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97)

7화

카드란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다리를 꼬고 커피 잔을 책상에 둔 그는 한동안 천장을 응시했다.

“폐하, 정말로 세안은 가짜 정부로만 이용하실 생각이십니까?”

레카린의 물음에 카드란이 눈을 뜨고 시선을 그에게로 향했다.

“그런 건 왜 묻지?”

“세안은 누구보다 정보를 많이 쥔 여자입니다. 권력을 탐할 여자도 아니고, 이렇게 된 거 그냥 진짜로 정부나 애인으로 두시는 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카드란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레카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여자는 필요 없어.”

“황제가 되셨어도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으시는군요.”

레카린은 한숨을 내쉬며 세안을 떠올렸다. 황제가 되고 나서도 금욕적인 카드란의 생활은 변함이 없었다.

카드란은 전쟁터에서도 여자를 안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오는 여자를 질색하며 멀리하기 일쑤였다.

카드란이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기에 레카린도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자 이야기만 하면 카드란은 안색이 변했다.

“나가 봐.”

카드란의 말에 레카린이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그런 뒤 카드란은 커피를 마시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둠이 밀려오면 언제나 생각나지 않는 과거가 어렴풋이 머릿속에 맴돈다.

어린 시절, 그를 행복하게 해 주었던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옆집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항상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인사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외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녀는 누구였을까. 누구이기에 커서도 이 기억만 떠올리면 슬프고 아련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일까.

어린 날의 추억을 잃어버린 그의 마음은 허무함으로 채워졌다. 헛헛한 마음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그를 잡아먹을 듯했다.

그리움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그대로 떠밀려 수장될 것만 같은, 강한 감정이었다.

기억 속의 아이를 찾고 싶었다.

이런 감정을 남겨 준, 기억이 나지 않은 그녀를 찾아 꼭 만나고 싶었다.

* * *

유이시엘은 오늘도 변함없이 지에렌을 치료하고 기도실로 걸어갔다. 곧 결혼한다는 것을 알지만 유이시엘은 따로 뭔가 준비하지는 않았다. 그냥 무심한 눈으로,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관조할 뿐이었다.

기도를 마치고 유이시엘은 기도실을 나왔다. 그런데 문 앞에서 자신을 시녀장인 누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유이시엘은 그녀가 온 이유가 짐작이 갔지만 일단은 물었다.

“내일이면 결혼식이지 않습니까? 준비를 따로 하셔야 합니다.”

누엘의 말에 유이시엘은 그 준비라는 게 무엇인지 알았다. 마사지와 피부 관리를 받는 등 황제를 맞이하기 전에 여자들이 으레 하는 일이다.

“전 아무것도 안 할 거예요.”

유이시엘의 말에 누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이시엘이 이런 말을 하리라고 예상은 했다. 황제 역시 쓸데없는 짓은 말라고 했지만 누엘은 그래도 예법을 차리고 싶었다.

형식적이라도 그녀에게 의사를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누엘은 유이시엘의 뜻을 존중했다.

“그런 거 말고 다른 게 필요해요.”

유이시엘의 말에 누엘의 눈에 궁금증이 어렸다. 유이시엘이 필요한 게 무엇일까, 무심한 그녀가 바라는 게 있다는 점이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다.

유이시엘이 누엘에게 나직이 제 의견을 전했다. 그러자 누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측은한 눈으로 바라본 누엘은 꼭 원하는 걸 마련해 주겠다고 했다.

“꼭 필요해요.”

유이시엘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했다. 유이시엘의 마음이 이해가 되어서 누엘은 씁쓸해졌다.

유이시엘의 판단은 어쩌면 꽤 현명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 * *

금으로 수를 놓은 옷을 본 카드란이 무심결에 말했다.

“화려하군.”

“형식적인 결혼이라 해도 지킬 건 지켜야죠.”

슈렌은 내키지 않아 하는 카드란을 향해 말했다. 카드란은 그들의 말에 일단 제 앞에 내밀어진 옷을 입었다.

치수는 완벽하게 맞았다. 딱 맞아떨어지는 옷을 본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이 결혼이 불편하긴 한 듯하다.”

오늘 아침, 어머니가 죽는 순간을 꿈꿨다.

처절했던 악몽의 순간을 떠올린 그는 쓰게 웃으면서 옷이 만족스럽다고 슈렌에게 말했다. 어차피 결혼식이 내일이라 수정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카드란이 결혼식 복장을 그대로 입고 어디로 나가려고 하자 슈렌이 물었다.

“옷은 안 갈아입으십니까?”

“갈 곳이 있다.”

그리고 그는 방을 나갔다.

* * *

카드란은 황제궁을 나와 바로 말을 타고 서쪽 탑으로 갔다. 대대로 죄수들을 유폐해 놓는 이곳은 오로지 황제에게 허락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진 숲을 지나 그 끝에 있는 탑의 입구에 도착한 그는 말에서 내렸다. 탑에 황제가 나타나자 다들 놀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류크는 잘 지내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철저히 감시하고 있습니다.”

간수의 말이 만족스러웠다. 카드란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곳은 류크가 갇혀 있었다.

늘 화려하게 살던 이가 이런 초라한 곳에 왔다. 과연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을까.

가장 꼭대기 층에 올라간 그가 철문을 열었다. 북쪽 탑의 가장 은밀한 방에 류크가 갇혀 있었다.

카드란은 철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 쇠창살 사이로 보이는 류크를 관찰했다. 쇠창살 옆에 있는 램프의 불에 의지해 류크가 바닥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저렇게 먹는 것을 봐서 당장 죽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가 죽는다면 복수를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오랜만이군.”

카드란의 소리에 류크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서 무슨 일이십니까?”

류크가 빈정거리며 일어났다.

“한 가지 소식을 알려 주려고. 성녀가 곧 결혼한다.”

“……뭐라고요?”

류크는 놀랐다.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카드란의 옷차림을 보았다. 딱 봐도 결혼식을 앞둔 신랑의 옷차림이었다.

“그대가 늘 천하다고 말하던 남자하고 말이야.”

안색이 점점 달아오르더니 그가 카드란을 노려보았다. 카드란의 속셈을 알아차린 듯 얼굴이 일그러졌다.

카드란은 미소를 지으며 쇠창살을 잡았다.

“그 아이가 당신에게 어울립니까!”

“어울릴지 안 어울리는지는 내가 결정해. 짐이 유이시엘을 총애해 줄 것이다.”

“뭐라고요?”

“총애해 주겠다고 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그가 분노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늘 꾸었던 꿈이 떠올라 카드란의 눈동자에 과거의 무력감과 분노가 머물렀다. 깊고 어두운 증오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류크의 목을 조를 것 같았다. 아니, 카드란 자신의 숨을 막고 있었다.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해 낸 카드란는 이를 악물었다.

복수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앞으로 이들에게 해 줄 일이 아주 많았다.

결혼식은 내일이었다.

내일이면 유이시엘이 상처를 입고 류크를 원망할 것이었다.

* * *

결혼식 당일이 되었다. 유이시엘은 자신 앞에 놓인 옷을 바라보았다. 하얀색에 단정한 느낌의 옷이었다. 입기를 머뭇거리는 유이시엘에게 시녀들이 꾸밀 것을 권하자 그녀는 결국 화장을 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청색 머리카락을 시녀들이 컬로 말고는 아래로 늘어뜨렸다. 파란 눈동자에 분홍색 눈 화장을 하고 은은하게 가루를 뿌렸다. 입술은 붉게 칠하고, 얼굴 전체적으로는 화장을 입체적으로 발라 코를 높아 보이게 했다.

그냥 수수하게 입고 다녀도 아름다운데 화장을 해 두고 나니 눈이 부셨다. 누엘은 그녀의 외모에 감탄했다. 역대 성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유이시엘이 아닌가. 왜 그런 명성을 얻었는지 알 만했다.

결혼식 옷을 다 입고 준비를 마친 유이시엘은 누엘을 따라갔다.

유이시엘은 손가락을 꾹 눌렀다.

결혼식 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과연 그렇게 될까.

의문이 들었지만 결혼식에는 가야 한다. 자신에게는 거부권이 없었다.

화려한 불빛이 반짝거리는 결혼식장에는 카드란이 서 있었다. 그는 검은 예장을 입고 짧은 머리카락에 관을 썼다. 가슴에도 장신구를 달았는데 그 장신구가 눈에 들어왔다.

유이시엘의 목에서는 청색 목걸이가 반짝거렸다. 대대로 황비가 착용하던 목걸이로, 결혼식 날 차는 게 관례였다.

‘하고 싶지 않지만…….’

카드란이 목걸이에 손을 대지는 않을 것이다.

유이시엘은 천천히 걸어가 그의 앞에 섰다. 장갑을 낀 손을 카드란에게 내밀자 카드란이 그녀의 손을 잡고 버진 로드를 밟았다.

황비의 결혼식은 황후의 결혼식과 달리 주례가 없다. 버진 로드 끝에 가서 서로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고 끝난다. 황제가 반지를 주고받는 건 오로지 황후뿐이었다.

카드란은 대귀족들도 초대된 자리에서 결혼식을 마쳤다.

그러고 다들 바로 피로연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유이시엘과 카드란은 당연히 피로연장에서 서로 떨어져 있었다. 카드란은 수하들과 이야기했고, 유이시엘은 혼자서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 서 있었다. 결혼을 했지만 그들은 절대로 서로를 보지 않았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말이다.

그때, 문이 열리며 화려한 옷차림을 한 여자가 들어왔다. 노골적으로 가슴이 파인 야한 의상을 걸친 그 여자는 귀족들을 향해 싱긋 웃었다.

“저 사람은……?”

“세안인데?”

“무슨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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