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 *
카드란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정말로 귀찮은 일은 도맡아 시키시네요.”
세안은 투덜거렸다. 카드란은 그런 그녀를 보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창문만 보았다.
세안이 드레스 일로 나선 것을 좀 더 이용하기로 했다.
총애하는 정부가 직접 나서서 황비를 챙긴다면 황제도 마지못해 들어줘야 한다. 그렇다면 자신이 먼저 제안한 것이 탄로 나지 않을 것이었다.
“그대가 먼저 시작한 거다. 그리고 딱히 거절할 생각도 없지 않았나?”
카드란의 말에 세안이 입술을 다물었다. 굳게 다문 입술이 그녀의 생각을 말해 주었다.
“사람의 마음을 너무 쉽게 읽으시네요.”
“그대가 단순한 거다.”
하지만 아무리 카드란이라 해도 유이시엘의 마음은 읽을 수가 없었다.
“이거 누군가가 알아차릴지도 몰라요.”
세안이 그를 도발했다.
“그대만 입조심하면 된다. 행동 조심해.”
카드란은 그녀에게 경고했다. 건조하게 말한 그를 바라보던 세안이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찼다.
“와, 진짜!”
세안은 뒤통수를 손으로 꾹 눌렀다.
“정말로 뻔뻔하세요.”
세안이 노려봤지만 카드란은 창문만 바라볼 뿐이었다.
* * *
무도회장에 들어간 이들은 모두 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드란이 유이시엘과 함께 연회장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물론 카드란은 세안과 더 가까이 있었지만 유이시엘과 함께 연회장에 온 일은 정말로 놀라웠다.
카드란은 그 뒤로 세안과 먼저 춤을 추었다. 유이시엘은 당연히 그가 자신하고 춤을 추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구석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세안과 춤이 끝난 카드란이 유이시엘에게 걸어왔다.
“어딜 가는 거지?”
“저기로 가려고 했어요.”
“춤은 춰야 하지 않나?”
“그건 그렇지만.”
원래 황비 따위 바라보지도 않던 그가 아닌가.
어찌 되었든 그가 춤을 신청했기에 거절할 수는 없었다. 유이시엘은 춤을 추었다. 잔잔하게 밀려오는 음악에 맞춰서 유이시엘은 자신의 손을 잡은 그를 응시했다.
그와 맞잡은 손이 뜨거웠다.
“무슨 일을 꾸미시나요?”
유이시엘의 말에 카드란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세안이 부탁해서 말이야.”
세안의 덕분인가?
“소엘을 반드시 데리고 다니라고.”
“그러고 있어요.”
“그대를 항상 주시하고 있어.”
그는 언제나 잊지 말라는 듯 이 말을 하곤 했다.
유이시엘은 그를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 시절 기억을 하나도 못 하면서 자신에게 집착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그의 마음은 베일에 싸여 짐작할 수 없었다.
* * *
춤이 끝나고 카드란은 말없이 유이시엘이 벽으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움직이자 소엘이 귀신같이 뒤를 따랐다. 카드란이 소엘에게도 따로 말해 둔 게 있었기에 절대로 유이시엘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유이시엘이 자신의 손을 떠나 있는 게 싫었다.
수하들은 믿기 어렵다. 기첼처럼 어긋난 충성심을 가지고 있는 놈이 또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직접 데리고 오고 이렇게 춤까지 추었다. 유이시엘을 자신이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수하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였다.
유이시엘이 사라지면 곤란하니까.
그는 일단 세안 옆으로 돌아갔다. 세안은 다른 이들과 같이 이야기를 하다가 카드란이 다가오자 얼른 웃으며 팔짱을 꼈다. 세안과 팔짱을 끼는 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지만, 카드란은 꾹 참았다.
“폐하, 정말로 좋은 곳이에요.”
세안의 눈가가 미미하게 떨렸다. 그는 얼른 그녀의 눈가에 손을 얹고 다정하게 말했다. 보는 사람이 많았다. 표정이 흐트러지면 안 되었다.
“그렇군.”
표정 관리 잘하라는 의미를 담아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세안의 입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카드란은 적당히 무시한 후 세안을 데리고 귀족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때 유이시엘이 소엘을 데리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카드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도 말없이 세안을 두고 따라 움직였다.
* * *
유이시엘은 카드란과 세안이 다정하게 있는 것을 바라보다 얼른 소엘을 데리고 정원으로 나왔다. 카드란이 안 하던 짓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이 시선이 더 그녀에게 몰렸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나오자마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꽃을 찾았다.
늘 예쁘게 피어 있는 식물은 말이 없다.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지도 않고 고요했다. 그래서 그녀는 식물이 많은 정원이 좋았다.
나중에 카드란에게 자신의 생일이 그와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카드란은 섭섭한 듯 눈동자를 크게 뜨고 자신에게 말했다.
〈왜 생일을 말해 주지 않은 거야? 내 생일만 축하했잖아!〉
〈말할 기회가 없었어.〉
〈아! 지금이라도 축하해야지!〉
그 말을 들은 그는 그길로 꽃가게에 가서 꽃을 사 왔다. 자신이 좋아하는 꽃들로 가득 채운 꽃다발은 정말로 잊을 수 없었다.
이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기에 더욱더 소중한 나날들이었다.
유이시엘은 꽃향기를 맡으며 잠시 미소를 지었다.
그때의 그 꽃들이 정원에 피어 있었다.
자신을 반기는 듯 그렇게 방긋방긋 웃는 꽃들을 바라보며 유이시엘은 손으로 꽃을 만졌다.
어린 카드란은 자상하고 귀여웠다.
지금의 카드란은 기억을 잃고 너무나도 잔인했다.
그것이 너무나도 슬펐다.
그냥, 눈물이 나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쓰라릴 정도로 아팠다.
* * *
그날은 유이시엘의 15살 생일이었다. 하지만 유이시엘은 카드란의 생일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그를 위해 작은 케이크를 만들었다. 카드란은 단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크림을 적당히 넣고 달지 않게 만들었다.
다 만든 생크림 케이크를 들고 작은 공원으로 향했다. 오늘 생일 파티를 꼭 공원에서 하겠다고 한 카드란의 행동이 조금 수상하기는 했지만, 별생각 없이 케이크를 들고 공원으로 향했다.
하늘에 별이 떠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생일이 평일이었기에 카드란과 자신 둘 다 일을 마치고 만났다. 저녁 무렵 사람들이 조금 있는 공원에 도착한 유이시엘은 주변을 잠시 걸었다.
록센나 제국은 15살이 되면 일을 할 수 있다. 유이시엘은 허름한 가게에서 서빙 일을 했다. 돈을 그리 많이 받는 것은 아니었지만, 차곡차곡 모아서 카드란과 함께할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아가씨, 혹시 시간 있으신가요?”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 15살이 되고, 유이시엘은 성인에 가까운 외모가 되었다. 그렇다 보니 그녀에게 데이트를 신청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시간 안 되어요.”
유이시엘은 칼같이 거절한 후 케이크를 들고 걸었다.
가면서 몇 명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카드란과 같이 있으면 이런 일이 없는데……. 굉장히 귀찮고 불편했다.
유이시엘은 공원의 가운데에 있는 분수대에 도착했다. 전쟁 영웅 아나스가 검을 들고 있는 조각상에서 물이 뿜어져 나왔다.
곧이어 카드란이 왔다. 헐레벌떡 달려온 그는 유이시엘이 먼저 온 것을 보고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
“아니야, 나도 방금 왔어.”
“와, 먼저 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사장님이 잡으셔서.”
카드란은 큰 회계 사무실에 취업했다. 숫자를 보고 문서를 읽는 능력이 남달랐기에 그렇게 된 것이었다.
유이시엘은 카드란의 아버지를 한 번 뵌 적이 있었다. 부유한 분이신 것 같았는데, 카드란은 그의 지원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난 사생아야. 그래서 딱히 지원해 달라고 할 생각이 없어. 진짜 가족이 아니잖아.〉
그가 스쳐 지나가듯 말해 준 게 기억이 났다.
유이시엘은 그를 응시했다. 찰랑이는 금발이 어둠 속에서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을 고수하기에 그의 이미지는 언제나 단정하고 차분했다. 하지만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향할 때면 반짝반짝 예쁘게 빛이 났다. 다른 여자에게는 무심하고 차가우면서 자신에게는 달랐다.
“그런데 유이시엘, 그것들은 뭐야?”
카드란은 유이시엘 옆에 있는 명함들을 보았다.
“아 아까, 데이트 신청 거절했는데 나중에 오라고 준 거라서.”
“그걸 받았어?”
“안 받아 주면 안 떨어질 것 같아서.”
“아! 진짜!”
카드란은 씩씩거리더니 명함을 보았다. 명함을 읽은 그는 얼른 그것들을 자신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래서 혼자 보내면 불안하다고.”
카드란은 투덜거리다 유이시엘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떻게 나날이…… 정말이지.”
카드란은 한숨을 내쉬고는 유이시엘의 옆에 앉았다.
“카드란 생일 축하해.”
유이시엘이 먼저 케이크가 든 상자를 주었다. 카드란은 상자를 꼭 끌어안았다.
“나 혼자만 먹을 거야.”
“응.”
“나도 선물 챙겨 왔지.”
그는 웃으면서 유이시엘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유이시엘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상자를 열었다.
“이건?”
거기에는 하늘색 펜던트가 박힌 목걸이가 있었다. 유이시엘의 눈동자와 똑같은 색이었기에 그녀는 당황해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마음에 들어?”
“응.”
유이시엘은 감동했다.
이것을 사기 위해 카드란이 얼마나 노력했을까.
“목에 걸어 줄게.”
카드란은 목걸이를 그녀의 목에 걸어 주었다. 그런데 그가 목뒤에 슬쩍 입을 맞추었다.
“유이시엘은 너무 예뻐.”
“카드란.”
그가 입을 맞춘 부분이 뜨거웠다.
“유엘이 예쁜 건 나만 알고 싶어.”
그리고 그가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사람들이 보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잠시 멈춰 카드란이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성년이 되어서 유엘의 남편이 되고 싶어.”
그는 나직이 말했다.
이전에도 카드란이 신부가 되어 달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어딘가 진중하고 진지한 느낌.
유이시엘은 몸을 돌려 카드란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감정이 넘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