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카드란의 얼굴이 차갑게 변했다.
- 그런데 마법이 완벽하지는 않군. 틈이 있어.
“그렇다면?”
- 이따금 기억이 떠오르겠군.
체렌은 고민하더니 카드란에게 물었다.
- 그 틈을 벌릴 수는 있다. 완벽하진 않지만 약간의 틈으로 조금의 기억을 되찾을 수는 있겠지. 다만, 봉인을 한 것에는 이유가 있을 거다.
그러면서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 모르는 게 나은 일도 있는 법이지.
그녀의 말에 카드란은 주먹을 쥐었다.
모르는 게 낫다고? 그런 말은 자신의 사전에 없다.
“부탁드립니다.”
카드란의 말에 체렌은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거울을 통해 카드란에게 마력을 밀어 넣었다. 봉인된 기억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자 카드란은 소리를 질렀다.
- 그냥 깨질 줄 알았는데 쉽지 않군. 인간이여,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카드란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무나도 아파서 표정이 일그러졌다.
- 내 마력이 튕겨 나와서 그리 많이 되찾지는 못했을 거다. 아예 효과가 없을지도 모르겠군.
체렌은 잠시 카드란을 살폈다.
- 어떤가?
“기억이…… 났습니다.”
그가 머리를 두 손으로 꾹 잡았다.
〈란, 나중에 이 꽃 심을 수 있는 거지?〉
〈물론! ……나중에 난 커다란 정원이 있는 집을 살 거야.〉
〈란이 최고야.〉
소녀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같이 모종을 가져와 어린 날의 자신과 소녀가 화분에 심었다.
소녀의 얼굴은 흐릿했지만 그래도 소중했다.
- 아무래도 성물 같은 존재가 간섭을 한 것 같군.
체렌의 말에 카드란은 놀랐다. 성물 같은 것이 또 있다니?
- 원래 고대부터 마력의 정수를 담은 물건들이 몇 개 있지. 성물도 그중의 하나고. 대부분은 드래곤들이 인간들 세계에 있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해 가져왔지만 다 회수한 것은 아니다.
즉 성물과 비슷한 물건을 누군가가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자신의 기억을 봉인했다는 뜻이었다. 카드란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그 물건의 정체부터 알아야 한다.
카드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래도 그것에 대해 알고 있는 존재는 성물 말고는 없을 것 같았다. 다만 성물이 현신하려면 유이시엘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녀에게는 절대 부탁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을 되찾을 단서를 발견하려면 성물이 필요했다.
“감사합니다.”
일단 카드란은 그녀에게 감사해했다.
봉인만 푼다면 어린 시절, 자신이 줄곧 그리워했던 존재를 찾을 수 있다. 그럼 자신도 더 이상 유이시엘을 가지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를 향한 욕망으로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 제국의 황제여, 만약 그 물건에 대한 단서를 우리가 얻게 되면 그대에게 알려 주겠다. 그 물건의 뒤처리는 그대가 해 다오.
“알겠습니다.”
카드란 역시 성물이 아닌 다른 물건이 세상에 있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런 특별함은 황제만이 가지는 게 낫다.
체렌은 싱긋 웃었다.
거울에서 빛이 나더니 그녀의 영상이 사라졌다.
조그만 단서를 얻긴 했지만 좀 더 일이 복잡해진 것 같았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 * *
카드란은 마차에서 고민을 하다 손을 움켜쥐었다. 유이시엘의 도움을 받는 것은 정말로 싫은 일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집을 버려서라도 성물의 현신을 만나고 싶었다.
마차가 황궁에 도착했다. 일단은 그는 유이시엘이 있는 황비궁으로 걸어갔다. 입구로 가니 소엘이 검을 들고 유이시엘의 집무실을 지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소엘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황비는?”
“안에 계십니다.”
카드란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창문을 통해 햇살이 들어왔다. 햇살이 머무는 책상에 유이시엘이 엎드려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리고 곤히 자는 그녀 바로 옆의 작은 소녀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런.”
그 존재는 카드란을 보고 입술을 비죽 올렸다.
“황제잖아.”
성물의 현신은 소녀의 모습이라고 한다. 카드란은 소녀가 자신 앞에 나타나지 않았던 성물의 현신임을 알아챘다.
“왜, 또 우리 성녀를 괴롭히려고? 아무튼 자고 있는 성녀에게 무슨 일이야?”
성물의 말에 카드란이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당신을 만나러 왔습니다, 성물이여.”
“나를? 무슨 일로? 너는 딱히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바라진 않던데?”
“제 기억을 되찾고 싶습니다.”
카드란의 말에 성물은 그를 보았다.
“아아, 그건 나도 들어줄 수 없어.”
“어째서입니까?”
“영역 문제라고 해야 하나?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한 거라서.”
그리고 성물은 카드란에게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 포기해. 나도 어떻게 못 해.”
“방법이 정말로 없습니까?”
성물은 가만히 그를 보았다.
“네가 과연 방법을 얻어 낼 수 있을까?”
“그게 무슨?”
“로이체란 가문의 힘이 필요해. 수장인 지에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
카드란은 눈을 크게 떴다.
“그를 원래대로 살려.”
이미 죽어 가는 중인, 성녀의 생명력으로 생명이 유지되는 지에렌이 아닌가.
게다가 로이체란 사람의 손을 빌리라니, 그것은…….
“못 하겠지?”
그렇게 말하고 성물이 웃었다.
“너는 소중한 것을 영원히 얻지 못할 거야. 넌 복수를 택한 인간이니까.”
그렇게 말하고 성물은 사라졌다.
카드란은 곤히 자는 유이시엘을 바라보았다. 평화롭게 잠이 든 그녀의 숨소리가 고요했다.
‘후우.’
그의 손이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향했다. 그러다 얼른 손을 뺐다.
“미쳤군.”
그는 그렇게 읊조리고 얼른 방을 나섰다.
여기에 있으면 돌아 버릴 것 같았다.
* * *
집무실로 들어온 카드란은 마음을 다잡았다.
유이시엘에 대한 마음, 혼란을 정리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해야 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슈렌이 카드란의 책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서류를 정리하다, 카드란이 들어온 것을 보고 일어났다.
“별다른 일은 없나?”
“보고할 게 있습니다.”
“무엇이지?”
슈렌은 안경을 올려 쓰고 차분히 말했다.
“관리들에게 밀린 급여가 모두 지급되었습니다.”
“다행이군.”
“그렇게 하고도 돈이 남았습니다.”
류크의 재산은 엄청났다. 카드란은 혀를 찼다. 군대를 개편하고, 급여를 정리했는데도 돈이 남았다. 도대체 얼마나 해먹었단 말인가.
“그리고 전 황후마마의 처소에서 나온 것들도 상당합니다. 국보도 마음대로 쓰셨더군요.”
“저런.”
“특히 눈물의 다이아몬드는 큰 행사 때 쓰는 물건인데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셨습니다.”
슈렌의 말에 카드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팔기 전에 알아서 다행이군.”
“정말입니다.”
제국을 상징하는 것들이 전 황후의 개인 처소에서 많이 나왔다. 원래대로라면 사용하고 황실의 보물 창고에 놔두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카드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이 무능해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자신이 복수의 기회를 얻어 살아남을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레카린이 이것을 올려 달라 하더군요.”
슈렌은 보고서를 올렸다. 카드란은 보고서를 넘겼다.
거기에는 유이시엘의 일상이 적혀 있었다.
카드란은 보고서를 천천히 읽었다.
그녀는 그저 늘 하던 대로 기도를 하고 식사를 한 후 이따금씩 정원 산책을 하면서 꽃을 보고 방에 들어가 보육원이나 황실에서 하는 자선 행사 내용을 정리한다고 했다.
별 내용이 없어 무심히 넘기려던 차에 카드란의 시선을 사로잡는 부분이 있었다.
‘꽃?’
정원에 핀 꽃을 유심히 보는 편이었습니다. 혹시나 독이 있는 꽃인가 해서 알아보았는데 들플레 꽃과 오엘리아 꽃, 슈만 꽃, 첼란 꽃이었습니다. 그냥 일반 가정에서 정원에 주로 심는 꽃입니다.
레카린이 덧붙여 적었다.
“오엘리아, 슈만?”
그 이외의 꽃들도 있다.
“왜 그러십니까?”
슈렌이 표정이 굳은 카드란을 보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란, 이 꽃들 이름이 뭔지 알아? 오엘리아하고 슈만이야! 그리고 이건 첼란!〉
〈그것들을 어찌 다 알아?〉
〈내가 나중에 정원을 가꾸려면 미리 알아야 하잖아.〉
잊었던 기억이 밀려왔다.
“우연이겠지.”
하지만 우연이라 해도 불쾌했다.
기억 속의 그녀와 유이시엘이 겹치자 기분이 최악으로 곤두박질쳤다.
* * *
기도실에 들어간 유이시엘은 평소처럼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잔잔한 기운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성물의 존재가 현신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유이시엘!”
성물은 유이시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지에렌의 상태가 좋아졌어요.”
유이시엘은 성물 앞에서는 종종 미소를 지었다. 성물은 입가에 맺힌 작은 미소를 좋아했다.
늘 슬픔에 싸인 유이시엘이 웃는 건 드물다.
그래도 이전에는 가끔 웃고, 울고 했는데 카드란을 살려 주고 난 뒤엔 모든 것에 무심해졌다.
전부 다 카드란 때문이다.
“카드란이 너를 찾아왔었어.”
“그가, 언제요?”
“네가 낮잠 자던 날.”
“왜 그것을 이제 알려 주시는 거예요?”
“그냥, 말하고 싶지 않았어.”
성물은 그렇게 말하고 그녀에게 빛 가루를 날렸다. 성물이 날린 빛 가루가 유이시엘의 주변에서 원을 그렸다.
“그가 기억이 봉인당한 것을 안 것 같아.”
유이시엘의 눈동자가 떨렸다.
“왜 봉인당했는지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몰라야 해요.”
유이시엘은 딱 잘라 말했다.
‘다시’ 그의 기억의 봉인이 풀리는 건 원치 않았다. 그가 자신을 슬픈 눈으로 보는 것이 싫었다.
“제 마음 아시죠?”
“알아.”
“저를 지켜 줘요.”
유이시엘은 무심히 말했지만 성물은 그녀가 처연하다고 생각했다. 성물은 유이시엘을 지그시 보다가 입을 열었다.
“곧 있으면 봄이 끝나.”
성녀는 여름에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이것저것 했다. 그렇다 보니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유이시엘에겐 할 일이 많아졌다. 미리 재정을 확보해야 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전염병을 잠재우기 위해 의식을 하는 것이었다. 그 의식은 오로지 성녀의 지휘아래에서만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