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자신 이외에 다른 누군가가 그녀에게 접근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정보원을 모두 다 철수시켜. 만약 짐의 눈에 걸린다면!”
그는 재빨리 세안의 목을 노려보았다.
“그대의 목숨도 보장하지 못해.”
그의 말에 세안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자극하려다가 기름에 불을 붓는 격이 되고 말았다. 카드란은 세안이 얌전히 나오자 시선을 거두고 다시 서류 작업에 집중했다.
‘무서웠어.’
세안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어떤 짓을 했는지 전혀 자각하지 못한 채 일을 하는 그를 보며, 종종 이런 일을 당했을지 모르는 유이시엘을 떠올렸다.
그녀는 어떻게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까.
새삼 그녀가 불쌍하면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황가의 무덤에 도착한 마차가 멈추었다. 유이시엘은 치맛단을 들고 마차에서 내렸다. 앞의 마차에서는 카드란이 세안을 거의 안다시피 하며 내렸다.
이런 광경을 바라볼 때마다 마음이 아릿했지만 유이시엘은 무심한 표정으로 카드란에게 다가갔다.
“기도 준비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오늘따라 카드란이 조금 화가 나 보이는데…… 착각이겠지?
유이시엘은 카드란이 황가의 무덤 안으로 들어간 사이, 기도할 때 입을 옷을 들고 작은 건물로 들어갔다. 이 건물은 대대로 성녀들이 썼던 건물이었고 성녀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작은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유이시엘은 건물 밖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그녀를 기다리는 건 소엘 없이 기첼 혼자였다.
아아, 그래도 소엘이 있는 게 편한데.
소엘이 자신을 감시하는 역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따금 다정한 말도 걸어 주고 대하기도 편했다. 기첼처럼 자신을 너무나도 싫어하는 눈빛으로 보지도 않았다.
“다녀오셨습니까?”
기첼이 유이시엘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는…….”
그리고 갑자기 그가 손수건으로 유이시엘의 입을 막았다. 발버둥치는 그녀의 숨을 막아 버리겠다는 듯 코와 입을 빈틈없이 눌렀다.
손수건에 뭐라도 뿌렸는지 아득히 정신이 멀어졌다.
‘카드란…….’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폐하께서 당신을 죽이라고 하셔서 말입니다.”
기첼의 말을 들으니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결국 그는 이렇게 자신을 없애는 걸까?
하지만 이런 건 카드란답지 않은 일인데?
의문이 들었지만 그래도 삶의 끝이 다가온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평온함이 밀려왔다.
그렇게 생각하며 유이시엘은 정신을 완전히 잃었다.
* * *
무덤가에서 아버지의 무덤을 바라보던 카드란은 아래에 앉아 무덤의 비석을 살피는 세안을 끌어당겼다.
“돌아가도록 하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지만, 세안은 아쉬워하면서도 일어났다.
“평민에게는 이 무덤을 본다는 게 큰 의미가 있죠. 제 고객분들은 황가의 생활을 궁금해하시거든요. 그러니 조금만 더 있으면 안 될까요?”
세안의 애교 섞인 말에 카드란은 건조하게 대답했다.
“나가도록 하지.”
세안의 말을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그녀는 그저 유이시엘을 초라하게 만들기 위한 장기말에 불과했다. 그렇게 돌아서는 그를 세안이 슬쩍 노려보는 것 같았지만 카드란은 무시했다.
세안과 떨어져 걷던 그는 나가는 문에 다가서자 세안을 끌어안으려 했다.
“마음도 없으면서 이런 짓은 잘하네요.”
세안의 빈정거림에 카드란은 말이 없었다. 그저 들어올 때처럼 세안의 허리를 휘감았다. 겉으로 보이는 행동은 무척이나 뜨거운 연인 같지만, 눈동자는 냉랭하기 그지없다.
문을 열고 나온 카드란은 기첼과 소엘이 있는 것을 보았다.
유이시엘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카드란의 표정이 굳었다.
“황비는 어디 있지?”
카드란의 말에 기첼이 곤란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성녀님께서 도망치셨습니다.”
“…….”
카드란은 기첼을 바라보았다.
“소엘이 잠시 화장실 가야 해서 자리를 비우고 제가 입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방에서 빛이 났습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성녀님의 옷만 남아 있었습니다.”
유이시엘이 도망쳤다고.
도망이라…….
카드란의 눈동자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마지막에 건물 앞에 있던 게 누구라고?”
카드란의 말에 기첼이 말했다.
“접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정해져 있다. 카드란은 곧바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기첼에게 겨누었다. 기첼은 갑작스러운 카드란의 태도에 당황했다.
“폐하, 왜 이러십니까?”
“기첼.”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황비를 어디로 데려갔지?”
카드란은 기첼을 노려보며 물었다.
성녀가 자신의 의지로 성물로부터 도망친다면 성녀는 그 자리에서 죽는다.
성물은 성녀의 도망을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만약 유이시엘이 도망치려 했다면, 성물이 그녀를 죽였을 것이었다. 그러니 성녀는 도망친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강제로 납치된 것이지.
그리고 유이시엘은 성녀의 자리를 두고 도망갈 위인이 아니었다. 지에렌도 치료해야 했기에 그녀 스스로 사라졌을 리가 없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일에 대한 책임감은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으니까.
“전 정말로 모릅니다!”
기첼이 발뺌을 하자 카드란의 살기가 폭발했다. 전쟁터에서 그를 바라볼 때 드는 느낌, 너무나도 살벌하고 무서운 기세를 내뿜는 카드란이 있었다. 세안은 그의 살기에 온몸을 바르르 떨었고 기첼 역시 두려움이 담긴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기첼, 솔직히 말해라!”
카드란이 보기 드물게 화를 냈다. 고함을 지른 그를 보고 기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꼭 찾아야 합니까?”
기첼의 질문에 카드란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의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이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기첼이 머뭇거리자 그가 칼로 기첼의 뺨을 스치듯 찔렀다.
“기첼, 너를 죽이고 싶지 않아.”
카드란의 마지막 경고에 기첼은 결국 입을 열었다.
“겔릭 후작에게 데려갔습니다.”
일단은 그곳으로 가야 한다! 카드란은 검을 거두고 기첼을 앞장세워 겔릭 후작, 차몬에게로 향했다.
* * *
정신을 차린 유이시엘은 팔을 움직이려고 했다. 하지만 팔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양손이 묶여 있었다.
몸이 무거웠다.
“황비마마, 정신이 드십니까?”
어디서 들어 본 익숙한 목소리였다. 유이시엘은 자신을 바라보는 한 남자를 보았다.
차몬을 알아본 유이시엘은 겔릭 후작이라는 이름을 부르려고 했지만 목에서는 쇳소리만 나올 뿐이었다.
“데려올 때 쓴 약이 거칠어서 말입니다.”
한동안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낡고 허름한 집은 딱 보아도 폐가다. 거미줄이 무섭게 군데군데 쳐져 있었다,
차몬의 눈빛이 먹잇감을 노리는 거미와 같았다. 그리고 자신은 거미줄에 걸려 있는 연약한 곤충일지도 모른다.
“이제 당신은 죽을 거예요.”
차몬의 말에 유이시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다시 유이시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성녀는 평범한 방법으로는 죽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는 자신의 뒤로 쌓인 나무장작을 보여 주었다.
“역사에 의하면 불에 태워서 죽였더군요.”
생명력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불길 속에서 타지 않고 버티더라도 생명력이 갉아 먹힌다.
자신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았기에 얼마 가지 못해 곧 죽을 것이다.
유이시엘은 참담한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 * *
기첼은 당황했다. 겔릭 후작과 약속한 곳에 유이시엘이 있어야 하는데 그녀가 없었다.
분명이 카드란이 찾기 전까지 이곳에서 유이시엘을 처리하기로 했다. 성녀가 쉽게 죽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불에 타서 죽을 때가 종종 있었다. 성녀를 화형으로 죽였다는 기록이 전해져 내려오기에 유이시엘을 이곳에서 불태우라고 했는데.
“왜 없지?”
카드란이 차갑게 말했다.
“분명히 이곳에 두기로 했습니다.”
“그가 다른 곳으로 옮겼군.”
카드란은 차몬이 기첼의 뒤통수를 친 것을 알아차렸다.
“어딘가 근처에 있는 거 아닐까요?”
세안도 유이시엘이 걱정되었다.
“어차피 죽이려고 했던 여자 아닙니까. 그러니 굳이 찾을 필요가……!”
기첼이 외치자 카드란은 다시 한번 그를 노려보았다.
“닥쳐라.”
그가 결국 조용히 분노했다.
“세안, 힘을 써라.”
카드란의 말에 세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자신이 웃으면서 저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가 자신에게도 칼을 겨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은 바람이 거세게 휘날리고 있었다.
카드란은 금방 성물을 찾았지만 성물은 현신하지 않았다.
마치 카드란을 지켜보고 있지만 도와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 * *
차몬이 열심히 유이시엘의 주변으로 장작을 가져다 놓았다. 조금만 더 가지고 오면 바닥에 앉아 있는 자신의 키만큼 땔감이 쌓일 것이다.
이내 차몬은 장작에 불을 붙였다.
이미 기름칠이라도 한 듯 장작에 붙은 불이 거세게 타올랐다.
“네가 죽으면 내 딸이 황비가 것이야!”
그는 기뻐하며 유이시엘에게 외쳤다.
“네가 여기 있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 넌 혼자 죽는 거야.”
사람들은 이제껏 성물의 힘이 치유력뿐이라고 알고 있었다.
겔릭 후작이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보다 몸을 돌려 폐가를 나갔다.
그렇게 유이시엘은 혼자 남았다.
온몸이 뜨겁지만 얼굴은 멀쩡했다.
「불을 꺼 줄까?」
성물의 소리가 들렸다.
유이시엘의 눈동자가 조용히 식었다.
“아니요.”
그녀는 자신을 구해 주려는 성물을 거부했다.
* * *
〈그대는 곧 더 비참해질 거다. 앞으로 일을 기대하라고.〉
그가 했던 말들이 떠오른다.
무심하게 지나쳐야 했지만 상처받은 말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유이시엘은 슬프게 웃었다.
〈폐하께서 당신을 죽이라고 하셔서 말입니다.〉
기첼도 이렇게 말했다.
「지에렌을 살려야 하잖아!」
성물이 안타깝게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