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 * *
기첼은 감옥에 갇혔다. 굉장히 아끼는 수하를 감옥에 가둔 카드란은 겔릭 후작을 처벌했다. 성녀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만천하에 보여 주었다.
세안은 천천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성녀를 싫어한다고 하면서.”
세안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누구보다 손안에 넣고 싶어 하네.”
카드란은 스스로 이 모순점을 알고 있을까.
“흠.”
세안은 찻잔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이번 일로 카드란이 유이시엘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았을 것이었다.
과연 그의 복수는 어디로 흘러갈까.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은 두 사람을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6. 휴가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황제의 집무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들어오자 창문을 닫고 커튼으로 창문을 가렸다. 그리고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 램프에 불을 붙여 주변을 밝혔다.
노란 조명 아래 서 있는 유이시엘은 카드란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노려보는 카드란의 눈빛이 오늘따라 매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노란색 조명과 섞여 더욱더 차가워 보였다.
“회계 자료는 이게 다인가?”
“네, 맞아요.”
유이시엘의 대답을 들은 카드란이 생각에 잠겼다. 유이시엘은 혹시 보고서에 실수라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수할 부분이 전혀 없는데?
그녀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사이 카드란은 그녀가 건넨 서류철을 덮고 한쪽으로 치웠다.
“수고했다.”
그가 꼬투리 잡는 것을 포기한 것일까?
“소엘은 잠시 남아 있고, 황비는 잠시 밖에서 기다려라.”
소엘과 같이 움직이라는 뜻인 듯했다. 유이시엘은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문을 닫으며 마지막까지 소엘의 뒷모습을 보았다.
소엘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카드란을 따르는 이들 중에서 조금이나마 자신에게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 * *
카드란은 차가운 눈을 한 채로 소엘을 바라보며 물었다.
“보고서에 있는 것 말고는 구매한 게 없는가?”
카드란의 말에 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적인 물품은 거의 사지 않았습니다.”
“그렇군.”
카드란은 몇 개 더 확인하고 소엘을 돌려보냈다. 소엘마저 나가고 혼자 남은 카드란은 다시 한번 유이시엘이 준 서류를 보았다.
지난 몇 달간 유이시엘에게 이 서류를 받았다.
첫 달에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사적으로 구매한 물건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그래서 더 집요하게 그녀가 한 일을 뒤지며 믿지 않았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고 소엘을 그녀의 곁에 붙이면서 그녀가 정말로 사적인 물건을 하나도 구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성녀는 정해진 금액을 초과하지만 않으면 어떤 물건이든 구매해도 괜찮았다. 그런데도 유이시엘은 개인적인 물품을 전혀 구매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더 거슬리는 것은 자신이 즉위한 후로는 유이시엘이 사적인 물건을 하나도 구매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과거의 서류를 뒤져 보니 개인적으로 구매한 물건이 몇 개는 있었다. 그런데 그 이후로 구매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가 삶에 무심해졌다는 증거였다.
“그대의 마음이 살아 있어야, 복수가 완성된단 말이다.”
그는 한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무심한 유이시엘을 괴롭혀 봐야, 유이시엘은 류크를 싫어하지 않는다. 그에게 강한 증오를 품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지 않는가, 그저 건조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자신에게도, 류크에게도 감정이 없는 그녀를 보면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무너질 것 같았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카드란은 서류를 한쪽으로 치웠다.
더 이상 유이시엘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그게 쉽지 않았다.
“남자도, 비리도 없는 성녀.”
유이시엘은 류크 로이체란의 호의 속에 살았다.
그런데 올곧게, 너무나도 착하게 살았다.
그것이 카드란의 마음을 옥죄고 있었다.
“왜 그런 여자인 거냐.”
차라리 타락하고, 비리가 많은 성녀였으면 아무 거리낌 없이 대했을 텐데.
카드란은 한숨을 내쉬고 커피를 찾았다.
막 내린 커피를 컵에 담고 향을 맡았다.
하지만 진한 향이 그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지는 못했다.
* * *
유이시엘은 소엘과 함께 황비궁으로 돌아왔다.
“폐하께서는 그냥 보고서의 사실 여부만 확인하셨습니다.”
소엘이 옆에서 넌지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었다.
알려 주지 않아도 되는데.
유이시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정원에서 멈춰 섰다.
전에 카드란이 뭐라고 했지만 그녀는 꽃을 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노란 꽃에서 나오는 향긋한 꽃 내음이 그녀의 코로 들어왔다.
이제 가을이 끝나면 꽃이 지고 황량한 겨울이 찾아온다. 다시 계절이 바뀌면 자신은 좀 더 죽음에 가까워질 것이다.
유이시엘은 발걸음을 옮겼다. 여름에 아름답게 피었던 꽃들은 모두 다 시들어 흔적만 남았다. 유이시엘은 그것이 아쉬웠다.
“내년 여름에도 꽃이 필 겁니다.”
소엘이 옆에서 말했다.
“그럴 거예요.”
자신이 그 꽃을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유이시엘은 살며시 꽃을 바라보다 황비궁으로 돌아갔다.
* * *
기첼은 근신에서 풀리자마자 레카린을 찾아갔다. 올려다본 하늘은 너무나도 높았다. 가을이 절정인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근신에 들어간 것이 가을 초였는데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연무장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기사들의 기합 소리가 커졌다.
연무장에 들어가니 자카린이 기사들의 훈련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기첼이 천천히 걸어왔다. 인기척을 느낀 레카린이 얼른 몸을 돌려 기첼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어이, 오랜만이군.”
“그러게 말입니다, 형님.”
“잘 지낸 거 같지는 않구나.”
레카린은 이전보다 살이 빠진 기첼을 살피고 혀를 찼다. 기첼은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몸이 힘든 것보다 카드란이 자신을 다시는 보지 않을 미래를 상상하다 보니 더 마음이 쓰리고 괴로웠다.
“폐하께서는 노여움이 많이 풀리셨다.”
“정말로 그럴까요?”
카드란이 자신을 향해 검을 겨두던 장면이 생생한데. 기첼은 기운 없이 중얼거렸다.
“그럼, 아무리 화가 나셨다 해도 너를 친동생처럼 여기시는 분이 아니냐. 일단은 인사는 드려 봐.”
“알겠어요.”
“사죄도 드리고.”
“그래야죠.”
레카린에게 응원을 받은 기첼은 얌전히 대답하고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문이 너무나도 거대해 보였다. 자신을 당장이라도 쫓아낼 것 같은 기세였기에 숨이 꼴깍 넘어갔다.
“기첼 코렌 자작님 드십니다.”
드디어 운명의 순간이 왔다.
황제 폐하께서 그냥 물러나라고 하면 어떻게 할까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카드란과 만나는 순간이었다.
* * *
카드란은 집무실로 들어온 기첼을 보고 싱긋 웃었다. 고생도 많이 했는데 동생 같은 기첼에게 더 이상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기첼, 반성은 좀 했느냐.”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아니다, 하지만 실수는 한 번이면 족하다.”
이것은 경고였다. 기첼도 알아들은 듯 입술을 깨물며 대답했다.
“다시는 성녀님을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성녀의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한다.”
카드란은 그렇게 말하고 기첼에게 다가와 어깨를 다독였다. 눈물이라도 흐를 듯 기첼의 눈시울이 금방 붉어졌다. 자신의 말에 이렇게 반응을 하는 동생이다. 너무 몰아치고 싶지 않았다.
“성녀는 어차피 10년 안에는 죽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처리할 것이고.”
“그렇군요.”
“그러니 애쓰지 않아도 된다. 10년은 길 것 같지만 금방 가니까.”
사실…… 20년은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 이런 것들을 말해 버리면 또 기첼 같은 수하가 나올지 모르기에.
다들 로이체란 가문에 대한 반감이 심해서 유이시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카드란은 기첼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생각했다.
먼저 유이시엘의 주변에 수하들의 접근을 차단해야 할 것 같았다.
곧 있으면 자신의 생일이다.
지금까지 그는 유이시엘이 참석하더라도 혼자 보냈다. 세안하고만 같이 다녔다.
그런데 그것을 이제는 바꾸어야 할 것 같았다.
자신이 유이시엘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수하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다.
그녀를 챙기는 것은 원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복수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 * *
유이시엘은 말없이 정원에 서 있었다. 꽃을 바라보던 그녀는 무심하게 서 있다가 갑자기 숨을 몰아쉬었다.
“성녀님!”
뒤에 있던 소엘이 달려와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에요.”
잠시 피가 역류할 뻔한 것을 성물이 눌러 주었다.
주로 아침에만 역류하던 것이 지금은 예측할 수 없을 때 나타났다.
“들어가셔서 쉬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이고 방으로 돌아갔다. 푸른색 휘장이 쳐진 침대에 걸터앉아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생명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도 가끔 누르는 것을 놓쳐. 미안해.”
성물이 나타나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유이시엘은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다시 뭔가가 밀려왔다.
다행히 피가 나오지는 않았다.
“곧 있으면 란의 생일이네요.”
유이시엘의 말에 성물이 웃었다.
“그렇지.”
카드란의 생일은 가을이었다. 아마도 벌써부터 황제의 탄신일을 어떻게 할지 논의 중일 것이었다.
자신하고는 상관이 없지만.
“그날 성녀가 황제에게 축복을 걸어 주지. 그리고 아침에 성물의 현신이 나타나 덕담도 해 주고.”
다른 이들이 보지 않을 때 황제에게 나타나 이런저런 말을 해 주기도 했다. 성물의 현신이 황제에게 직접 축복을 걸어 줄 때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