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 * *
전장의 바람은 매섭다. 카드란은 말을 타고 가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폭죽이 터진 곳으로 달렸을 때는 이미 바닥에 피가 흥건히 흐르고 있었다. 병사들을 둘러싸고 이민족들이 커다란 원을 그리며 공격을 하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기첼이 피를 흘리며 쌍검으로 적들을 상대하는 것이 보였다.
순간 거대한 검이 기첼을 향해 질러왔다.
“기첼!”
카드란이 소리쳤다. 그에 기첼은 얼른 정신을 차려 달려드는 검을 막았다. 그리고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추가 병력 지원이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카드란을 필두로 달려온 기사들이 갑옷을 입은 채로 기첼이 있는 곳을 향해 돌진했다.
그 모습을 보고 부족장은 이를 갈았다.
이번 전투로 록센나 제국의 병사들이 많이 죽었다. 조금만 더 하면 전멸시킬 수도 있었는데 추가 기사단이 도착했다.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들은 얼른 재정비하고 카드란을 공격하기 위해 대열을 가다듬고 달리기 시작했다.
카드란은 검을 휘두르며 기첼과 다른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싸웠다.
* * *
유이시엘은 막사와 인근 성에서 자라는 약초 목록이 정리된 것을 읽었다. 다친 사람은 많은데 약초가 무척이나 부족했다.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에 유이시엘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쪽으로 자금이 지원되지 않았나요?”
유이시엘의 말에 이안이 혀를 찼다.
“이것도 나아진 겁니다.”
“……그렇군요.”
“다른 부대는 모르겠지만 이 부대는 그 정도 자금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는 웃으면서 말했고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의 사람을 여기서 우연히 조우하게 되다니.
유이시엘은 서류를 다시 넘겼다.
“폐하께 이 자료를 넘겨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황궁에 가서 약초 예산안을 조금 손을 보도록 할게요.”
유이시엘의 말이 든든했다. 이안은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병사가 다가와 말을 했다. 유이시엘은 얼른 서류를 들고 가려고 했다. 이안도 직접 뭔가를 챙기고 있었다.
* * *
카드란은 정식 황자가 되고 나서 검술에 미친 듯이 매달렸다. 자신이 검을 다룰 줄 알았더라면 어머니를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해서였다.
그런 그를 가르친 것은 이안이었다. 그는 카드란이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그의 스승으로서 검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카드란이 전쟁터로 가고 나서 그는 돌연 행적을 감추었다.
그래서 카드란은 기첼과 병사들을 데리고 돌아왔을 때 이안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스승님?”
카드란은 얼른 말에서 내려 그에게 걸어갔다.
“황제 폐하를 뵈옵니다.”
“어떻게 여기 계십니까?”
“이곳에 손이 필요하다고 해서요. 하하.”
이안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유이시엘 옆에 섰다.
“성녀님께 필요한 약초에 대해 말씀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이안이 웃었다.
“무사히 커서, 황제가 되셔서 다행입니다.”
이안의 진심으로 말하는 듯했다. 그러자 카드란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덕분에 살아남았습니다.”
“제 덕분이 아니지요. 폐하께서 모두 목숨을 걸고 이루신 것입니다.”
이안은 어색하게 웃었다. 카드란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유이시엘을 응시했다.
기첼이 많이 다쳤다. 그를 따르는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단은 다친 병사들을 병실로 옮기겠습니다.”
“아, 그리고 다친 병사들을 치료할 의사가 있습니까?”
카드란의 말에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습니다.”
“병실에서 그들을 모두 물리십시오. 성녀와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친 병사들을 데리고 성녀와 할 이야기가 있다니? 이안은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은 알겠다며, 카드란이 바라는 대로 일을 처리하겠다고 했다.
* * *
병실에 사람은 많았다. 모두 다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카드란에게는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유이시엘에게는 아니었다.
그녀는 불길한 예감에 카드란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요?”
모든 의사를 다 물리치고 그가 움직였다.
“유이시엘.”
카드란이 그녀를 향해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 있는 환자들을 전부 치료하도록 해.”
성녀의 힘은 오로지 황제의 허락하에서만 사용되도록 되어 있었다. 생명력을 사용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 힘을 황제를 위해 쓰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지금 카드란은 여기 있는 병사들을 위해서 힘을 쓰라는 거였다.
“난 전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그대의 힘을 사용하게 할 거다.”
“……그렇군요.”
유이시엘은 슬퍼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은 그가 아닌 타인을 치료하면서 죽어 가는 거다.
“억울한가?”
“……아니요.”
“화가 나나?”
“그렇지 않아요.”
유이시엘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런 날이 언젠가 오지 않을까 했어요.”
“그대의 무심함에 짜증 나고 화가 나. 하지만 차라리 그대에게는 이편이 나을지도 모르지.”
카드란은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턱을 잡고 들었다.
“그 소녀들의 생명력을 얻고도 그대는 아직도 살아 있다. 그들의 절망을 잡아먹고 그대는 로이체란 사람이기에 살아남았겠지. 그런 그들의 생명을 남을 위해 쓰는 건 당연한 일이야. 짐은 복수를 해서 좋고, 그대는 속죄를 해서 좋고. 그렇지 않나?”
그는 긴말을 하고는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대를 전쟁터에 데리고 다니면서 목숨을 쓰게 할 거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그대도 죽겠지.”
그는 자신이 좀 더 빨리 죽기를 바라는 듯했다.
“그게 폐하께서 바라시는 건가요?”
“당연한 거 아닌가? 류크의 잘난 얼굴을 떠올리며 원망하고 죽어 가도록.”
카드란이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쓴웃음이었다. 이전처럼 기대에 차 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날 밤, 와인을 마신 이후로 그는 억지로 복수를 위해 꾸역꾸역 자신을 괴롭히는 행위를 지속해 가고 있었다. 그것을 유이시엘도 느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되었든 자신은 죽어야 한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유이시엘은 고개를 숙였다. 카드란이 자신이 빨리 죽기를 바란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음이 무너졌다.
이제 무너질 마음 따위 없다고 생각했는데…….
유이시엘은 힘을 사용했다. 강력한 빛이 병실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숨 한 달 치가 사라졌다.
사라진 목숨을 느끼며 유이시엘은 생각했다.
자신이 죽는다면 카드란은 기뻐할 것 같다. 그 생각이 유난히 마음에 박혀 많이 아팠다.
동시에 생일날 들었던 말도 기억나면서 그때에 느꼈던 절망이 조용히 수면 위로 올랐다. 그녀는 그렇게 절망과 함께 무너졌다.
카드란은 그것을 몰랐고, 그저 류크에게 복수를 제대로 했다며 자신이 마음을 극복했다고 여겼다.
* * *
이안이 방에 있는 카드란을 개인적으로 찾아왔다.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병실에 있던 환자들이 모두 다 거의 나았다. 조금만 처방해 주면 되었기에 그는 카드란에게 감사해했다.
“감사합니다.”
“모든 게 다 성물의 은덕입니다.”
“아닙니다, 폐하께서 이곳을 돌봐 주신 덕분입니다.”
“전쟁터를 좀 더 돌아다니려고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약품들을 정리하고, 조사해서 이것들을 가지고 군대의 환경을 좋게 하겠습니다.”
“말만 들어도 든든합니다.”
카드란의 말에 이안이 웃었다.
“그런데 왜 황실 기사단을 그만둔 겁니까?”
그는 고개를 젖힌 채 과거를 회상하는 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사실 로이체란 가문에서 자객을 보내서…….”
“네?”
“그쪽 가문의 방해 공작이 좀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팔을 다쳐 검을 쥘 수 없게 되었습니다.”
카드란이 이를 악물었다.
“그랬군요.”
“류크를 꼭 처리해 주십시오.”
카드란은 다시 복수를 다짐했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버린 류크를 그냥 둘 수 없었다.
“물론입니다.”
“그리고 성녀님은…….”
이안이 말하기를 머뭇거렸다. 그가 뭔가를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안 카드란은 턱을 들었다. 그에게 말을 하라는 신호였다.
“사실 절 치료해 주신 게 성녀님이십니다.”
놀라운 사실이 나왔다. 카드란은 정신이 경악하며 물었다.
“아바마마의 명령이었던 겁니까?”
그러자 이안이 고개를 저었다.
“성녀님이 자청하셨습니다.”
순간 카드란이 손끝이 떨렸다.
“자청하다니요?”
“폐하께 간청하셔서 저를 살렸습니다.”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유이시엘이 자신을 살린 것도 그렇고 이안을 살린 것도…… 모두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럴 리가……?”
“그분은 류크와 다른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안의 진심 어린 말에 카드란의 마음이 흔들렸다.
자신 역시 유이시엘이 로이체란 사람과 다르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복수를 해야 했기에 마음을 누르고 그녀에게 치료를 하게 했다.
그런데 이안이 자신을 구해 준 사람이 그녀라고 한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참고하겠습니다.”
카드란은 이안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이안이 나가고 카드란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지만 멈출 수 없어.”
유이시엘이 이안을 구해 주었다고 해서 그녀는 여전히 로이체란 가문의 사람이었다. 류크가 가장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조카.
그렇기에 그녀를 서서히 죽이는 일은 멈출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