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의자를 정리해 마차에 실었다.
그런데 그때 소리가 들렸다. 누가 오는가 싶어 유이시엘은 말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도착한 것은 황제가 타고 다니는 마차였다.
“황비마마, 폐하께서 오십니다.”
유이시엘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었다.
왜 이렇게 그와 마주치는 것일까. 그것도 하필이면 오늘…….
마차를 호위하던 레카린이 유이시엘과 소엘을 보았다. 놀라는 사이 마차에서 내린 카드란은 유이시엘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느새 유이시엘 앞에 다가온 카드란이 그녀의 행색을 눈으로 훑더니 물었다.
“그대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잠시 마음을 식히러 왔습니다.”
유이시엘은 차분히 말했다. 카드란은 유이시엘이 든 도화지를 바라보았다.
“그건 뭐지?”
“황비께서 매년 이곳에 와 그림을 그리셨다고 합니다.”
소엘이 유이시엘 대신 얼른 대답했다.
“그림이라고?”
카드란의 눈이 도화지를 향했다.
“무엇이 그려져 있지?”
그의 질문에 유이시엘은 손이 떨렸다. 여기에는 그가 봐서는 안 되는 그림이 있다. 소중한 추억이 담긴 그림이기에 그가 보면 안 되었다.
유이시엘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카드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무엇을 숨기고 있는 거지?”
“그런 거 없어요.”
유이시엘은 도화지를 쥔 손에 힘을 꾹 주었다. 카드란이 달라고 한다면 줘야 하는 게 자신의 처지였지만 이것만은 줄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순간 그녀의 주변으로 빛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
성물의 기운이었다.
도화지에서 빛이 나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황제, 미안하지만 이건 내가 가져갈게. 이 그림이 공개되면 내가 곤란해져서 말이야」
이전에 들었던 목소리가 카드란의 귓가에 울렸다.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한 듯 당황한 눈으로 유이시엘을 보고 있었다.
“소엘, 황비가 그림만 그렸나?”
카드린의 말에 소엘이 다가와 고개를 끄덕였다. 카드란은 손을 뻗어 유이시엘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다음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그녀의 얼굴을 해부하듯 낱낱이 살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운이 그의 눈동자에 스쳤다.
“누구를 만나러 온 거지?”
“그림만 그리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리 차려입었다고?”
그의 매서운 눈초리에 유이시엘은 입을 깨물다 결국 말했다.
“어린 시절, 친구랑 같이 여기 놀러 왔던 곳이라 기분이 좋아서 그냥.”
그녀가 차분하게 말했다. 카드란이 손을 내려놓았다.
“그대는 똑똑해.”
그리고 카드란은 소엘을 바라보았다.
“소엘을 데리고 다른 남자를 만날 일도 없겠지만, 나에게 꼬리가 잡힐 일은 하지 않겠지. 돌아가도록 해.”
유이시엘은 카드란에게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려 마차로 돌아갔다.
카드란은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 * *
유이시엘이 떠나고 레카린이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성물이 보이면 곤란한 그림이 있다고 들고 갔다.”
카드란의 말에 레카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로 성물님께 곤란한 그림이 있었던 걸까요?”
레카린은 의심스러워하는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성물이 그렇다고 하면 어쩔 수 없어.”
카드란은 한쪽 입가를 비죽 올렸다.
“황제가 성물의 가호를 받는다 해도, 성물이 직접 나서서 한 일을 파고들 수는 없다.”
“그래도 조금 수상합니다.”
“이미 사라진 도화지는 신경 쓰지 말도록. 이건 그냥 포기하는 게 맞다.”
성물의 노여움을 사고 싶지 않았다.
성물은 유이시엘을 괴롭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 같다. 하긴, 그녀는 지금 성녀니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성물이 직접 나선 일을 파고들면 성물이 노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어지간하면 성물은 황제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제국을 엉망으로 만드는 일을 제외하고.
“로윤은 성물의 선택을 받지 못했지.”
만약 황제가 암살 시도를 당하면 성물은 성녀를 통해 황제를 치료하게 한다. 웬만하면 황제가 암살로 죽는 일은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죽일 수 있었던 거다.”
“그렇다면?”
“만약 성물이 화를 내서 나를 선택한 것을 거둔다면 나도 위험해.”
카드란의 말을 이해한 레카린이 숨을 들이켰다.
“……확실히 위험하군요.”
“그래서 그냥 물러선 거다.”
사실 그림보다 그녀에게 마음이 흔들리는 게 더 신경 쓰인다. 카드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예쁘게 차려입은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당장이라도 끌고 와 마차에서 탐하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굉장히 짜증 나는군.”
마음이 자꾸 유이시엘에게 마음이 가는 게 화가 났다.
오늘 그녀의 꾸민 모습을 보는 게 아니었는데.
그는 혀를 차며 돔을 구경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하러 왔는데 기억 속에는 유이시엘만 남았다.
* * *
유이시엘은 황비궁으로 돌아왔다. 정원을 지나면서 얼마 전 피었던 꽃을 다시 바라보았다. 바람에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꽃들이 환하게 피어 있었다.
하얀 꽃을 바라보던 유이시엘은 말없이 꽃을 만졌다. 하나둘 만지는 그녀의 얼굴에는 고민의 빛이 스며 있었다.
하지만 유이시엘은 소엘을 의식하고 얼른 황비의 침실로 돌아왔다.
손가락 끝에 남아 있는 꽃잎의 촉감은 선명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유이시엘이 중얼거렸다.
“저 꽃도 어린 란이 좋아하던 건데…….”
혼잣말을 하던 유이시엘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여기 있어.”
그리고 소리가 들리면서 허공에 소녀가 나타났다.
성물의 현신인 그녀는 유이시엘에게 도화지를 돌려주었다.
“곤란했지?”
“왜 도와주셨어요?”
유이시엘의 말에 성물이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렸다. 꽃처럼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성물은 유이시엘에게 나직이 말했다.
“유이시엘이 거기서 죽는 건 원치 않아.”
지금까지 성녀 중엔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자가 많았다. 하지만 성물은 그녀들을 구원해 주지 않았다. 성물은 성녀를 동정했지만 철저히 방관자의 위치에만 서 있었다. 그렇기에 성물의 도움을 받았을 때 그녀는 떨떠름했다.
“황제가 성녀를 죽이게 놔둘 수는 없잖아? 그가 생명력이 타들어 갈 때까지 네 목을 조르면 어쩌려고.”
성물은 금방 이유를 알려 주었다.
“앞으로 위험한 물건은 들고 다니지 마.”
성물의 말에 유이시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말없이 도화지를 바라보다 한 장 한 장 넘겼다.
마지막 장에 문제의 그림이 있었다.
거기에는 금발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남자 아이와 그 아이 옆에 서 있는 어머니가 그려져 있었다.
카드란과 그의 어머니. 그들은 의식이 열리는 곳에 놀러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유이시엘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했었다.
만약 이 그림을 봤다면 카드란이 어찌 나왔을까.
유이시엘은 손이 떨렸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았다. 다만 그가 기억을 되찾는 게 싫었다.
“알겠어요.”
그림을 바라보던 유이시엘은 말없이 난로에 불을 지폈다. 더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은 불이라 생각하며 망설이지 않고 추억이 담긴 도화지를 불길 속으로 집어넣었다.
진작 이리 했어야 했는지도.
일렁이는 불길을 바라보며 유이시엘은 손을 뻗었다.
아름다운 추억이었지만 그녀는 가져선 안 되는 것들이었다.
* * *
카드란이 든 와인 잔에서 붉은 액체가 찰랑, 소리를 냈다.
“갑자기 와인이라니,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방에 들어온 세안은 익숙하게 외투를 벗었다. 공교롭게도 세안이 입은 드레스가 분홍색이었다. 카드란은 오늘 본 유이시엘을 떠올렸다.
비단결 같은 청색 머리카락, 맑고 선명하고 깊은 하늘색 눈동자, 거기에 살짝 올라간 붉은 입꼬리, 가는 체구를 감싼 얇은 옷, 눈에 담았던 그녀가 다시 그의 뇌를 지배했다.
“먼저 자라.”
카드란의 말은 익숙했다. 세안은 카드란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도, 더 이상 묻지 않고 침대에 들어갔다.
홀로 술을 마시던 그는 와인 잔을 바라보았다.
붉은 액체가 그를 보고 있었다. 마치 비웃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와인 잔에 힘을 주었다. 와인 잔에 거미줄 같은 금이 생기더니 산산이 깨졌다.
유리가 깨지면서 상처가 난 탓에 손에 묻은 피를 바라보며 그가 읊조렸다.
“정말이지 증오스럽군.”
심장이 뛰고 있다.
박동 소리가 멈추지 않는 것처럼 유이시엘을 향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그는 절대로 제 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발악했다.
“이제 시작이야.”
유이시엘 로이체란, 생명력이 얼마나 많이 남았는지 모르지만 쉽게 죽지는 않겠지.
그렇기에 더욱더 철저히 굴려야 했다.
* * *
의식이 다음 날로 다가왔다. 슈렌은 물건을 운반 준비를 위해 그것들을 만드는 곳으로 향했다. 카드란이 공정 작업을 철저히 비밀로 하라고 했기에 그가 직접 갔다 와야 했다.
물건은 주문 수량대로 만들어졌고 이제 남은 것은 의식의 마지막 행사 때 유이시엘에게 이것을 가져다주는 것뿐이었다.
이번 의식의 물건은 머리핀으로 정했다. 머리핀을 놓으면 주변 일대가 정화될 것이다. 그렇게 몸에 나쁜 것이나 위생상 안 좋은 것들이 알아서 정리가 되리라.
이것만 해도 전염병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
물론 돈이 많은 이들이야 의사를 찾아가면 되지만, 빈민가는 그럴 형편이 안 된다.
그래서 빈민가의 사람들에게 성물이 깃든 물건을 나눠 주는 것만으로도 나라에 도움이 되었다.
원래 이것은 빈민가를 대상으로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카드란이 몰래 그 수량을 배나 늘렸다.
슈렌은 수량을 확인하고 나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 카드란이 주문한 수량은 수도에 사는 시민들의 인구수보다 많다. 관광객에게까지 나눠 주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