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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27/97)

27화

또 시작인가.

유이시엘은 얼른 손수건을 찾아 역류한 피를 토했다. 검붉은 피를 바라본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 번 의식 때문에 수명이 많이 줄어들었다. 성녀가 죽음에 가까워지면 피를 토한다고 듣기는 했는데 그게 벌써부터 나타날 줄은 몰랐다.

의식을 끝내고 피를 토했을 때는 일시적일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이시엘, 도와줄까?”

성물이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유이시엘은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거기에 투명한 모습을 한 성물이 나타나 싱긋 웃고 있었다.

“이 모습을 황제가 보면 좋아하겠지만 넌 원하지 않잖아.”

그것은 맞다. 벌써부터 죽음에 가까워진 모습을 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만약 자신을 보고 동정이라도 한다면 좋겠지만, 이렇게까지 자신이 궁지에 몰렸는데도 계속 잔인하게 대한다면…… 남아 있던 마음의 찌꺼기가 날뛰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상처받고 싶지 않다.

“어떻게 도와줄 수 있나요?”

“피가 역류하는 것을 막아 줄게. 뭐, 성물의 힘을 사용하는 거라서 목숨이 더 빨리 줄어들겠지만.”

성물의 말에 유이시엘은 잠시 망설였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저분하게 죽을 바엔 차라리 깔끔하게 죽는 것이 낫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성물은 쓴웃음을 지었다.

“모두 다 대가가 있잖아.”

“대가를 줘도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때도 있잖아요.”

유이시엘의 몸에 성물이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는 계속 밀려오던 구토감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생명력이 정말로 얼마 안 남았을 때는 피를 토할 거야. 하지만 당분간은 괜찮아.”

“제 목숨은 얼마나 남았나요?”

유이시엘의 질문에 성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유이시엘의 목소리가 무미건조했다. 성물은 그게 무척이나 슬펐다.

역대 성녀들 역시 안타깝게 바라봤지만 이번 성녀인 유이시엘의 인생은 그중에서도 너무나도 슬펐다.

“2년 정도.”

“얼마 안 남았네요.”

원래대로라면 3년 정도 남았어야 했지만, 그간 카드란의 일을 처리하면서 생명력을 많이 소모했다. 거기에 지에렌을 살리기 위해 힘을 쏟아부은 탓도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문 밖에서 소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이시엘은 피 묻은 손수건을 숨기고 대답했다. 성물은 알아서 모습을 감추었다.

“일어났어요.”

“들어가겠습니다.”

소엘은 문을 열고 들어와 유이시엘을 바라보았다. 찰랑이는 청색 머리카락이 햇빛에 반사되어 신비롭게 빛났다.

“옷을 갈아입지 않으셨군요.”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어요.”

유이시엘은 그렇게 말하고 얼른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원래라면 시녀가 함께 들어와야 했지만 유이시엘은 딱히 부르지 않았다.

유이시엘은 간단히 세수를 하고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지하 식당에 내려갔다. 물론 소엘도 함께였다.

그렇게 그녀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유이시엘은 아무렇지 않게 움직였다.

* * *

유이시엘은 말없이 지에렌을 치료했다. 얼굴에 생기가 돌고 이전보다 좀 더 상태가 나아진 게 눈에 보였다.

이대로 깨어나면 좋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히 카드란의 명령으로 누군가가 지에렌을 씻기고 돌보는 것 같았다. 그의 몸은 청결한 상태였다. 햇빛을 받아 생명을 유지해 주는 목걸이가 반짝이고 있었다.

좀 더 치료하고 싶은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엘이 자신을 찾는 걸까?

“나갈게요.”

유이시엘은 얼른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그런데 밖에는 카드란이 소엘과 같이 서 있었다. 카드란이 뭔가에 분노한 표정이기에 유이시엘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최근에 그가 자신에게 분노할 일이 있을까?

그는 유이시엘에게 다가와 갑자기 그녀를 벽으로 밀었다.

“폐하?”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밤에 종종 나갔다고 하던데?”

그의 말에 유이시엘은 며칠 전을 떠올렸다.

그냥 꽃이 보고 싶어 나간 건데.

“소엘도 같이 있었습니다. 아무 일도 없어요.”

유이시엘은 조용히 말했다. 차분한 그녀의 말에 카드란은 한쪽 입가를 올리고 눈을 가늘게 떴다.

“거기에서 어떤 남자를 만났던 거지?”

유이시엘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애인 없고, 만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전 그곳에서 황궁에 들어오기 전의 추억에 잠겨 있었어요.”

유이시엘은 딱 잘라 말하고 그의 품에서 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카드란이 벗어나려는 그녀를 자신의 두 팔로 가두더니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그가 이를 악물었다.

뭔가를 참는 듯하더니 그는 유이시엘의 곁에서 떨어졌다.

“누구를 만났든 지금의 넌 황비다. 앞으로 다른 남자와 만나는 걸 들키면 지에렌의 목숨은 없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떴다.

“폐하께서 왜 저러시는 것일까요?”

소엘이 당황해하고 유이시엘은 고개를 숙였다.

카드란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너무 차갑고 매서워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얼마 남지 않았잖아.’

그녀는 상처받은 마음을 다독였다.

그가 자신에게 하는 모든 것이 상처가 된다.

이 상처를 계속 받고 싶지 않았다.

* * *

카드란은 거칠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레카린을 내보내고 혼자 남은 공간에서 커피를 찾았다. 술을 마시면 이성이 완전히 무너질 것 같아서 대신할 게 필요했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숨을 몰아쉬던 그가 창문으로 걸어갔다.

황후 자리를 생각할 때 어린 시절 그녀가 떠올라야 했다. 그런데 왜 그 소녀가 아닌 유이시엘이 생각난 걸까.

그녀가 밤에 밖으로 나가서 꽃을 바라보면 웃는다고 한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듯,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고 했다.

도대체 어떤 남자를 떠올리는 것일까.

그것만 생각하면 감정이 토할 듯 올라온다.

이번 의식 때 유이시엘은 정말로…….

그는 생각을 멈추었다.

더 이상 나아가 버리면 멈출 수 없을 것 같았다.

“최악……이군.”

그렇게 말하며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냥 유이시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녀를 이용해 복수를 해야 하는데, 왜 자꾸 이상한 생각이 비집고 올라오는지 모르겠다.

마음이 날뛰고 있었다.

카드란은 커피를 마시며 그 마음을 조용히 눌렀다.

복수, 그것만을 생각해야 했다.

* * *

황후 간택 이야기는 그렇게 마무리될 줄 알았기에 카드란은 귀족들이 그런 안건을 올렸다는 사실 자체를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런데 라젤란이 직접 혼담을 다시 청하니 그때 그 일이 떠올랐다.

“전에 거절한 것으로 아는데?”

“제 손녀딸이 워낙 만나고 싶다고 해서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라젤란의 말에 카드란이 잠시 대답을 미루고 커피를 마셨다.

“짐은 좋은 남자가 아닌데, 이해할 수 없군.”

그에게는 황비가 있었다. 그리고 가짜이긴 하지만 정부도 있었다. 그렇다 보니 한 여자만 바라보는 남편이 아니었다.

“그 외모에 그 신분이라면 얼마든지 다른 남자를 선택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말하고 카드란은 그냥 고개를 돌렸다.

“거절이군요.”

카드란의 심중을 읽은 라젤란은 잔잔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여지는 조금도 없습니까?”

“없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이유라, 카드란은 말없이 커피 잔을 쥐었다.

“정해 둔 여자가 있다.”

이 말 한마디면 될 것이다. 그의 말에 라젤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순히 부담스러워서 자신의 손녀를 거절하는 게 아니라 이미 정해 둔 사람이 있었다니.

“그렇군요.”

라젤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황제가 이런 이야기를 모두 말해 주는 사람은 아니었고, 딱히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저 손녀에게 기회가 없다는 것만 알면 충분하니까.

황제의 이런 태도는 손녀딸의 마음을 돌리기에 충분할 것이었다.

“다른 안건은 없나?”

카드란이 화제를 돌렸다. 라젤란은 웃으면서 다른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 * *

지에렌을 치료한 뒤 카드란에게 그동안 사용했던 예산을 보고하러 가려던 참이었다. 뒤에서 소엘이 여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황제의 집무실이 있는 본궁에도 정원이 따로 있었다. 뜨거운 햇살 아래 그냥 걷던 유이시엘은 정원을 지나다 무심결에 더운 햇살 아래 피어난 꽃을 바라보았다.

노란색 꽃이 어여뻤다. 그녀가 꽃을 가만히 바라보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와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유이시엘은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 다가온 여자를 바라보았다. 보라색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고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무척이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이였다. 유이시엘은 그녀가 누구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이따금 멀리서 봤던 휴이 헬몬이었다.

“저에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가요?”

유이시엘은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것 같은 휴이에게 물었다.

이전에 라젤란이 했던 말이 떠올라 그녀가 조금 불편했다.

그러나 이내 속으로 스스로를 비웃었다. 자신이 뭐라고 그녀를 불편해한단 말인가, 어차피 카드란은 자신의 남자도 아닌데.

“그냥 한번 말을 걸어 보고 싶었어요. 의식 때 너무 아름다워서 정말로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인지 아닌지 궁금했거든요.”

그녀는 싱긋 웃으며 유이시엘을 찬찬히 보았다.

“그냥 봐도 아름답네요. 정말로 소문대로 성물의 화신인가요?”

휴이는 유이시엘에게 조잘조잘 말을 걸었다. 유이시엘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무심히 말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가요?”

“그런 과분한 칭찬은 저하고 어울리지 않아요.”

아름답다고 해서 카드란이 자신을 사랑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쓸데없는 일만 몰고 왔을 뿐이다.

“겸손하네요!”

휴이의 주변에는 밝음이 넘쳤다. 사랑받고 예쁘게 자란 티가 났다. 옆에만 있어도 저절로 기분이 좋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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