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화 (23/97)

23화

류크는 유이시엘을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크흐, 그나마 그년에게는 한 방 먹일 수 있군.”

사실 류크는 성녀인 유이시엘이 쓸모가 있어 보여서 가까이했다. 하지만 공식석상에서를 제외하면 말을 걸어 본 적도 없다.

자신이 그런 천한 여자를 가까이한다고 생각하다니.

카드란이 오해하고 있었지만 류크는 그것을 바로잡아 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유이시엘의 일에 상처받는 척하면 카드란은 유이시엘을 더 괴롭힐 것이었다.

류크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것이 카드란을 살린 유이시엘을 향한 복수였다.

“사랑했던 남자에게 죽어 보라지.”

류크는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이렇게 복수를 위한 연극을 하고 있었다.

* * *

의식과 관련된 예산안을 의논하는 귀족 회의가 열렸다. 슈렌은 카드란에게 역대 예산이 얼마나 들었는지 보여 주었다.

귀족들은 예산을 보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역대 황제들이 썼던 예산들을 비교해 보니 선황제인 로윤이 통치했을 때가 가장 적었다. 그 적은 예산으로 유이시엘이 의식을 행한 것은 정말로 대단히 노력한 것이다.

이번에 의식과 관련한 예산안을 짜 온 유이시엘은 떨리는 마음으로 카드란을 보았다.

한 장 한 장 자세히 보던 그의 시선이 유이시엘을 향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의 눈빛 같았다. 하지만 유이시엘은 최대한 무심한 표정으로 있었다.

“올해는 작년보다 예산이 많군.”

“올해 물가가 반영된 예산입니다.”

“인정하지, 작년 예산도 적은 편이었고. 그런데 이것 말고도 특별한 것을 준비할 수 없을까? 짐의 첫 의식인데 특별히 기억되게 하고 싶군.”

“그럼 물건을 추가로 만들었으면 합니다.”

의식 때 하이라이트는 위생을 유지할 수 있도록 성물의 힘을 물건에 깃들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몇 개나 만드느냐는 예산을 잡아 주는 황실의 몫이었다.

“전염병이 생기는 건 위생이 좋지 않아서예요. 빈민가나 전염병이 잘 생기는 지역의 위생을 점검하고 미리 대비할 수 있어요.”

유이시엘은 차분히 말했다.

“작년에는 안 했던 것이군.”

“맞아요.”

카드란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는 좀 더 예산을 늘리도록 하지.”

다행히 유이시엘의 말꼬리를 잡는 일은 없었다. 의식을 하는 동안은 그녀를 건드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감사합니다.”

유이시엘은 고개를 숙였다.

일단은 예산이 넉넉해졌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의식 진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카드란은 유이시엘이 건네준 예산안을 집무실에서도 보고 있었다. 깔끔하게 도표를 만들어 적은 예산안엔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래서 짜증이 났지만.

그는 커피를 타 한 모금 마셨다. 쓴 커피의 향이 코로 들어왔다.

눈을 가늘게 뜬 그는 비죽 웃었다.

“예산을 얼마나 더 편성하실 생각이십니까?”

슈렌이 카드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작년의 4배로 할 거다.”

“네?”

“물건들은 빈민가만 아니라 일반 백성도 쓸 수 있도록 개수를 늘릴 거다.”

슈렌은 당황했다.

“귀족들도 가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도대체……?”

“성물의 힘을 빈민가에만 주는 건 아니지 않지 않나?”

카드란은 물건을 만드는 데 쓰이는 예산을 굉장히 많이 책정했다.

“하지만 그러면 성녀님이 힘드실 텐데요? 의식을 할 때 성력을 많이 쓰시면 현기증이 난다고 합니다만…….”

“짐의 첫 의식이야.”

카드란은 딱 잘라 말했다. 더 이상 슈렌의 의견을 듣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물건에 성물의 기운이 깃들게 하면 유이시엘의 목숨도 그만큼 사라진다.

필요 이상의 생명력을 소모하도록 한다면 그녀도 무너지지 않을까? 의식을 하던 날 물건의 개수를 보고 유이시엘은 울지도 모른다.

의식을 망치면 그녀의 완벽한 이미지를 추락시킬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일을 잘 처리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그녀는 절망하겠지. 그렇게 실수를 하면 성녀의 이미지가 부서질지 몰랐다. 자신을 원망하는 소리를 낸다면, 귀족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그런다면 더욱더 효과가 클 것이었다.

게다가 그 일로 유이시엘의 죽음 역시 앞당겨질 것이었다.

* * *

바람이 살랑살랑 불고 있었다. 열어 둔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이 유이시엘을 빙글빙글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바람을 맞으며 현신한 성물이 환호성을 질렀다. 날갯짓을 하며 창문 근처를 날아다녔다.

“나는 여름이 좋아!”

“작년에도 그러시더니.”

“난 쉽게 안 변해!”

성물은 책상에 앉아 유이시엘이 일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 해?”

“옛날 생각요.”

의식은 백성들에게는 축제였다. 성물의 위력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역대 황제들은 이 의식을 대규모로 벌였다. 돔 안에서는 귀족들이 의식을 거행했기에 일반 백성들은 돔 안에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하늘로 올라간 성녀의 모습은 밖에서도 볼 수 있었다.

“이번에도 하늘을 날게 해 줄게”

“너무 높이는 말고요. 무서워요.”

“말은 그래도 잘하잖아! 그런데 이번에도 그곳 갈 거야?”

“갈 거예요.”

“혼자서?”

성물의 질문에 유이시엘의 손이 멈추었다.

“란하고 같이 갈 순 없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어딘지 슬퍼 보였다.

“소엘하고 가게 되려나요?”

“감시자하고?”

“저를 지켜 주는 기사예요.”

“감시자야,”

성물이 딱 잘라 말하고 유이시엘이 쓰게 웃었다. 성물의 말이 맞았기에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자신을 감시해서 카드란이 얻는 것이 있을까? 그가 이러는 것까진 이해하기 힘들었다.

혼자 가면 난리가 날 테니 소엘을 데리고 가야겠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그곳은 카드란과 추억의 장소였기에 더욱더 그랬다.

* * *

오늘따라 성녀가 이상했다. 소엘은 의문 어린 눈으로 유이시엘을 바라보았다.

늘 수수한 복장을 입고 다니던 그녀가 화려한 분홍색 드레스를 입었다. 거기에 단화를 신고 화장을 했다. 분홍색으로 화사하게 화장을 해서 더욱더 청순해 보였다.

늘 밋밋해 보였던 그녀의 삶에 색깔이 칠해진 느낌이었다.

“가방에는 뭐가 들어 있습니까?”

“도화지와 연필이에요.”

유이시엘의 말에 소엘은 가방을 확인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백성들이 주로 의식을 바라보는 곳으로 갈 거예요.”

유이시엘은 그렇게 말하고 황비궁을 나가 마차를 불렀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유이시엘의 드레스가 살포시 흔들렸다.

* * *

높은 산에 올라간 마차가 멈추었다. 말을 타고 마차를 따라온 소엘은 가만히 제 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높은 산에선 수도가 한눈에 보였다. 전체적인 풍경을 볼 수 있어서 의식이 있는 날 백성들이 붐비는 곳이다. 소엘도 어린 시절에 이곳에서 의식을 자주 챙겨 보았다.

유이시엘은 마차에서 내려 걸었다.

“조금 시간이 걸릴 거예요.”

그녀가 의자를 잡고 앉아 가방에서 도화지를 꺼냈다.

불어온 바람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사르르 움직였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머리카락을 귀에 걸고 유이시엘이 그림을 그렸다.

손이 움직이며 주변이 빠르게 그려졌다.

그림에 집중하는 그녀를 보며 소엘은 감탄했다. 도화지에는 아기자기한 집들이 그려져 있었다.

능숙하게 손을 움직이는 그녀를 보고 소엘은 잠시 근처에 앉았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엔 감시를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소엘은 편안하게 앉아 그녀가 그림을 완성하기를 기다렸다. 유이시엘에게도 편안한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여기엔 매년 오셨나요?”

소엘의 질문에 유이시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여기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시는구나.

소엘은 가볍게 생각했다.

* * *

카드란은 파티를 끝내고 피곤한 듯 소파에 앉아 숨을 내쉬었다. 옆의 세안도 소파에 풀썩 앉았다.

“오늘 일은 더 이상 없나요?”

세안은 이제 곧 길드 수장으로서 나가 봐야 했다.

“더는 필요 없다. 볼일 보도록.”

세안은 말이 없는 카드란을 두고 일어났다. 그녀가 나간 후 카드란은 소파에서 등을 떼고 허벅지에 팔뚝을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란, 이리 오렴.〉

어머니와 같이 가곤 했던 추억의 장소가 떠올랐다. 전쟁터를 누비기 시작한 이후로 가 보지 못한 곳이다.

그는 일어나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이전에는 어머니의 죽음에 분노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약한 자신을 보여 드릴 수 없어서 가지 않았는데, 지금은 괜찮지 않을까?

복수를 하고 있는 중이었기에 어머니도 하늘에서 만족하실지도 몰랐다.

그는 얼른 검을 허리춤에 찼다. 레카린과 몇 명 기사들을 대동하고 그곳으로 향했다.

* * *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갈 무렵 소엘은 하품을 했다. 유이시엘은 잠시 고민하더니 지우개로 스케치한 부분을 지웠다. 그리고 다시 연필을 움직이더니 그림을 완성시켰다.

아름다운 돔이 그려졌다.

“매년 와서 기념으로 그림을 그렸어요. 그럼 의식이 잘 돼서.”

유이시엘은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 도화지를 챙겼다.

“돌아가는 겁니까?”

“가야죠.”

좀 더 있고 싶지만.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유엘, 어서 와!〉

〈란이 너무 빨라! 아주머니, 그렇죠?〉

〈그러게, 란! 천천히 가. 유이시엘이 힘들어해.〉

〈아무튼! 알겠어요. 내가 봐준다.〉

잔잔한 추억이 밀려온다.

유이시엘은 잠시 허공에 그가 있는 듯 공기를 어루만졌다.

이곳은 어린 시절 카드란과의 추억이 서린 곳이다. 지난 10년간 이곳에 혼자서 와서 그림을 그리며 과거를 추억했다.

그는 이제 잊었지만. 아니, 자신이 기억을 지웠지만.

씁쓸함이 밀려와 그녀는 고개를 숙이다 이제 돌아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소엘도 가려고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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