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97)

26화

의식을 하는 어린 유이시엘의 주변에 빛이 났다.

류크가 그토록 아끼고 칭찬한다는 성녀 유이시엘 로이체란. 환한 빛 속에 있는 그녀는 너무나도…….

카드란은 더 이상 생각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세안이 더 나은 것 같아.”

그의 말에 레카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아래에 있던 세안이 고개를 들어 카드란에게 기쁨을 표했다. 그의 말을 들은 귀족들은 세안의 눈치를 봤다. 카드란이 세안을 얼마나 아끼는지 가늠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간이 되었군.’

의식이 점점 클라이맥스로 향했다. 이제 물건에 성력을 넣는 시간이 되었다.

카드란의 입술에 미소가 맺혔다.

물건이 도착했다.

보통 물건을 싣고 오는 수레가 몇 개 안 된다. 그런데 오늘은 수레가 끝이 없었다.

귀족들이 카드란을 힐끗힐끗 보았다.

“저 물량에 다 축복을 건다고?”

“성녀님이 힘들지 않을까?”

“저럴 수가.”

그들은 카드란이 로이체란에 가진 악감정을 알았다. 그리고 류크가 가장 아낀 유이시엘을 괴롭히는 것도 알았다.

요즘 잠잠하다 싶더니 이런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니.

* * *

유이시엘은 아래를 바라보았다. 카드란이 굳은 얼굴로 손을 움켜쥐는 게 아주 잘 보였다.

여기에 있으면 성물의 힘으로 인간 이상의 시력을 가지게 된다.

사람들의 시선을 한 번에 훑어본 유이시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황제가 이런 것을 준비했네.」

성물의 말에 유이시엘은 웃었다.

생명력이 깎이는 건 이제 포기한 부분이다.

무심해진 마음은 이런 것에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도 머리를 잘 굴렸어.」

성물은 그녀에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유이시엘이 갑자기 많은 힘을 사용했다. 쓰러지면 안 되니 말이다.

유이시엘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올라간 그녀는 하늘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 부근으로 빛들이 모여들었다.

거대한 빛들이 기둥이 되어 마련된 물건들로 벼락 치듯 떨어졌다.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유이시엘은 성물의 기운을 느끼며 마무리를 지었다.

단상에 착지한 그녀는 하늘로 기운을 보냈다.

파란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파란 눈으로 손을 뻗었다.

약간의 치유력을 가진 그것은 상처나 몸의 안 좋은 부분을 일시적으로 좋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유이시엘은 의식을 마치고 카드란에게 인사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늘 그리했듯이 무사히 의식을 마무리 지었다.

* * *

유이시엘은 의식을 치르고 마차에서 내려 방으로 돌아갔다. 방으로 돌아간 그녀는 성물의 영향력이 사라짐을 느꼈다.

“욱!”

유이시엘은 구토를 했다. 그러자 음식물이 아니라 피가 입술을 통해 역류했다.

너무 많은 힘을 사용하면 몸이 감당하지 못한다.

그래도 이전에는 피를 토할 정도는 아니었는데……. 성물이 그것을 알고 미리 대비를 해 준 것 같았다.

“하아.”

그녀는 피가 묻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카드란 때문에 성력을 많이 써서 생명력 몇 달 치가 줄어든 것 같다.

유이시엘은 성물에게 자신은 앞으로 얼마나 살 수 있느냐고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자신은 죽을 운명이고 달라지는 건 없다.

그 시간이 몇 달 앞당겨진다 해서 자신의 감정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황제가 다음번에는 어떻게 나올까?」

성물의 물음에 유이시엘은 그냥 말없이 화장을 지웠다. 입가에 묻은 피가 자신의 남은 생이 비참할 거라고 경고하고 있는 듯했다.

“잔인하게 나올 거예요.”

유이시엘은 무심히 말했다.

「너는 그한테 정말로 원망이 없네.」

성물이 그녀의 감정을 읽고 말하자, 화장을 지우던 그녀는 입꼬리를 올렸다.

“아시잖아요. 제가 어떤 마음으로 그 전쟁터에서 체념했는지를요.”

「그렇지, 그는 너를 버렸지.」

성물의 말에 유이시엘은 손을 파르르 떨었다.

다시 마음이 울고 있었다.

그때의 절망과 슬픔, 체념이 밀려왔다.

무심해졌다고 생각했던 마음에는 여전히 찌꺼기가 남아 있다.

이것들은 언제 없어질까.

유이시엘은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다시 앞을 보는 그녀의 얼굴에 감정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제 이런 것들을 누르는 것도 익숙했다.

그러다가 이 찌꺼기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다.

그럼 평온해지지 않을까.

「없어지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럼 죽을 때까지 고통받는 건가요?”

유이시엘은 우는 대신 웃으면서 말했다.

아아, 정말로 지긋지긋한 운명이었다.

5. 집착

여름의 절정이었지만 밤에는 조금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올려다본 하늘은 구름이 조금 있었고, 구름 사이로 별들이 잔잔히 보였다. 유이시엘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꽃들을 바라보았다.

고요히 생각에 잠긴 그녀는 꽃들을 손으로 어루만졌다.

이렇게 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옛 추억이 생각났다.

죽을 날이 다가오기에, 과거가 자주 떠오르는 것 같았다.

소엘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상념을 멈출 수 없었다.

“후우.”

언제까지 이런 것들을 감상할 수 있을까.

“무슨 생각을 곤히 하십니까?”

최근 유이시엘이 정원에 나와서 꽃을 감상하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 자주 있었다. 결국 소엘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은 듯했다. 그러자 유이시엘은 머리카락을 귀에 걸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짧은 갈색 머리카락이 밤에 물들어 있었다. 갈색 눈동자는 세상을 응시하듯 고요했다.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인 이 여자가, 자신의 사람은 아닐지언정 카드란에게 이상한 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어릴 적에 꽃을 키우며 웃었던 추억을 생각했어요.”

그러니 아마 이 이야기를 그대로 보고하리라.

그러면 정원을 돌아다니다 후에 카드란하고 마주쳤을 때도 그가 자신을 추궁하지 않을 것이다.

유이시엘의 말에 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행복한 추억인가 봐요. 생각에 잠길 때마다 미소를 지으세요.”

자신이 그랬던가.

무의식적으로 표정에 드러난 모양이다. 그 말을 들은 유이시엘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아무래도 어린 시절 카드란을 떠올리는 것이 너무 티가 났나 보다.

“행복했어요.”

그 시절 그가 너무나도 다정했기에, 지금의 그를 보면 너무나도 슬펐다.

유이시엘은 말없이 정원을 좀 더 거닐었다.

* * *

카드란은 의자에 앉아 귀족들을 바라보았다. 여기에는 라젤란과 지록스도 같이 있었다.

로윤이 사치를 많이 부린 덕분에 국고가 슬슬 바닥이 나고 있었다. 아직 올해가 절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귀족들은 카드란이 어쩔 수 없이 세금을 좀 더 내라고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귀족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억울했다. 낼 거 다 냈는데 또 내라니, 세금을 더 내라고 하면 반대할 작정을 하고 다들 회의에 참석했다.

물론 회의실에 앉은 카드란의 차가운 모습을 보니 그만 입이 다물어졌다. 그가 연회장에서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베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덕분에 누가 선뜻 나서서 세금을 내지 못하겠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카드란이 먼저 화두를 꺼냈다.

“다들 아시다시피 나라 예산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라젤란은 카드란을 바라보았다. 라젤란은 일전에 사냥 대회에서 그가 말했던 세금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지 기대하고 있었다.

“추가 세금을 걷는 것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을 생각해 봤다.”

“그게 무엇입니까?”

슈렌이 물었다.

“잘못을 저지른 귀족에게 벌금을 부과하겠다. 원칙적으로는 작위를 강등하는 게 맞지만, 벌금을 내면 귀족 작위는 유지하는 것으로 정하지.”

그의 말에 슈렌과 라젤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남은 귀족들은 죄가 크긴 하지만 멸문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귀족 작위를 계속 유지하기에도 죄가 무거워 작위를 박탈해 평민으로 강등하려고 했는데, 만약 돈을 주는 것으로 작위가 유지된다면 그들은 없는 것을 팔아서라도 벌금을 낼 것이었다.

다시 작위를 가지는 게 더 어렵고 설사 살아남는다 해도 더 많은 돈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반대하는 이 없는가?”

카드란의 말에 다들 조용히 있었다. 자신들에게 피해가 오지 않으니 당연히 손을 들 생각은 없었다.

“그럼 회의를 마친다.”

“폐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한 귀족이 발언했다. 그는 검은 머리카락을 풀어 헤치고, 하얀 셔츠를 입은 겔릭 후작이었다. 로윤의 편도 아니었고 카드란의 편도 아니었지만, 딱히 비리를 저지른 가문이 아니었기에 카드란에게 숙청당하지 않았다.

“뭐지?”

“황후 간택은 언제 하실 겁니까?”

그러자 다른 귀족도 귀를 쫑긋 세웠다.

“황후?”

카드란은 잠시 그 말을 읊조리더니 한쪽 입가를 올렸다.

“황후를 맞이하는 사안을 그대가 생각할 줄은 몰랐군.”

“그게 아니라…….”

“황후는 간택하지 않는다.”

카드란은 그 말만 하고 일어났다.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를 보던 겔릭 후작, 차몬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수하들이 황후 이야기를 올려도 카드란이 무시했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다.

황후 자리를 탐내던 귀족들은 모두 다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이제 여름의 기운이 방 안에 넘쳐서 무척이나 더웠다. 황후의 방에는 공기를 차갑게 해 주는 신비한 고대 보물이 있지만, 황비의 방에는 그런 게 없었기에 유이시엘의 방은 기온이 무척 높았다.

파란색 커튼이 창가에 끈으로 묶여 있었다. 유이시엘의 눈동자를 닮은 하늘색 커튼은 소엘이 특별히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잠에서 깬 유이시엘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그녀의 하얀 피부에 햇살이 닿았다. 그녀는 그 따끔한 느낌에 자리에서 일어나 느슨해진 가운 끈을 묶고 그늘이 있는 소파로 걸어갔다.

아침을 먹기 전에 차라도 한잔 마실 생각이었던 유이시엘이 갑자기 입을 움켜쥐었다. 목에서 토기가 밀려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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