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97)

18화

유이시엘은 연회장을 나갔다. 연회장에 감도는 음악 소리, 사람들 소리에 파묻혀 그녀가 움직이는 소리는 금방 사라졌다.

유이시엘은 자신이 잠시 바람을 쐬고 와도 신경 쓰는 이들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은 여기서 그런 존재니까.

“황비 전하께서 사라졌잖아?”

그런데 그녀를 주시하는 시선이 있었다. 의아해하는 눈으로 그들이 그녀가 사라진 곳을 응시했다. 그리고 곧 유이시엘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 * *

젤칸은 사람들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았다. 특히 카드란이 자신을 가까이하며 술을 계속 권했다. 술을 좋아하는 젤칸은 즐겁게 마셨다.

그렇게 술을 퍼마시던 그는 문득 정신이 몽롱해졌음을 느꼈다. 취한 것 같다.

“취했나? 독한 술이라 그런지 그대답지 않게 빨리 취한 것 같군.”

카드란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젤칸은 고개를 얼른 저었다.

“폐하, 걱정 마십시오. 저는 어디 안 갑니다. 제가 폐하의 술을 받지 않으면 누가 받는단 말입니까?”

고위 관료들,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젤칸은 당당히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그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대는 언제나 한결같군.”

카드란은 젤칸에게 웃으며 술을 더 주었다.

“그렇습니까?”

젤칸은 카드란이 칭찬했다고 생각했다. 더욱더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는 신이 나서 다른 곳에 가 자신의 권력을 자랑하고 싶었다. 위세를 부리고 싶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이제 젤칸은 말이 꼬일 정도로 취기가 올랐다.

“짐은 잠시 자리를 비울 테니, 여기서 기다리도록.”

황제의 말에 젤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권력이 어느 정도인지 카드란의 태도를 보며 깨달았다. 정말로 카드란이 자신을 총애한다고 생각했다.

술이 달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흥얼흥얼하다 주변에 남자와 부딪혔다.

“뭐야!”

술이 되자 연회장에서는 얌전히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주변에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난 젤칸이야!”

그는 그렇게 소리쳤다.

* * *

카드란은 잠시 작은 방에서 물을 축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지카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젤칸이 시끄럽습니다.”

레카린은 카드란이 당연히 젤칸을 막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드란은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시작이군.”

“설마 의도하신 겁니까?”

“여기 있는 이들에게 그 버릇이 나오면 그는 파멸이다.”

레카린은 그제야 카드란의 작전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그런데 황비 전하도 연회장을 나가셨습니다.”

레카린의 말에 카드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뭐라고?”

카드란의 목소리가 떨렸다.

또 무슨 일을 꾸미려고 나간 것일까. 자꾸만 그녀가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는 것이 짜증이 났다.

“어디로 갔지?”

“정원 쪽으로 걸어간 것을 확인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별일 없을 겁니다.”

“유이시엘은 실시간으로 감시해야 한다.”

유이시엘, 눈을 뗄 수 없다.

얌전히 있으면서 자신의 처지를 곱씹을 것이지 감히 어디를 간단 말인가.

그녀의 속셈을 알 수 없기에 더욱더 철저하게 감시해야 했다.

카드란은 얼른 걸었다. 정원 쪽으로 갔다고 하니 금방 찾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작은 소리가 들렸다.

「이곳으로 와.」

의문의 목소리를 들은 카드란은 멈칫했다.

「유이시엘이 젤칸을 만났어.」

순간 카드란의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 * *

유이시엘이 술에 취한 젤칸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그가 빈정거리며 유이시엘에게 말했다.

“어리석지. 황제 폐하의 곁에서 그런 일이나 당하고 말이야.”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이 남자가 술버릇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네가 그런 일만 안 했더라도!”

사실 젤칸의 전 부인이 그와의 결혼 생활을 힘들어했다. 그녀를 도와 이혼하게 해 준 것이 바로 유이시엘이었다. 젤칸은 술김에 그녀에게 빈정거렸다.

“차라리 내가 죽여 줄까?”

하지만 유이시엘은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성물의 보호를 받는다, 누군가가 물리적으로 상처를 입혀 자신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도 이 남자와 있는 건 싫다.

유이시엘은 광기에 번뜩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죽는 것이 내 마음대로 되나요? 어차피 죽지도 못하는 인생인데. 죽고 싶지만…….”

유이시엘은 젤칸을 보고 술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황제의 여자인 나에게 무례하게 대하지 마세요.”

“뭐?”

“당신의 이런 점을 그가 노리고 있어요.”

유이시엘의 경고에 젤칸은 씩씩거렸다.

“뭐라는 거야!”

젤칸이 유이시엘의 팔을 잡고 뭐라고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날 선 목소리가 들렸다.

“젤칸, 여기서 뭐 하는가.”

카드란의 소리가 들리자 유이시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젤칸을 보았다.

“감히 황비에게 무슨 짓을 하는 것이지?”

카드란은 그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황제의 여자를 건드리다니.”

“폐하, 저 여자는……!”

“게다가 성녀이기도 하지.”

그렇게 말하며 카드란은 젤칸의 팔을 발로 밟고 분노했다.

“성녀는 황제의 상징이다. 성녀를 건드리는 것은, 황제를 건드리는 것과 같다.”

레카린과 기첼이 숨을 죽인 채로 카드란 뒤에 섰다.

“젤칸을 지하 감옥에 가두어라.”

“알겠습니다.”

“폐, 폐하!”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이런 짓은 하지 말았어야지.”

기첼과 레카린은 젤칸을 끌고 갔다. 젤칸은 반항했지만 그들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한편 카드란은 남은 그녀를 보았다.

“이런 순간에까지 침착한 건 무슨 배짱이지?”

카드란이 질린 듯이 유이시엘을 보았다.

“죽지도 못하는 인생이라? 그대가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건 알았지만 정말로 지긋지긋해.”

“폐하.”

“무심한 것을 보면 정말로 짜증이 나거든.”

카드란은 그렇게 말하고 입술을 비죽 올렸다.

“맞아, 다른 이들이 그대를 죽일 방법은 거의 없지. 그러니 죽고 싶다면 내 앞으로 서서히 죽어 가도록 해.”

카드란의 목소리는 지독히 낮고 고요했다. 그만큼 그는 감정을 절제하고 있었다.

조용히 분노하던 그는 그녀의 목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내 손안에 그대의 사람이 있다는 걸 잊지 마.”

그는 그렇게 협박하다 유이시엘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녀가 타고 온 마차에 유이시엘을 밀어 넣었다.

“기첼이 그대를 궁으로 데려다줄 거다.”

카드란은 그렇게 말하고 문을 닫았다.

그가 떠나는 소리를 들으며 유이시엘은 그와 닿았던 손목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그곳이 뜨거운 것 같았다.

* * *

카드란은 기첼에게 유이시엘을 데려다줄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연회장 건물의 작은 방에서 분노를 다스렸다. 유이시엘 때문에 생긴 감정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유이시엘 로이체란, 너무 무심하지. 삶에 대한 의지가 없어 보이더군.”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조용히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레카린이 말을 붙여 왔다.

“류크가 몰락해서 삶의 의지를 놓은 걸까요?”

레카린은 그나마 이해하기 쉬운 대답을 놓았다. 그러자 카드란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게 가장 정답에 근접하겠군.”

아무런 감정이 없는 그녀를 볼 때마다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복수를 하는데도 유이시엘은 평온하고 무심했다. 절망을 하지 않고 분노하지도 않는다.

마치 자신이 하는 짓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듯 비웃는 것처럼 말이다.

거기에 죽고 싶다니, 누구 마음대로!

“레카린, 그만 세안을 데려다주어라.”

“알겠습니다.”

“그리고 호위 기사 중에서 입 무겁고 충성스러운 사람 하나 골라라. 유이시엘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감시하면서 호위해야 해.”

“하지만 누가 하려고 할까요?”

“할 만한 사람을 찾아. 그냥 형식상 데리고 다니는 호위 기사 말고 밀착해서 감시할 기사가 필요하다.”

“알겠습니다.”

레카린은 고개를 숙였다.

* * *

유이시엘은 기첼의 노골적인 반감이 어린 시선을 받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카드란이 분노했다.

그를 더는 자극하고 싶지 않았는데……자신의 태도가 그를 화나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오래전 모든 것을 내려놓았으니까.

삶에 대한 미련은 오래전부터 없었다.

「오늘 카드란이 나서지 않았으면 내가 카드란에게 실망했을 거야」

성물이 말을 걸었다.

“그건.”

「난 유이시엘이 위험에 빠지는 게 싫어」

유이시엘은 조용히 웃었다.

오늘은 늦은 시간까지 잠을 자지 못할 것 같았다.

유이시엘은 카드란을 생각하며 화장을 지우고 말간 얼굴로 다시 돌아왔다. 마음이 혼란스러워 정원에라도 갈 생각을 하던 차였다.

갑자기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폐하?”

유이시엘은 늦은 밤 들어온 남자, 카드란을 보고 놀랐다.

그의 몸에서 희미하게 와인 향이 났다.

“어딜 가려는 거지?”

“정원에요.”

“정원이라.”

그는 비틀린 미소를 짓더니 분노를 거두지 않고 폭발하듯 말했다.

“복수와 별개로 그대에겐 정말로 화가 치밀어 올라.”

그의 감정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유이시엘은 감정을 눌렀다.

그는 로이체란이 아니었어도 그녀를 싫어했을 거라고 말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 * *

황궁으로 돌아온 카드란은 와인을 찾았다. 몇 병을 마셔도 감정은 가라앉기는커녕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결국 격해진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유이시엘를 찾아왔다.

왜 그녀만 관련이 되면 이렇게 감정이 날뛰는 것일까.

방에서 민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이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 청색 머리카락이 빛났다. 거기에 보석보다 아름다운 파란 눈동자는 사람을 방심하게 하는, 그런 눈이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에게 고통받는 그녀가 보기 싫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