이 미어질 듯 아플까.
그는 고개를 숙였다.
“제 마음을 모르겠군요.”
“네가 네 마음을 모르면 어떻게 해?”
“정말로 증오해야 하는데…….”
왜 갑자기 마음이 약해지는 것일까.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일을 꾸미고 전쟁터를 돌고 있었는데, 이제는 취소하고 황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더 일을 진행하면 자신의 마음이 남아날 것 같지 않았다.
침대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빛이 났다. 찰랑이는 머리카락을 만지던 그가 유이시엘의 손을 잡았다.
“왜 그대는 류크의 총애를 받는 여자인 거냐.”
카드란은 몇 번이고 하고 싶었던 말을 읊조렸다.
* * *
유이시엘은 작은 공간 안에 있었다.
이곳이 말로만 듣던 성녀의 방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공간에는 거울이 하나 있었다. 허공에 뜬 거울은 빙글빙글 돌더니 유이시엘 앞으로 다가왔다.
「안녕.」
성물의 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추억의 방이야. 네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비추어 주지.」
유이시엘은 거울 앞에 섰다. 그러자 거울에서 빛이 나며 과거의 모습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