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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97)

14화

헬몬 공작은 로이체란 가문과 앙숙이었다. 명문가인 헬몬 가문에서는 전대 황제의 무능을 참지 못해 결국 카드란에게 손을 내밀었고, 카드란이 승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 공로로 헬몬 공작가의 위세가 더 강해졌다.

“헬몬 공작이라면…….”

카드란에게는 무척이나 필요한 인물이다. 그리고 헬몬 공작은 권력에 목숨을 거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당히 욕심을 부리고 물러설 줄 알았다.

“중요한 인물이지.”

현재 헬몬 공작의 이름은 라젤란, 라젤란 헬몬은 카드란을 어릴 적부터 눈여겨보았다고 말하며 그에게 먼저 접근했다. 전 황제에게 접근해 정보를 캐와 알려 준 것도 바로 그였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성녀 말인가?”

“네.”

기첼은 조용히 말했다.

“그냥 다 죽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레카린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성녀는 우리의 뜻으로 처리되는 존재가 아니잖아.”

“류크에게 받은 재산을 숨겼었다면서요?”

기첼은 혐오스러워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 고기에 그 수프잖아요.”

“그렇지.”

레카린은 유이시엘을 떠올렸다.

“뭐, 나름 냉정히 대하신다.”

“그 여자는 요물이에요.”

기첼은 유이시엘을 떠올렸다. 청색 머리카락이 물결치고 하늘색 눈동자가 신비롭다.

“수상한 여자라고요. 폐하를 살려 준 것도 그렇고요.”

유이시엘은 카드란을 구한 것이 아르찬의 명령이라고 말했지만 카드란의 수하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왜냐하면 카드란이 다쳤을 때, 아르찬은 그 편지를 읽고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다가 유이시엘이 직접 독대하고 난 뒤에야 카드란을 치료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그냥 두고 보자고.”

레카린의 말에 기첼은 투덜거렸다.

유이시엘을 죽여야 한다는 데에는 레카린도 동의했다.

류크는 전형적인 악당이라 파악하기가 쉽다. 그런데 유이시엘은 속을 아무도 몰랐다. 그렇기에 더 수상하고 위험했다.

“암살 시도라도 할까요?”

기첼의 말에 레카린은 고민이 하더니 기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럼 폐하께서 노하실 거다.”

“왜요?”

“폐하께서는 성녀를 통해 류크에게 복수하고 싶어 하시거든.”

레카린의 말이 맞다. 기첼은 잠시 숨을 푹 내쉬었다.

“……복수의 방법은 많은데.”

기첼은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 * *

라젤란 헬몬이 찾아왔다는 말을 들었을 때 카드란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맞이했다. 오늘 기첼이 올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를 먼저 들였다. 기첼도 이해해 줄 거라 생각하면서.

“군부가 빠르게 정리되고 있더군요.”

라젤란은 백발을 짧게 자르고 턱수염을 길렀다. 올해 60세가 넘은 그의 눈빛은 젊은 사람의 것과 비슷하게 생기가 넘쳤다. 라젤란은 젊은 황제를 바라보고 턱수염을 만지며 웃었다. 보라색 눈동자에는 감탄이 서려 있었다.

“그대가 도와준 덕분이지.”

카드란은 그의 공을 칭송했다.

나이가 들면 탐욕이 더 커지는데 라젤란은 그러지 않았다.

“뭐, 같은 배를 탄 것이죠.”

라젤란은 싱긋 웃었다. 카드란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유능했고 제법 괜찮은 황제였다. 그리고 그들의 수하 역시 일을 잘했다. 제국이 이제야 제대로 돌아간다는 생각을 했다.

“무슨 일로 온 건가?”

“사냥 대회를 연다고 해서 왔습니다.”

“아아…… 사냥을 할 건가?”

“아들을 귀족들에게 소개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라젤란은 의자에 앉아 차를 마셨다. 카드란은 설탕을 넣지 않은 쓴 커피를 마셨다.

“제 아들이 슬슬 공작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라젤란의 말에 카드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도 마중 나가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라젤란은 그 말에 만족했다. 황제가 친히 아들과 같이 사냥터에 간다면 헬몬 공작가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 주는 일이 될 것이다. 그는 수염을 문지르다 싱긋 웃었다.

“그리고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뭐지?”

“성녀님을 만나고 싶군요.”

그러자 카드란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이유는?”

“로이체란 가문이지만 저의 아들을 치료해 준 적이 있습니다.”

카드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랬군.”

“뭐 전전대 폐하의 명령이었지만요.”

라젤란은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알았다.”

카드란은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가 유이시엘을 만나는 것을 반대할 수는 없었다.

“그냥 인사만 하고 나올 테니 걱정 마십시오.”

“걱정 안 한다.”

“만나는 것을 내키지 않아 하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자 카드란이 고개를 숙였다.

“그거야 불편하지. 내 신하가 로이체란 가문 사람에게 호의를 가지는 것 같아서.”

“음, 호의라기보다는 동정입니다.”

“그래?”

“네.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폐하의 행동을 질책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알았다.”

카드란은 만나지 말라는 고집은 피우지 않았다. 그냥 라젤란은 인정이 많은 사람이니, 유이시엘을 안쓰럽게 여길 수도 있겠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유이시엘은 기도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보육원에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며 오지 말라고 하기에 요즘엔 기도만 마치고 바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그런데 방문 근처에 기사들이 있었다.

‘저 가문은?’

기사들 갑옷에 있는 문양을 보고 어떤 가문인지 알 수 있었다.

헬몬 공작이 왜 여기 온 걸까.

그녀가 방 앞에서 발을 멈추자 기사들이 고개를 숙였다. 유이시엘은 얼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햇살이 비치는 곳에 라젤란이 서 있었다.

유이시엘이 들어오자 그가 몸을 돌렸다.

“오랜만입니다, 성녀님. 아니, 이제 황비마마신가요?”

유이시엘은 문을 닫았다.

“여긴 어떤 일로 오신 건가요?”

“얼굴 한번 뵈러 온 것뿐입니다.”

유이시엘은 무심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이렇게 저를 보러 오시면 위험해져요.”

“압니다.”

“그런데 왜?”

그러자 라젤란이 턱에 난 수염을 문질렀다.

“개인적인 호기심이라고 해야 할까요?”

“공작께서 호기심 가지실 만한 게 없잖아요.”

“있죠.”

길게 자란 그의 수염 사이에서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유이시엘은 그가 뒤에 할 말이 무엇일지 두려웠다.

“폐하를 지원해 달라고 직접 부탁한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것이 저의 아들을 치료해 주는 조건이었죠.”

유이시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 말은…….”

“절대 하지 않았죠. 약속은 지킵니다.”

유이시엘은 안도했다.

“이대로 정말로 계실 겁니까?”

라젤란이 궁금한 건 이것인 듯했다.

“네.”

“폐하를 그토록 위하신 분인데.”

라젤란은 혀를 끌끌 찼다.

“제 손녀가 폐하께 청혼을 넣어 달랍니다.”

유이시엘은 라젤란의 손녀를 떠올렸다. 올해 20살. 무척이나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황후로요?”

“네.”

유이시엘의 얼굴이 떨렸다. 카드란이 다른 여자를 가까이하는 것에 초연해지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체념했는데.

과거의 잔재가 너무 많이 남아서 그런 거다.

“부탁이 있어요.”

유이시엘은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 혼인은 2년 뒤에 해 주었으면 해요.”

유이시엘은 자신에게 그나마 호의를 가진 그에게 말했다.

지에렌을 살리느라 생명력이 소진되고 있었다. 생명력은 3년 정도 남았지만 치료하다 보면 생명력이 점점 줄어들 것이다. 카드란도 자신의 생명력을 줄이겠다고 공언했으니 아마도 2년쯤 되면 자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테지.

라젤란은 고민을 하더니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말을 덧붙였다.

“그때 가면 성녀님은 세상에 없는 거군요.”

유이시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시잖아요, 성녀의 운명은 언제나 이런 거.”

“아아, 그렇지만 다른 성녀님들은 꽤 오래 사셨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고 유이시엘을 지나쳤다.

“성녀님은 황제 폐하를 위해 지나치게 힘을 많이 쓰셨죠. 그래서 저는 당신을 동정합니다.”

문을 닫고 나가는 그를 우두커니 바라보다 쓴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라젤란이 남몰래 친절을 베풀어 준 것을 알았다.

유이시엘은 의자에 앉았다.

자신이 죽고 나면 카드란은 아내를 맞이할 거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다른 이와 함께 살겠지.

유이시엘은 두 손으로 눈을 꾹 눌렀다.

〈널 버릴 수밖에 없어.〉

오래전, 기억이 잠시 돌아온 카드란은 울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어린 수많은 감정들을 떠올리며 유이시엘은 눈물을 흘렸다.

추억은 그녀를 잠시 과거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그냥 오랜만에 울고 싶었다.

* * *

기첼은 라젤란 헬몬이 황제의 집무실을 떠났다는 소식을 시종에게서 전해 듣고 얼른 카드란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자신의 주군,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 황제가 된 절대적인 존재가 창문 앞에 서 있었다.

카드란은 기첼이 들어온 소리를 들은 듯 몸을 돌렸다. 그를 보고 기첼이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폐하를 드디어 뵐 수 있게 되었군요.”

“오랜만이군, 북의 총사령관.”

카드란의 등 뒤로 태양이 내리쬐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그의 얼굴을 보니 인간이 아닌 듯 보였다. 기첼은 그에게 경외를 느끼고 고개를 숙였다.

“폐하, 섭섭합니다. 저의 이름을 불러 주십시오.”

“그래, 나의 왼팔 기첼.”

카드란은 소파로 걸어가 앉더니 서 있는 손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그만 앉도록 해.”

“감사합니다.”

기첼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시종이 들어와 찻잔을 놓고는 고개를 숙인 뒤 문을 닫고 도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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