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97)

33화

“하셔야 해요.”

유이시엘의 말에 성물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싫어, 안 나타날 거야.”

“황제로서 마음에 드시잖아요.”

유이시엘이 토라진 성물을 달랬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성물은 황제를 위했다. 그러니 나중에는 말을 바꿀 것이었다.

“그렇지만, 유이시엘이 마음이 걸리는걸.”

성물은 유이시엘을 보며 머뭇거렸다.

그녀가 너무나도 아파서, 그에게 나타나기를 주저하는 것 같았다.

“저는 괜찮아요.”

유이시엘은 조용히 웃었다.

“유이시엘을 보면 너무 가슴이 아파.”

성물은 울먹이며 그녀에게 속삭였다. 작은 손으로 그녀의 뺨을 어루만지며 속삭이듯 말했다.

“죽기 전까지 최대한 아프지 않게 해 줄게.”

“고마워요.”

“그런데 황제의 생일은 유이시엘의 생일이기도 하잖아.”

성물의 말에 유이시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카드란과 자신은 생일이 공교롭게도 똑같았다.

유이시엘이 성녀가 되고, 류크가 멋대로 그녀의 생일을 지어내서 말하는 바람에 그녀의 생일이 봄이 되었다.

“류크 그 자식이 문제야.”

성물은 투덜거렸다.

류크가 자신의 생일에 유이시엘을 데리고 있기 위해 유이시엘의 생일을 자신과 같다고 거짓말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생일은 봄이 되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지에렌과 성물뿐이다. 류크는 사실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진짜 생일이 언제인지는 몰랐다.

지에렌 오라버니가 이날에 항상 선물을 챙겨 주었는데.

이번 생일에는 오라버니가 깨어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 * *

슈렌과 카드란은 의자에 앉아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번 탄신일은 성대하게 열 수 없다니, 아쉽군요.”

“예산이 그 정도로 풍족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카드란의 말에 슈렌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의 생일을 맞이해서 사절단을 보냈고 대대적인 연회가 열리지만, 쓸 수 있는 비용은 로윤 생일날의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그동안 여기저기에서 나가는 비용을 줄이고 줄여 겨우 구색 갖추기는 할 수 있었다.

카드란이 옷에 별다른 욕심이 없다 보니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선황제 폐하께서 워낙에 값비싼 옷을 입으셔서, 거기에 있던 보석만 팔아도 이렇게 생일 연회를 할 수 있군요.”

슈렌의 말에 카드란은 웃음을 지었다. 로윤이 입던 옷에 달린 보석을 팔았더니 그 돈으로 연회도 열 수 있었다. 그만큼 사치를 했던 놈이었다.

물론 황제가 꼬질꼬질한 차림으로 있으면 안 되지만, 그는 지나치게 화려한 것을 좋아해 제국이 휘청일 정도로 돈을 많이 썼다.

카드란은 그것을 상기하며 다음에 정리할 안건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세안 아리넬 님께서 오셨습니다.”

되도록 정무 중에는 찾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그냥 얌전히 있을 아가씨는 아니었기에 만나는 것을 망설였다. 혼자였다면 그냥 나중에 오라고 돌려보냈을 테지만, 지금은 슈렌이 있기에 총애하는 정부를 그냥 돌려보낼 수 없었다.

“들어오라고 해라.”

이런 상황을 노린 것인지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 시간에 온 것일까.

문이 열리고 화려하게 차려입은 세안이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오자 슈렌이 나가려고 했다.

“잠시만 있을 거예요.”

세안이 얼른 슈렌에게 말하며 카드란에게 다가가 치맛단을 들고 인사했다. 그녀가 입가에 달콤한 미소를 살짝 걸고 카드란을 향해 눈을 사르르 접었다. 그녀는 최대한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곧 있으면 폐하의 생신이시잖아요. 그날 연회에 참석할 드레스를 고르라고 책자를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청을 드려도 될까요?”

세안의 말에 카드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황비마마의 드레스도 제가 고르고 싶어서요. 저와 너무 차이가 나면 황비마마께서 기분이 언짢으실 테니, 그런 일은 없었으면 해요.”

카드란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슈렌이 있는 때를 온 이유를 알았다.

드레스를 고르게 했다고? 그렇긴 하지만 그녀가 입을 드레스는 정해져 있다. 그런데 그것을 깨고 유이시엘이 입을 드레스마저 자신이 고른다고 한다.

세안은 유이시엘을 동정했다.

그런 그녀가 유이시엘을 난처하게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카드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세안이 황비의 일을 걱정할 줄은 몰랐군.”

나서지 말라고 돌려 말했지만 세안은 멈추지 않았다.

“신경이 너무 쓰여서요.”

“짐이 그것은 차마 고려하지 못했군.”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신은 아직 하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세안이 훅 치고 들어왔다. 결국 카드란은 세안의 말을 들어줘야 했다.

목적을 달성한 세안이 문을 닫고 나갔다.

“정말로 생각이 깊은 아가씨군요.”

“그렇지.”

생각이 깊기는. 저번 일을 복수하기 위해 나선 게 분명했다.

그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뭐, 이제 드레스 따위로 유이시엘을 괴롭히는 건 효과가 없다는 걸 알았다.

이번 기회에 겸사겸사 그만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짐이 총애하는 거겠지.”

카드란은 그렇게 말하고 서류 정리를 마저 했다.

* * *

어린 유이시엘의 손을 어린 카드란이 꼭 잡았다.

이날은 햇빛이 반짝이지만 가을의 끝이었기에 바람이 많이 서늘했다.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세대가 모여 사는 공동 주택 앞으로 카드란이 어린 유이시엘을 끌고 왔다. 그가 데려간 곳에는 케이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유이시엘, 내 생일은 특별한 날이니까 나랑만 있어 달라고 했지? 다른 친구들하고는 놀지 말라고 했잖아.〉

〈응, 특별히 그렇게 해 준다고 했어.〉

〈오늘이 그날이야.〉

카드란은 그렇게 말하고 케이크를 잘라 유이시엘게 주었다.

〈케이크 맛있게 먹어야지. 유이시엘이 케이크 먹고 싶다고 했잖아.〉

〈란의 생일인데 란이 먼저 먹어야지.〉

〈나는 유엘이 먹는 거 보는 게 좋은걸.〉

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잔잔히 밀려오는 행복에 그만 케이크를 먼저 먹었다. 목이 메어 음료수를 살짝 마셨던 것 같기도 했다.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는 꿈이었기에 깼을 때는 허무함만이 남았다.

눈을 뜬 현재의 유이시엘은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입고 천천히 주전자로 걸어갔다. 그리고 물을 마시며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카드란은 생일만 되면 자신이 다른 아이들과 놀지 말아 달라고 했다.

사실 다른 친구가 없었지만 바쁜 척한 건데.

그가 다른 친구들하고 노는 게 싫어서, 자신도 그렇게 자존심 세우면서 한 일인데.

그런데 카드란이 생일날 자신하고만 놀아 달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묘한 충족감이 들었는데.

“정말이지.”

그때 우리가 이런 운명을 상상할 수나 있었을까.

그녀의 입가에 물이 젖었다. 젖은 물은 손수건으로 닦던 그녀는 카드란이 어제 보낸 드레스를 보러 갔다. 어제 그냥 마음이 허해서 상자를 열어 보지 않았는데, 세안이 직접 자신의 드레스를 골랐다고 해서 더욱더 마음이 그랬다.

세안,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드레스를 고른다고 말한 걸까.

상자를 여니 생각보다 아름다운 드레스가 있었다. 가을에 잘 어울리는 은은한 갈색으로 된 드레스였다.

‘나하고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왜 이것을 골랐을까.’

사실 세안이나 카드란이 고른 드레스가 안 어울린 적은 없었다. 유이시엘은 드레스를 들고 드레스 룸에 걸어 두었다.

이것들을 팔아서 예산으로 쓰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자신이 죽고 나면 그러지 않을까?

그녀는 숨을 몰아쉬었다.

성물이 도와준 덕분에 피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기침이 한동안 멈추지 않았다.

살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

아쉬운 것은 없다. 카드란의 곁에 있는 것도 고통뿐이기에 이제 안식이 다가오는 것이 어찌 보면 반가운 일일지도 몰랐다.

* * *

연회는 저녁 무렵에 열렸다. 유이시엘은 이번에도 자신 혼자 들어가지 않을까 싶어서 준비를 끝내 놓고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이것만 정리하고 미리 가서 연회장을 지키고 있다가 카드란과 세안이 들어오면 바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문이 열리고 소엘이 들어왔다.

“무슨 일인가요?”

유이시엘의 말에 소엘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폐하께서요……?”

그가 자신을 챙길 리가 없는데. 누군가가 부탁을 했거나 속셈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러자 궁 앞에서 카드란이 세안과 같이 서 있었다.

“오늘도 아름다우세요.”

세안은 싱긋 웃으며 카드란의 손을 놓고 유이시엘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오늘 세안의 드레스가 이상했다. 평소의 화려하고 신경 쓴 느낌의 차림이 아니라, 그냥 수수하고 조용한 차림이었다. 자신과 비슷한 느낌의 드레스였다. 아니, 자신의 것보다 덜 화려한 드레스였다.

정부와 황비의 위치를 나타내는 그런 드레스.

이런 건 이상했다.

왜 세안은 직접 나서서 일을 이렇게 꾸민 것일까.

카드란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자신을 훑어보았다.

그래, 그의 심기를 불편케 하는 일을 왜 세안이 하는 것일까.

“제가 같이 가자고 했어요.”

역시나, 카드란이 이렇게 행동할 리가 없다. 유이시엘은 세안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불편할 텐데, 동정하듯이 안타까운 시선을 보이더니 자신을 챙겼다.

동정을 받는 것일까.

카드란은 유이시엘과 같은 마차를 타지 않았다. 그는 세안과 같이 황제가 타는 마차에 올라탔고 자신은 황비가 타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마차가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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