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화 (28/97)

28화

이런 아가씨가 카드란 곁에 있으면 그도 행복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존재는 그를 웃게 해 줄 수 없으니까.

바닥이 갈라지듯 마음에 금이 갔다. 그런 생각을 하니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카드란이 얼마 전 화를 내고 갔던 일이 떠오르기도 했다.

유이시엘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세안과 있었을 때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는데 휴이가 오자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녀가 너무나도 눈부시고 예뻐 보여 자신도 모르게 힘이 빠졌다.

그래도 라젤란이 결혼은 최대한 미룬다고 했으니…… 살아생전 그의 결혼식은 보지 않아도 될지 몰랐다.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는 어떤 분이세요? 아, 물론 황제로서요.”

휴이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냥 굉장히 황제다운 분이세요.”

“마음에 드네요.”

휴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휴이야!”

그때 라젤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이시엘과 휴이는 뒤를 돌아봤다. 라젤란의 옆으로 카드란도 같이 걸어오고 있었다. 묵직한 그의 발걸음 소리가 너무나도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대가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카드란이 차가운 시선으로 물었다. 그러자 유이시엘은 고개를 숙이고 가지고 있던 회계 자료를 내밀었다.

“이번 달 회계 보고입니다.”

“아아, 그렇군.”

보고를 한 뒤 유이시엘은 소엘에게 가려고 했다. 그와 더 이상 할 이야기도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카드란이 자리를 떠나려던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딜 가는 거지?”

“보육원 가는 날이에요.”

그러자 카드란이 소엘을 바라보았다. 소엘은 고개를 끄덕였고 카드란은 말없이 유이시엘을 보내 주었다.

유이시엘은 휴이를 지나치고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이 어떤 대화를 나눈다 해도 이제 자신하고는 상관이 없었다.

* * *

카드란은 떠나는 유이시엘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와 잠시 닿았던 손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 손등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러다 그는 곧 헛웃음을 치고 휴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휴이 헬몬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황후가 되고 싶어 한다고 들었다.”

라젤란이 직접 거절해 줄 수 없느냐고 부탁해서 왔다. 카드란은 그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따뜻한 기운을 가졌지만 그 기운은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 어떤 여자가 온다 해도 황후 자리를 줄 생각이 없었다.

어린 시절 추억의 소녀, 그녀를 결국 못 찾는다면 홀로 살 생각이었다.

“황후 자리는 그대의 자리가 아니다.”

그는 휴이에게 냉정히 딱 잘라 말했다.

할 말을 마친 그는 보고서를 들고 황궁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휴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가까이서 보니 잘생겼지만 무시무시한 분이시네요.”

“그렇단다.”

“저를 이렇게 냉정한 눈으로 보다니.”

휴이는 두 팔을 감쌌다. 그의 차가운 시선에 왠지 움츠러들었다. 자신에게 절대로 마음을 줄 것 같지 않은 남자였다.

“황후는 도대체 누구로 삼으려고?”

“따로 정해 두신 분이 있다는구나.”

휴이는 멀리 가는 카드란을 응시했다.

“성녀님이 대단해요. 폐하의 저런 냉정한 시선을 늘 받을 거 아니에요.”

휴이의 말에 라젤란은 잠시 웃었다.

“그런데도 견디다니.”

“그냥, 그분은……. 안되셨지.”

라젤란은 그렇게 말하고 휴이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 * *

유이시엘은 보육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둘러앉았다. 그녀는 말없이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누어 주고 나머지 일들을 처리했다. 그녀는 의식 이후로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의 평이 좋아졌다는 말을 듣고 다시 보육원에 나오고 있었다.

“성녀님이 다시 오셔서 좋아요.”

“우리가 성녀님 착하다고 했잖아!”

“하지만 어른들이……!”

“그래도 난 성녀님을 믿었어.”

그들은 유이시엘에 대해 어른들이 했던 말을 그대로 들려주었다. 유이시엘은 보육원에서 오지 말라고 한 게 아이들의 반응 때문이 아니라 어른들이 몸을 사린 탓임을 깨달았다.

그들도 성녀가 이곳에 왔다는 이유로 괜한 일에 휘말리기 싫었던 것이리라.

그것을 깨닫자 씁쓸해졌다.

우울한 마음을 안고 황궁으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갔다. 그런데 황비의 침실 문 앞에 레카린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폐하께서 오셨나요?”

유이시엘의 질문에 레카린이 고개를 숙이고 대답했다.

“기다리십니다.”

“알겠어요.”

또다시 무슨 말을 하러 온 걸까.

유이시엘은 두려운 마음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방 안에는 카드란이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왔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이시엘을 바라보았다.

“보육원에 다녀오는 길인가?”

“맞아요. 그런데 무슨 일이신가요?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나요?”

유이시엘의 말에 카드란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할 일은 없다.”

그러다 카드란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온 거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정원에서 꽃을 너무 보지 말라고. 짐이 무슨 상상을 할지 모르니까. 내가 좋지 않은 쪽으로 생각하게 되는 건 그대에게도 좋을 게 없는 일이지.”

카드란은 그녀에게 매서운 시선을 주고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유이시엘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난폭한 말에, 서늘한 시선에 상처받은 감정이 튀어나와 난리를 치고 있었다.

그는…… 휴이를 황후로 맞겠다고 했을까?

그래 봐야 적어도 2년 뒤겠지.

자신이 죽고 난 뒤.

그러면…….

“……내가 알아서 뭐 하게.”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인데.

그녀는 씁쓸히 중얼거렸다.

* * *

카드란은 레카린과 함께 정원을 걸었다. 보고서에 유이시엘이 자주 왔다고 적혀 있던 정원이었다. 그 정원에서 유이시엘이 바라보던 꽃들은 과거에 소녀가 좋아했던 꽃이기도 했다.

그 사실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왜 하필이면 유이시엘은 이런 꽃들을 좋아한단 말인가.

“현자의 탑에서는 연락이 없나?”

“없습니다.”

레카린의 대답에 카드란은 혀를 찼다. 현자의 탑에서 봉인과 관련된 자료를 보내 준다고 했지만 아직 소식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찾아봐야 하는 걸까.

대체 어떻게 찾아야 하는 걸까.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유이시엘이 준 보고서를 읽었다. 일 처리는 이번에도 완벽했고 조금의 흠도 찾을 수 없었다.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빈틈이 없는 여자였다.

그러다 문득 그녀가 황후가 되었다면 제국의 치세가 안정적일 거라는 황제다운 생각을 했다.

그는 이내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로이체란이 증오스럽군.”

“폐하?”

만약 유이시엘이 로이체란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어찌 되었을까.

지금보다는 나은 관계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 웃음이 나왔다.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이런 생각을 계속 하는 자신에게 신물이 났다.

증오로 가득 차 그녀를 미워하고 괴롭혀야 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마음이 찝찝해졌다.

하지만 카드란은 그 마음을 억눌렀다.

그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류크를 향한 복수가 중요했다.

* * *

무더운 여름이 한풀 꺾이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카드란과 레카린, 그리고 기첼이 황제의 집무실에서 모여 차를 마시고 있었다. 물론 카드란은 커피를 마셨지만 말이다.

컵에 검은 액체가 고여 있었다. 카드란은 그것을 바라보다 한 모금 마시고 탁자에 컵을 내려놓았다.

“그 보고서가 사실인가?”

조금 전 기첼이 올린 보고서에는 난감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실이었습니다.”

기첼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황비마마의 평판이 원래대로 회복되고 있습니다. 의식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의식 때 일반 백성들에게도 나눠 주기 위해 물건을 많이 준비했고, 그 덕분에 평민들도 별다른 질병 없이 여름을 날 수 있었다. 이렇다 보니 백성들을 위해 이 자리를 마련해 준 황제와 성녀의 이미지가 덩달아 좋아졌다.

사람들은 그 푸르른 빛에 유이시엘의 생명력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의 실책이군.”

카드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해 한 일이 결과적으로 그녀에게 잘된 일로 돌아왔다. 우연일지 고도로 계산된 것일지는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그녀는 지금 제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특히 수도에서는 성녀가 가는 곳마다 만세를 부르기 바빴다.

마음에 들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현실이 그랬다.

유이시엘을 고립시키기 위해 다른 방법도 썼지만 쉽지 않았다.

대책을 고심하던 카드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가을이 다가오지만 유이시엘의 생명력을 빼앗을 일이 생길 여지가 없어서 그랬다. 얼른 그녀가 성물의 힘을 사용해야 할 텐데.

공식 석상에서는 유이시엘 대신 세안을 데리고 다니는 것으로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려 했다. 일부러 성녀에게는 챙겨 주지 않는 것들을 세안에게만 주었다. 그렇지만 이제 그런 것도 이전처럼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유이시엘 로이체란……. 그녀는 절대 무너지지 않지.”

유이시엘이 좀 발악해야 사람들이 재미를 가질 텐데. 하지만 그녀는 모든 것에 초연했다. 그렇다 보니 이제 그녀에 대한 반응도 무심해졌다. 동정하는 무리가 생기기도 했다.

그는 그 흐름이 무척이나 짜증 났다.

* * *

카드란은 귀족 회의를 끝냈다. 집무실에 가서 오늘 회의에서 결정된 안건을 정리하려는데, 차몬이 다가왔다.

“폐하께 독대를 요청하고 싶습니다.”

카드란은 차몬을 바라보다 그가 이전에 황후 간택을 언급한 것을 떠올렸다.

그의 목적이 뻔히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