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정말인가?”
“폐하께서 직접 오시고…… 특별한 곳인가 봐요.”
그러자 카드란은 주먹을 쥐었다. 그는 금세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참고 있었다.
“뭐, 다시는 그곳에 가지 말도록. 거기에 가면 이성을 잃은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카드란은 싸늘한 말로 그녀에게 경고했다.
“알겠습니다.”
유이시엘은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 역시 카드란이 그곳을 주시한다면 갈 생각이 없었다.
그가 무엇인가를 떠올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러니 조심하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그런 일은 없도록 할게요.”
그녀는 한참 만에 이어 말했다. 카드란은 그 말을 듣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 역시 더 이상 추궁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 * *
화살이 날아가 토끼의 몸에 그대로 박혔다. 단번에 죽은 토끼는 힘을 잃었고 라젤란이 다가가 그것을 자루에 담았다.
사냥 대회라고 하지만 큰 것을 잡을 생각은 별로 없었다. 젊은 시절에야 상에 욕심을 내서 무리하게 사냥했지만 지금은 그저 가족들이 먹을 만한 것들만 사냥할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알고 있는 듯 지록스가 다가와 라젤란에게 물었다.
“토끼 고기는 딸이 좋아하죠.”
“우리 손녀딸과 같이 토끼를 먹어야겠군.”
“저도 그런 생각 했습니다.”
그들은 싱긋 웃으며 토끼를 보았다. 벌써 라젤란의 손녀를 생각하며 잡은 토끼가 10마리를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고 느낀 듯 라젤란과 지록스는 토끼만 찾고 있었다.
다음 사냥감인 새로운 토끼를 찾아 이동하던 중 지록스가 라젤란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왜 황비 전하를 만나러 간 걸까요?”
원래대로라면 카드란과 지록스는 같이 사냥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가 황비를 만나러 간다고 해서 라젤란과 같이 사냥을 하고 있었다.
“음, 아버지도 잘 모르시던데.”
라젤란은 가볍게 말하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냥 폐하의 어두운 부분을 황비 전하께서 건드린 것 같다는 짐작이네.”
라젤란의 말에 지록스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황비 전하의 속은 정말로 알 수 없어요.”
“그렇지.”
“저를 살려 주신 것도 누가 예상했을까요.”
“현 폐하가 승리할 수 있도록 곳곳에 손을 썼지.”
그렇게 말한 라젤란이 수염을 손으로 쓸었다.
“바라는 것도 없고.”
그렇게 말하다 라젤란은 싱긋 웃었다.
“나중에 모든 것을 알게 되면 폐하께서 분노하실 것 같구나.”
“……아버지?”
“뭐 말할 생각은 없다만.”
약속은 약속이니까.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다. 어떤 계기로 진실을 말하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럼 황제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잠시 생각하던 라젤란은 그냥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 * *
카드란은 팻말을 바라보다 숲 안으로 들어갔다. 긴 나무가 빽빽이 자란 이곳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거의 없었다.
그의 기억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어린 시절 기억은 필요한 부분만 남고 사라졌기에, 그의 삶은 여기서 시작된 거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분명하지.”
여기서 일어났을 때 밀려오는 슬픔과 아련함을 참을 수 없었다. 무엇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팠던 것은 기억이 났다.
이런 감각을 줄 수 있는 건 그 사람 말고 없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 그 사람, 과거의 그녀와 관련된 곳이기에 이 장소는 카드란에게 특별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들어오는 게 싫었기에 팻말을 설치했지만, 워낙 구석에 있는 곳이라 그 누구도 이 장소를 발견하지 못했다. 레카린과 기첼만이 여기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이곳을 금지로 지정한 이유는 잘 모르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곳을 유이시엘이 찾았다. 우연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목을 잡고 흔들고 싶군. 진실을 토하라고 밀어붙이고 싶어.”
카드란은 그렇게 말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협박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코넬이라든가…….”
기첼의 말에 레카린이 고개를 저었다.
“전에도 황비 전하께서 뭔가를 또 들고 나왔어. 그분에겐 숨겨진 패가 많아.”
레카린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유이시엘을 몰아세우기 위해 일을 꾸몄다. 그런데 유이시엘은 거래를 시도했다.
유이시엘은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또 짐작하지 못한 다른 것들을 가지고 있을지 몰랐다. 그녀가 가진 무기가 무엇인지 모르는데 함부로 행동할 수 없다.
자신이 일을 꾸며도 그녀가 새로운 뭔가를 가지고 올 테니까.
“레카린의 말이 맞다.”
카드란은 유이시엘이 준 목걸이를 떠올렸다.
“그냥 죽이는 건 어떨까요?”
기첼의 말에 레카린이 그의 이마에 군밤을 날렸다.
“새로운 성녀가 나와야지!”
“그건 그렇지만요.”
“그리고, 성녀를 죽인 황제는 없어.”
레카린과 기첼이 하는 이야기를 지켜보던 카드란은 자신의 기억이 시작된 곳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넓은 공터가 있는 이곳은 잠시 쉬기에 좋은 장소였다.
카드란은 레카린과 기첼이 보는 앞이었기에 감성에 젖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눈을 떴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의 감정이 밀려왔다.
벌써 오래된 일이지만, 그의 심장에는 그날의 느낌이 깊게 박혀 있었다.
* * *
화살이 날아가 박혔다. 멧돼지가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거대한 짐승을 한 번에 잡은 젤칸이 얼른 검을 들고 다가가 멧돼지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희열이 그를 훑고 갔다.
그는 전쟁터에서 사람의 목숨을 앗는 것을 즐겼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를 듣는 건 정말로 즐거웠다. 사냥을 하니 그때의 흥분이 다시 타오르는 것 같다.
오늘 사냥은 자신이 1등을 할 것 같다. 멧돼지까지 잡았으니 아무도 자신보다 사냥을 잘하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그럼 황제의 눈에 더 띄겠지.
“으아, 좋군.”
젤칸은 멧돼지를 포대 자루에 담으려다가 웃었다. 가만 생각하니 혼자서 멧돼지를 가지고 갈 수는 없었다.
“나란 놈은 대단하다니까.”
그는 사냥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받은 신호탄에 불을 붙였다. 신호탄은 하늘로 올라가 터졌다. 조금 뒤에 사람들이 걸어와 그가 잡은 멧돼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다시 사냥을 시작한 그는 이번에는 사슴을 잡았다.
그의 예상대로 젤칸이 사냥 대회 1등을 했다.
이제 젤칸은 주목을 받으며 연회장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카드란이 다가왔다.
“1등 축하하네.”
“폐, 폐하!”
젤칸은 얼른 카드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카드란은 그를 바라보며 웃었다.
“정말로 뛰어난 궁술 실력이야.”
뭐, 다른 것은 몰라도 무예 실력은 진짜니까. 카드란은 계획한 대로 그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아닙니다, 폐하.”
“그대는 항상 겸손해.”
젤칸은 카드란의 말에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웃었다. 황제가 이렇게 총애를 해 주니 헬몬 공작이 부럽지 않았다.
“짐이 오늘 첫술을 그대에게 주겠다.”
“영광입니다.”
황제가 이렇게 나오다니!
젤칸은 입가에 호선을 그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 * *
황제와 동행하던 라젤란은 카드란이 젤칸을 향해 가는 것을 보고 눈을 반짝거렸다. 그를 칭찬하고 치켜세우는 게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이었다.
‘오호.’
라젤란은 그들을 재미있는 눈으로 보았다.
젤칸이 술에 취하면 엉망이 되는 것을 황제도 알고 있다. 그런데 술을 준다는 말을 하다니.
라젤란은 카드란의 칼날이 젤칸을 향한 것을 눈치챘다.
카드란은 저런 남자다.
자신의 길에 방해가 된다면 그를 직접 처리하기보다 주변 상황을 이용해서 알아서 몰락하도록 일을 꾸민다.
젤칸은 계속 데려가기에 껄끄러운 면이 많은 사람이라 일찌감치 정리해 버리는 게 낫다. 그렇지만 공을 세웠기에 함부로 치울 수 없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진행될까.
오늘 연회가 기대가 되었다.
* * *
화려한 조명이 벽에 걸려 있었다. 사냥 대회를 축하하는 연회는 술이 더해지면서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다들 이야기를 하기 바빴지만 유이시엘은 홀로 벽에 섰다.
예전에는 늘 코넬이 곁에 있어 조잘거리고는 했는데,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홀로 있는 동안에 생각이 치고 올라왔다.
그녀의 시선이 황제인 카드란을 향했다가 곧 다시 돌아왔다.
세안과 같이 행복하게 있는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행복을 찾아가는 그를 바라보는 건 생각보다 힘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쭉 이어 온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는 정리해야 하는데……. 상처를 많이 받지 않으려면 버려야 하는 마음일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사라지지 않은 마음, 감정의 찌꺼기가 또다시 날뛰고 있었다.
모든 것을 그날 체념했지만 마음 한 자락이 여전히 남아 있다.
유이시엘은 말없이 물 잔을 내려놓았다.
이곳에 있자니 숨이 막혔다. 수많은 이들이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사냥의 여운을 즐기는 자리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았다.
자신을 보호하던 기사의 시선 역시 느슨해졌다. 술을 마시고 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잠시 나갔다 올게.”
유이시엘은 그들에게 말하고 연회장을 나왔다. 기사들 역시 그녀가 잠시 바람 쐬러 간다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딜 간다 해도 그녀는 오래가지 않아 돌아왔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