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39/97)

39화

“그런데 저에게 특별한 선물을 준다고 하시던데.”

“누가 그랬습니까?”

“여기 오면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셀진에게 슬쩍 이야기를 흘리라고 레카린에게 말했는데 대놓고 흘렸나 보다.

“기대하셔도 됩니다.”

카드란은 그렇게 말하고 그와의 만남을 마쳤다. 그리고 집무실에 들어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유이시엘을 맞이했다.

“선물 준비가 끝났습니다.”

카드란이 준비한 것은 시계였다. 유이시엘은 그 시계에 성력을 깃들여 주인을 보호하도록 만들었다.

“물건에 모두 다 성력이 깃들게 했습니다.”

200개를 벌써 다 했다는 말이었다.

“작년에는 몇 개를 했지?”

“몇 개 안 했습니다.”

“그대는 절대로 화를 내지 않는군.”

카드란의 건조한 말에 유이시엘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카드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그대가 감정을 터뜨리는 일은 영영 없을 거 같아.”

그는 손짓을 하며 나가 보라고 했다. 그의 날카로운 말에 유이시엘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카드란은 시계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유이시엘에게 집착하는지, 그 스스로도 이유를 알고 싶었다.

* * *

유이시엘은 그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오늘도 자신의 무심함을 지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던 유이시엘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찌 됐든 그는 류크를 괴롭히는 게 목적이다. 그러니 신경 쓰지 않는 게 좋았다.

이번에도 그는 제게 물건을 많이 맡겨서 자신의 생명력을 깎으려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 되었고. 그러니 그도 만족할 것이었다.

황비 궁으로 돌아가던 그녀는 정원에서 낯선 남자를 발견했다. 자신이 늘 서 있던 자리에 있었기에 저절로 눈에 들어왔다.

긴 은발을 단정히 묶은 남자의 눈동자는 검은색이었다. 잘난 남자였기에 시녀들이 힐끗힐끗 그를 보고 지나갔다. 카드란의 외모에 익숙해진 유이시엘에게는 감흥이 없었지만 말이다.

유이시엘은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정원에서 시간을 조금 보내고 싶었는데.

저 사람이 먼저 와 있었으니 나중에 와야 할 듯하여 지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남자가 유이시엘에게 다가왔다.

“정말로 아름다운 아가씨군. 나는 레트로엔 왕국의 국왕 이셀진이다. 이렇게 내 이상형에 맞는 영애는 처음 뵙는군. 이름을 알 수 있을까?”

그러자 유이시엘 뒤에 서 있던 소엘이 나섰다.

“이분은 영애의 신분이 아니십니다. 황비마마십니다.”

그러자 이셀진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큰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유이시엘은 소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제가 주제넘게 나섰습니다.”

“아니에요.”

유이시엘은 싱긋 웃었다.

“고마워요.”

소엘이 나서 준 덕분에 그와 오래 말을 나누지 않아도 되었다. 유이시엘은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이 불편했다. 성녀가 되어서도 자신을 탐하고 싶어 하는 남자들을 피하느라 힘들었다.

어찌 됐든, 이셀진이 떠났으니 정원에 있을 수 있었다. 유이시엘은 카드란과 어린 시절 함께 가꾸었던 꽃들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축제가 지나면 겨울이 다가온다.

이번 가을이 생애 마지막 가을일지 모르기에 유이시엘은 눈앞의 경치를 최대한 마음에 담으려고 했다.

* * *

처소로 돌아온 이셀진은 신하들에게 소리쳤다.

“초상화로 봤던 그 얼굴이 아니잖아!”

유이시엘이 워낙 아름답다 보니, 그녀를 본 이들이 그린 그림들이 알음알음 팔려 나가고 있었다. 덕분에 유이시엘의 초상화는 각 국의 국왕들도 하나씩은 가지고 있었다.

이셀진 역시 그 초상화를 호기심에 구입했다.

그런데 초상화는 실제의 아름다움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직접 유이시엘을 보았을 때의 모습이 선연하게 남아 눈에서 떠나지 않았다.

“저런 분이 성녀라니.”

그는 혀를 찼다. 록센나 제국의 황제가 먼저 차지해서 황비로 두었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그런데 폐하와 성녀님의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던데.”

이셀진은 황제가 황비를 홀대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거야 성녀님은 로이체란의 가문이지 않습니까?”

수하 아녹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녹의 말대로 황제는 로이체란 가문을 증오했다.

“그래도 저토록 아름다운데!”

이셀진은 아름다운 여자를 데려와 안는 것을 즐겼다. 외모뿐만 아니라 유이시엘의 차분한 분위기도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정말로 안고 싶군. 내 나라에 있는 여자였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차지했을 거야.”

“은밀히 접근해 보는 건 어떨까요? 황제에게 홀대당하고 있다 하니 흔들릴지 모릅니다.”

아녹의 말에 이셀진은 버럭 소리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황제의 여자다.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 돼.”

하지만 황제가 직접 허락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아스란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황제에게 은밀히 황비와 잘 수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 * *

다음 날이 되었다. 유이시엘은 축제의 분위기도 즐기지 않고 바로 돔으로 향할 채비를 했다. 그곳에서 축복을 비는 행사를 진행해야 했다.

처음에는 악단들이 나와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하는 등 공연을 하다가 마지막에 성녀가 나와서 초대된 이들에게 축복을 내리는 것이 순서였다. 그녀의 차례는 마지막이었지만 행사를 총괄해야 했기에 미리 가서 문제점이 없나 살펴야 했다.

그녀는 카드란이 오늘 입으라고 보내 준 드레스 상자를 열었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드레스였기에 속으로 조금 놀랐다.

옷을 갈아입는 것은 샤렐이 도와주었다. 그녀는 손길이 어설펐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기에 유이시엘은 말없이 그녀를 곁에 두었다.

화장은 스스로 하고서 마차에 올라탔다. 목적지에 도착하고부터는 소엘의 호위를 받으며 돔으로 들어갔다. 공연을 할 사람들이 이미 도착해 무대를 보고 있었다.

“별일 없나요?”

공연을 제대로 하기 위해 실력 좋은 이들을 섭외하는 것도 성녀가 하는 일이다. 그들은 유이시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친근하게 말했다.

“별일 없습니다, 성녀님. 그런데 드레스가 잘 어울리십니다.”

“오늘 축복을 비는 자리가 빛날 것 같아요.”

다들 입이 닳도록 드레스 칭찬을 했다. 유이시엘은 세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행사장에 불이 들어왔다.

카드란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유이시엘은 축복을 비는 행사를 시작했다.

* * *

카드란과 이셀진은 나란히 자리에 앉았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이셀진은 카드란의 눈치를 보다 운을 떼기 시작했다.

“저는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렇습니까?”

“그래서 여러 명의 후궁을 두고 있죠. 그런데 신하들이 탐을 내면 치하하는 의미로 가끔 내려 주기도 합니다.”

그 말에 카드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순간 무대에 불이 켜지며 유이시엘이 등장했다.

청색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움직이고, 파란 눈동자가 신비롭게 빛났다.

푸르스름한 기운을 담은 하얀 빛줄기가 모였다. 그녀의 주변으로 모여든 빛줄기는 이내 사람들에게로 퍼졌다.

시간이 천천히 지나갔다.

마치 그녀를 향해 축복이 모인 것 같았다.

“정말로 아름답군요.”

그러자 카드란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이셀진이 조금 전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소엘이 그가 유이시엘을 만났다고 전하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욕심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아름답죠.”

그는 이어 이셀진을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저리 아름다운 부인을 신하에게 내려 주다니, 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군요.”

카드란은 그렇게 말하고 선을 그었다.

이셀진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은 아니니 분명 말뜻을 알아차렸을 것이었다.

유이시엘을 탐내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 * *

축복을 비는 행사의 물결은 수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은 오늘 축복을 받아 내년을 활기차게 살기를 기원했다.

시끌벅적한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세안은 말없이 마차를 타고 어디로 향했다.

유이시엘이 말한 것을 힌트 삼아, 그 집에 살았던 이들 중 나이 든 사람을 집중적으로 뒤졌다.

기록된 서류를 통해서 그 집에 살았던 여자 중 나이대가 맞는 이들로 명단을 추려 그들을 직접 뒷조사했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그들 모두 그 집에 남자애가 살았던 것은 기억했다.

그런데 그 남자애가 카드란인 것은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누군가가 카드란의 어린 시절의 흔적을 모두 다 지우려고 한 듯했다.

세안은 자신이 이상한 일에 연루된 게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정말로 찝찝해.”

“저도 그렇습니다.”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그렇게 대꾸한 남자는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단정히 생긴 이 남자의 이름은 칠론, 세안의 비서였다.

“왜 다들 기억을 하지 못할까요?”

“그걸 알았으면 내가 이러고 안 살지!”

그녀의 말이 맞다. 칠론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다 왔네요.”

그들이 추린 명단 중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이 여기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얼른 마차에서 내렸다.

허름한 집에서 사는 이 여자 역시 카드란이 어린 시절 살았던 집에 살았다고 한다. 근데 특이하게 그녀는 미혼모였다.

그녀에게 딸이 하나 있었다고 하는데 그 딸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적혀 있던 이름에 불이 난 흔적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숨기려고 하듯이 말이다.

세안은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그러자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황궁에서 왔습니다.”

그러자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나왔다. 백발을 곱게 틀어 올린 여인은 어딘가 모르게 날카로운 인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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