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그녀도 오랜만에 눈물을 흘렸다.
그가 말없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유이시엘은 잠자코 그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지만.”
그는 유이시엘을 놓아주었다.
“그래도 오늘은 고마웠다.”
그는 이내 몸을 돌려서 방을 나갔다. 유이시엘은 자신을 안았던 카드란의 품을 떠올리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란.”
나는 살아 있지만 곧 죽어요.
그것도 당신의 손에 죽게 되겠죠.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예요.”
이 사실을 안다면 그는 평생 절망에 빠지겠지.
잠시 기억이 돌아왔을 때 그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했다.
그토록 절망하는 그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안고 가는 것은 자신 혼자로 족했다.
* * *
카드란은 황제의 궁으로 향했다. 저벅저벅 걷던 그는 문득 결혼식 직후 유이시엘과 만났던 정원에서 발을 멈추었다.
여기서 그녀를 만나 물었었지.
자신을 왜 살렸냐고.
“그 행위에 의미가 있기를 바랐던 걸까.”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고 허탈하게 웃었다.
소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자신의 마음은 박살이 났다. 때문에 와인을 마시며 유이시엘을 읊조렸다. 그런데 그 소녀에 대한 생각을 겨우 밀어내자 유이시엘이 마음에 떠올랐다.
“하아.”
과거의 소녀에게 집착하는 한편, 성녀인 유이시엘에게 집착한다.
유이시엘.
이 이름에 자신은 매달려 있다.
“뭐야, 예상하고 다르잖아.”
그리고 성물의 소리가 들렸다.
“유이시엘을 죽이지 않고 위로를 받으러 가다니. 그런 게 어디 있어.”
성물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에게 계속 말했다. 그러자 카드란이 성물을 항해 바라보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카드란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들었다.
“멍청이같이 마음을 주고 말이죠.”
그의 말에 성물이 웃었다.
“이제야 마음을 깨달았네.”
성물은 카드란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넌 과거의 소녀도 그렇지만, 지금 네 곁에 있는 유이시엘도 사랑해. 집착하고 있지. 그녀를 안고 싶어서 몸이 난리 났잖아.”
그녀를 품에 넣은 순간 격하게 안고 싶어졌다.
그녀를 품고 열락에 취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짓만은 할 수 없다.
“그런 욕구 따위에 지지 않을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제 제 마음을 깨달았다 해도 복수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류크가 그 아이도 죽여서?”
성물의 말에 카드란은 말이 없었다. 대신 하늘을 바라보다 그저 성물을 향해 눈길을 주었다. 성물은 그의 눈빛을 알아듣고 사라졌다.
그렇게 카드란은 마음을 깨달았지만, 더욱더 복수를 멈출 수 없게 되었다.
8. 절망
“마음을 자각했고.”
그렇게 중얼거린 이는 금발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가졌다. 성물의 현신이기도 한 그는 수도의 상공에 올라와 조용히 빛을 내고 있었다.
카드란이 드디어 마음을 자각했다. 평생 자각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드디어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황제가 성녀를 사랑하게 된다. 이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너는 과연 무슨 선택을 할까.”
성물은 허공을 향해 나직이 웃었다.
유이시엘은 카드란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그리고 남은 순간까지 기억을 봉인한 채로 모든 것을 안고 가려고 한다. 카드란은 이제 마음을 자각했어도 유이시엘을 죽이기 위해 움직이려고 한다.
둘 다 불쌍한 이들이다.
하지만 성물은 그것을 고려할 생각이 없었다.
“카드란 레이시아 록센나.”
그는 카드란의 긴 이름을 읊조렸다.
“너는 과연 어떻게 움직일까.”
성물의 눈이 반짝거렸다.
* * *
유이시엘은 밤이 늦도록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서류를 다 봤는데도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서 뒤척이는 중이었다.
“유이시엘!”
허공에서 빛이 나더니 성물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에요?”
유이시엘이 몸을 일으켜 성물에게 물었다.
성물은 싱긋 웃더니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나 말이야, 결심했어.”
“어떤 것을요?”
“황제를 도와줄 거야. 유이시엘이 안타깝지만, 난 황제의 편이 되어야 해.”
“그렇다면 전 어떻게 되나요?”
유이시엘이 슬픈 눈으로 물었다.
“좀 더 일찍 죽을 거야.”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성물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좀 더 살고 싶어?”
성물이 다가와 물었다.
유이시엘은 가슴을 꾹 눌렀다.
“아니요.”
다른 이들의 목숨을 잡아먹고 살고 있다.
삶의 유일한 의지였던 그는 그녀를 놓았다.
그렇기에 그녀의 삶은 무미건조하고 무기력했다.
슬프지만, 그녀는 더 이상 삶에 대한 의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