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카드란이 저벅저벅 걸어와 그녀를 벽으로 밀쳤다.
“경고하지.”
그가 유이시엘을 가두고 주먹으로 그녀의 옆을 쳤다.
“앞으로 혼자 돌아다니지 마.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너를 건드리는 일을 만들지 말도록. 알겠나?”
카드란의 말에 유이시엘이 고개를 숙였다.
“내 손에서 천천히 죽어 가면서 류크를 떠올려. 그리고 그를 원망해. 나도 원망하고, 절규하라고!”
그는 그녀의 어깨를 꽉 잡았다.
“혼자서 착한 척, 그러지 말라고.”
그렇게 강하게 말하고 카드란은 잠시 움찔거렸다.
손끝에 닿은 어깨의 살결이 너무 부드러웠다. 이대로 이끌려 그녀를 취하고 싶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치밀어 올랐다.
카드란이 이를 악물며 물러났다.
“나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그대는 모를 거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이제부터 기사가 그대를 감시할 거다. 내 눈 밖에서 벗어날 생각 하지 말라고!”
그 말을 끝으로 문을 닫고 나간 카드란은 한동안 문에 기댄 채 고개를 숙였다. 숨을 몰아쉬며 감정을 정리하던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빌어먹을!”
몸이 그녀 앞에서 애타게 발정한다.
만약 유이시엘이 로이체란 가문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어떤 행동을 했을까.
“하아.”
머리로는 그녀만은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마음과 몸이 그녀를 너무나도 원한다.
이 마음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더라…….
정말로 지긋지긋했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복수를 앞당겨야 한다.
마음이란 괴물이, 그녀를 원하는 갈증이 자신을 삼키기 전에.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벌이기 전에 말이다.
* * *
그가 나가고 유이시엘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증오가 온몸에 와닿았다. 자신을 혐오스럽게 바라보고, 분노를 터뜨리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흑…….”
우리의 운명은 왜 이런 것일까.
그의 복수를 각오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치니 힘들었다.
어린 시절 카드란의 증오의 실체를 처음으로 확인하고 울었다. 그러고 난 뒤 울음을 삼켰다.
그가 자신을 차갑게 바라볼 때마다 울었지만 나중에는 서서히 감정이 무뎌졌다. 마음은 아팠지만 울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울고 싶었다.
그냥…… 얼마 남지 않은 삶 동안 그와 이런 일이 반복될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에 치미는 감정에 미칠 것 같았다.
“하아.”
그녀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가 기억을 잊은 게 다행일까 불행일까.
아마도 기억을 하고 있었다면 그는 울면서 자신의 목을 조르지 않았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면 다행인 걸까?
유이시엘은 마음속으로 해답을 구했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마음이 그에게 모든 것을 밝히고 괴로움에서 벗어나자고 외치고 있었다.
유이시엘은 가슴을 꾹 눌렀다.
감정이란 괴물에 사로잡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하기 전에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안식이 찾아오면 평온해지겠지. 그럼 자신 안의 찌꺼기도 모두 사그라들 테니까.
4. 과거의 흔적
햇살이 내려쬐는 방으로 한 여자가 들어왔다. 머리카락을 아주 짧게 자르고 한쪽 귀에 귀걸이를 한 20대 초반의 여자였다.
갈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이 가을을 연상케 했다. 은빛 갑옷에 새겨진 호랑이 문양은 그녀의 신분이 황실 기사단의 기사임을 알 수 있게 해 줬다.
“찾으셨습니까!”
그녀는 고개를 숙이다 다시 번쩍 들고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자 책상에 앉아 서류를 점검하던 레카린이 안경을 빼고 그녀를 향해 웃었다. 그는 충직한 수하의 등장을 반겼다.
“목소리가 언제나 크군.”
“단장님께서 찾으셨는데 당연히 그래야죠.”
그렇게 웃으면서 그녀가 말했다.
“너를 부른 것은 명령 하나를 내리기 위해서다.”
“무슨 명령입니까?”
“그게…….”
레카린은 잠시 망설였다.
“내가 아카데미에서 너를 발굴했을 때 네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서 말이다.”
“물론입니다.”
“황비마마를 보호하는 것도 가능할까?”
레카린의 말에 그녀, 소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명령이었기에 그녀는 당황했다.
“그냥 지키면 되는 겁니까?”
“아니, 감시도 해야 한다. 자세한 것은 폐하께서 지시해 주실 것이다.”
자카린은 자신을 유난히 따르는 소엘의 안색을 살폈다. 잠시 고민을 하던 소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고맙다.”
“그런데 보너스는 있겠지요?”
그녀는 넉살좋게 물었다.
“안 주면 안 할 것이냐?”
“그건 아니지만요.”
“그럴 줄 알았다. 물론 있어야지.”
“좋습니다.”
소엘과 이야기가 잘 통했다. 레카린은 의자에서 일어나 소엘을 데리고 황제의 집무실로 향했다.
카드란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 * *
카드란은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었다. 봄바람은 한없이 따뜻한데 마음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의 차가운 마음 한구석은 유이시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답답하군.”
류크가 유폐되어서 삶의 의지를 잃은 것일까. 그래서 그렇게 초연하고 무심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카드란은 입매를 비죽 올렸다. 유이시엘의 상태를 류크에게 알려 주면 그가 절규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유이시엘의 절망적인 마음이 류크를 괴롭게 할 것이니 오히려 잘된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
류크가 누구인지 기억해라. 그리고 유이시엘은 류크가 아끼던 조카다.
“혼자서 깨끗한 척하는 것도 가증스러워.”
유이시엘 역시 류크 곁에서 더러운 일들을 수없이 많이 저질렀을 것이었다. 류크는 바보 같아서 그것을 다 드러내고 다녔지만 유이시엘은 그러지 않은 것뿐이다.
그런데 혼자 고고한 척하다니.
그는 그렇게 생각한 후 커피를 마시며 복잡한 마음을 정리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레카린이 들어왔다. 카드란은 몸을 돌려 레카린과 같이 들어온 여자를 바라보았다.
“폐하를 뵈옵니다!”
“이름이 소엘이었던 것 같은데?”
소엘은 얼굴이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저를 기억하신다니, 영광입니다.”
“레카린이 아카데미에 있을 때 눈여겨보았던 기사라고 들었다. 실제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으니 기사단에 들어왔을 때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다.”
카드란의 칭찬에 소엘은 고개를 허리를 숙였다.
“네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겠지?”
시선을 들어 올린 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비마마를 지키는 일이라 들었습니다.”
카드란은 입매를 비틀었다.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정기적으로 보고해라. 하지만 그녀가 절대로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일단 내 편지를 들고 황비에게 가 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소엘은 두 손으로 편지를 받고 나갔다. 카드란은 나가는 소엘을 바라보며 웃었다.
“귀여운 아가씨군.”
“보너스를 달라고 하더군요.”
“연인을 빼앗아서 미안하다.”
그러자 레카린이 얼른 얼굴을 붉혔다.
“그런 사이 아닙니다.”
“좋아하지 않나?”
“그렇지만 연인은 아니죠.”
레카린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부끄러워하는 수하의 모습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어리기도 하고요.”
레카린이 20대 후반이니 나이 차이가 좀 나는 편이었다.
“짐도 나이를 먹긴 했군.”
카드란의 나이는 올해 27살이었다. 전쟁에 처음 참전한 것은 그의 나이 20살, 성년이 되고 1년이 지나서였다.
“내가 저 나이였을 때는 첫 전투 때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검을 휘둘렀지.”
카드란은 그때를 회상했다.
죽고 싶지 않았기에 사람을 죽였다.
처음엔 그것이 끔찍하게 생각되었지만 나중에는 익숙해졌다. 누군가를 죽이고, 죽는 것에 무감각해졌다.
“전쟁터는 다 그렇죠. 하지만 소엘이 죽으면 많이 슬플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카드란이 웃었다.
“나는 레카린이 귀족이랑 결혼할 줄 알았는데…….”
카드란의 말에 레카린은 고개를 저었다.
“기사단장이 되면서 작위를 받았지만 그래도 저는 정통 귀족이 아닙니다. 그리고 정략결혼은 싫습니다.”
레카린의 말에 카드란은 고개를 저었다.
수하들에겐 모두 다 작위를 주었다. 귀족이 된 측근들을 세력가들이 탐을 냈다. 그런데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말하며 한사코 그 자리를 거부했다.
죽어라 고생해서 낭만 같은 건 없어야 할 놈들이 사랑을 꿈꾸고 있었다.
“사랑이라…….”
“폐하께서는 아무래도 황후마마를 정략결혼으로 들이시겠죠?”
레카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긴 싫군.”
카드란은 고개를 저었다.
“헬몬 공작가에서 혼담을 제의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헬몬 공작이 떠나면서 넌지시 결혼에 대해서 물어보긴 했다. 카드란은 그 자리에서 생각 없다고 말했지만 말이다.
“아직 생각 없다.”
“혹시 마음에 두신 분이 있습니까?”
자카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은 없다.”
카드란은 그렇게 짧게 대답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현자의 탑에 다녀올 거다, 며칠 걸리겠군.”
“호위하겠습니다.”
현자의 탑은 수많은 학문이 다루어지는 곳이다.
전대 황제는 현자의 탑의 교수들을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카드란은 황제가 되고 나서 현자의 탑의 교수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만인의 존경을 받는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기도 했고, 제국이 제대로 돌아가려면 그들의 지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특히 현자의 탑의 총수인 마르켈린.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고 있다고 하는 그를 만나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