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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38/97)

38화

7. 자각

늦가을, 수확의 기쁨을 만끽할 때면 록센나 제국에서는 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는 수도에서 여는 축제였기에 각 국에서 사절단을 보내 축하를 해 주고 축제를 즐겼다. 이따금 국왕이 직접 오기도 했다.

그 축제에는 성녀가 축복을 비는 행사가 있었는데, 그 행사를 의논하기 위해 유이시엘은 황제의 집무실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세안이 들어왔다.

“약속도 없이 찾아와서 미안해요.”

세안은 그녀를 보고 싱긋 웃었다. 그녀의 미소에 유이시엘은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차를 타 올까요?”

유이시엘의 말에 세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그냥 제가 당분간 황궁에 없을 거라는 것만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세안이 황궁에 없는 건 특별한 일이다. 유이시엘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게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나중에 저를 찾아와요.”

세안이 윙크를 하며 웃었다. 유이시엘은 세안의 이런 태도에 당황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세안은 유이시엘을 보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세안이 카드란과 손을 잡고 자신을 괴롭히는 일을 그만두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그래도 세안의 마음이 고마웠다.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이런 태도에 한숨을 내쉬던 세안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실 저는 폐하의 정부가 아니에요.”

그 말에 유이시엘은 적잖이 놀랐다.

정부가 아니었다고?

“폐하께서는 단 한 번도 저에게 다가온 적이 없죠. 손도 잡아 본 적 없어요. 그럴싸한 쇼를 보여 주는 정부일 뿐이죠. 저도 약점을 잡혀서 동참했던 것이고.”

세안은 유이시엘의 표정을 관찰했다. 유이시엘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만졌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스스로 알 수가 없었다.

“울 것 같은 표정이네요.”

그런가? 자신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던 걸까.

마음이 이상했다. 그가 다른 여자를 안고 살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튼, 요즘 마음에 두는 여자가 있나 봐요. 그 냉혈한이 말이에요.”

세안은 쌓인 게 많은 듯 카드란의 험담을 조금 했다. 그리고 한숨을 내쉬며 유이시엘에게 투덜거렸다.

“집 주소를 하나 알려 주더니, 사람을 찾아오래요.”

과거의 자신을 찾는 모양이다. 세안의 정체가 무엇이기에 카드란이 이런 일을 시키는 걸까.

“아무튼 그러니까, 저를 미워하지 말아요.”

세안의 말에 유이시엘은 곧바로 말해 주었다.

“미워하지 않아요.”

“아우, 이제 속이 다 시원하네! 그럼 다녀올게요. 그런데 폐하께서 찾으시는 소녀가 죽었다고 하던데, 정말인가요?”

유이시엘은 잠시 고민했다.

카드란이 어린 시절의 자신을 기억하려는 것은 의외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소녀가 자신이란 것을 그가 알아서는 안 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살아 있을지도 몰라요.”

차라리 이렇게 알려 주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카드란에게 진실을 알려 줄 수는 없으니, 이렇게라도 어린 유이시엘의 소식을 전하려고 한 것이다. 그가 과거를 찾는 걸 그만두게 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말은 해 줄 수 있었다. 어차피 어머니는 제가 죽었다고 알고 있을 것이고, 얼굴도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세안은 살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세안이 떠나고 혼자 남은 유이시엘은 말없이 손을 바라보았다.

카드란이 어린 시절의 자신을 찾고 있고, 지금까지도 집착하고 있으며 정부도 가짜였다고 한다.

‘그는 그럼…….’

어린 시절의 자신을 여전히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일까.

기억을 잃었을 텐데.

그런데 기억의 흔적이 남았나 보다.

“어리석은 사람.”

고작 추억일 뿐인데. 이제 그곳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도 과거에 매달려 소녀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녀는 자신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녀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였다.

진실을 온전히 숨기기로 했다면, 그렇게 일을 진행해야 했다.

거짓말도 때로는 선의를 갖기도 하는 법이었다.

* * *

문을 열고 들어온 유이시엘은 카드란에게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집무실에는 슈렌과 누엘이 있었다. 그들은 서로 서류를 보며 이번 축제에 대해 의논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왔군.”

카드란이 자신을 바라보았다. 유이시엘은 말없이 카드란이 손짓한 의자에 앉았다. 유이시엘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움직였다.

“이번에 중요한 손님이 온다. 레트로엔 왕국의 국왕이 직접 와서 짐을 만나고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 계약을 하고 싶다고 하더군.”

록센나 제국은 가장 뛰어난 다이아몬드 채굴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다양한 나라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하면 록센나 제국에 기술자를 보내 달라고 요청하고는 했다.

그런 와중에 레트로엔 왕국에서 엄청난 규모의 다이아몬드 광산을 발견했다고 한다. 록센나 제국과 일하고 싶지만 일단은 기술자를 직접 만나 보고 싶다고 레트로엔 국왕이 직접 서신을 보냈다.

“제가 할 일이 있나요?”

유이시엘의 말에 카드란이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력이 깃든 물건을 여러 개 만들어라. 강한 성력이 들어가야 해. 나중에 물건을 보내 주도록 하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손님이 오면 성력이 깃든 물건을 종종 주었기에 유이시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번 축복을 비는 행사에 배정된 예산안이다. 그대가 짜 온 것에서 조금 늘렸다.”

“그렇군요.”

이번에도 그가 함정을 파 놓았을까?

유이시엘은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신경을 끄고 예산안만 바라보았다. 카드란의 정갈한 글씨체로 정리된 예산안이었다.

“이대로 준비하겠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유이시엘이 일어나려고 하는데 슈렌과 누엘이 먼저 후다닥 나갔다.

그러자 집무실에는 카드란과 유이시엘 단둘만이 남았다.

“기다려.”

그의 말에 유이시엘은 긴장했다.

세안이 했던 말이 떠올라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그는 조금 뒤에 상자 하나를 주었다.

“축복을 비는 행사 때는 이것을 입어라.”

“이게 무엇인가요?”

“세안이 전해 달라고 하더군.”

카드란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썩 내키지 않지만, 그녀가 부탁했으니 어쩔 수 없지.”

카드란은 그렇게 말하고 유이시엘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머리를 틀어 올리지 않았군.”

그가 풀어 헤친 유이시엘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가도록 해.”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카드란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유이시엘은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방을 나갔다.

풀어 헤친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던 그녀는 황비 궁으로 들어와 머리카락을 묶었다. 머리를 틀어 올리니 목이 드러났다.

〈유이시엘은 목이 예뻐.〉

머리카락을 묶어 목을 보이면 그가 종종 목에 키스하던 게 떠오른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한 거지?”

언제부터 자신의 머리 모양을 보고 있던 것일까.

그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어떤 차림을 하는지까지 지켜보고 있는 줄은 몰랐다.

뭐……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지만.

“유엘은 죽은 사람이 되어야 해.”

유이시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 * *

유이시엘이 떠나고 카드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드레스, 이거 성녀님께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세안이 드레스를 보이면서 말했다.

하안 색에 허리가 조이고, 치맛단이 펴지지 않는 드레스였다. 날씬해 보이는 이 드레스의 색감에 유이시엘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카드란은 말없이 이 드레스를 입은 유이시엘을 상상했다.

〈제가 이 일을 맡는 대신 이것을 선물해 주세요.〉

〈누구에게?〉

〈성녀님께요. 잘 어울릴 것 같죠?〉

세안은 생긋 웃으며 카드란의 마음을 고스란히 읽은 듯 그렇게 말하고 떠났다.

“곤란하군.”

이번에도 함정을 파야 하는데.

이번에는 모든 사람의 선물을 준비하라고 시킬 생각이었다.

처음에 류크에 대한 복수심으로 미친 짓을 하기로 결심했을 때는 독하게 마음을 먹었었다.

유이시엘의 목숨을 없애는 게 류크의 심장을 찌르는 것 같아서 시작했는데…….

그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도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 유이시엘.”

그는 유이시엘의 이름을 읊조리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작전대로 그녀가 이 일을 해서 생명력이 깎인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며칠 뒤, 그는 직접 유이시엘에게 보낼 물건을 확인했다.

원래대로라면 100명의 사람에게 선물을 할 생각이었는데, 그는 말없이 그 개수를 늘였다.

그리고 그것을 레카린이 보고 있었다.

“폐하, 도대체…….”

“그냥…… 좀 더 필요해서 말이다.”

늘리고 나니 200개가 되었다.

“유이시엘을 죽여야 해.”

그는 스스로에게 말하고 물건을 유이시엘에게 보냈다.

* * *

레트로엔 왕국의 국왕 이셀진은 체격이 무척이나 좋은 남자였다. 카드란과 어깨 넓이와 키가 비슷했다. 이셀진은 카드란을 보고 고개를 숙였고, 카드란은 그의 인사를 받아들였다.

알현실에서 서로를 마주한 그들은 곧 정원을 걸었다.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자들이 얼마나 뛰어날지 기대 중입니다.”

레트로엔 왕국은 록센나 제국에 인접한 국가였다. 이전까진 빈말로도 부유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셀진이 즉위하면서 자원 개발에 들어가 나라의 경제가 점점 살아나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카드란 역시 레트로엔을 주목하고 있었다.

“제국의 기술자는 세계 최고입니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래고 그대의 땅에서 얼마나 귀한 보석이 나올지 기대 중이죠.”

카드란의 말에 이셀진은 흔쾌히 웃었다.

싱그러운 바람이 불었다.

그들은 그렇게 정원을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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