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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2/97)

2화

“저예요, 유이시엘.”

“성녀군.”

유이시엘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손수건을 그에게 내밀었다.

“닦아요.”

그러자 카드란이 유이시엘의 손수건을 바라보다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필요 없다.”

그는 유이시엘의 호의를 거절했다. 차가운 그의 눈동자엔 혐오가 짙게 깔려 있었다.

그런 카드란의 눈빛을 보자 손이 떨렸다. 그가 거부했지만 유이시엘은 말없이 카드란에게 손수건을 쥐여 주었다.

“돌려주지 말아요.”

그렇게 말한 뒤 그녀는 카드란이 손수건을 버릴 것을 상상하며 도망쳤다. 그 모습을 직접 보고 싶지 않았기에.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야 유이시엘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란.”

카드란의 애칭을 부르며 유이시엘은 이를 악물었다.

“정말로 나를 잊었구나.”

기억을 잃고 나면 추억은 모두 다 죽어 버린다고 했다. 혼자 기억하는 추억은 그녀에게 서글픔만 남길 거라고 오라버니인 지에렌이 말했었다.

유이시엘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도망치자.〉

그런 카드란의 제안을 따를 수 없었다.

자신이 도망치면 성물은 도망친 성녀와 함께 도망친 사람을 모두 죽인다. 그것이 성녀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카드란의 기억을 봉인한 뒤 성물의 힘으로 그를 죽이려는 류크로부터 도망치게 했다.

그런 그녀에게 남은 것은 기억을 잃고 자신마저 증오하는 카드란이었다.

“많이 아파…….”

그렇게 읊조리며 유이시엘은 가슴을 꾹 눌렀다. 마음속에서 터진 감정이 하나둘씩 그녀의 눈가로 모여들었다.

지금은 조금 울고 싶었다.

* * *

그렇게 5년이 지났다.

류크의 은근한 무시와 카드란의 차가움으로 그녀는 웃음을 잃었다. 그리고 카드란이 전쟁터로 떠나면서 유이시엘의 감정은 더 메말라 갔다.

그런 와중에 오늘 들은 소식으로 인해 무심한 유이시엘의 표정에 금이 갔다. 그만큼 큰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렇다.”

황제인 아르찬이 그녀에게 서신을 읽어 주며 말했다.

“카드란이 다쳤다고 한다.”

“얼마나요?”

“사경을 헤맨다고 하는군.”

유이시엘은 가슴이 떨어질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그가 죽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주먹을 몇 번이고 쥐던 그녀가 아르첸에게 물었다.

“구하실 건가요?”

“못 구한다. 너무 멀어.”

아르첸은 전쟁에 참가한 카드란을 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물의 존재가 그녀의 머릿속에 메시지를 보냈다. 성물이 이렇게 보내는 소리는 오로지 그녀만이 들을 수 있었다.

성물의 존재는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성물의 존재가 가끔 현신하거나, 성녀에게 말을 걸어서 이 존재의 유무를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성녀가 성물의 메시지를 듣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유이시엘은 성물의 메시지에 집중했다.

「이전에도 했던 방법이야. 비슷한 상황은 있었어. 살리는 게 불가능한 게 아닌 것은 알잖아, 유이시엘.」

성물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나직이 가르쳐 주었다.

「너의 생명력을 많이 소모해야 하겠지만.」

성물의 힘을 사용하려면 성녀의 생명력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역대 황제들은 성녀가 성물을 너무 많이 사용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전에도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 가능했어요.”

유이시엘은 아르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살리게 해 주세요.”

황제의 허락이 있어야만 그를 치료할 수 있다.

“불가하다. 그곳까지 어떻게 간단 말이냐! 너로서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야.”

“그가 없으면 살고 싶지 않아요.”

자신을 원망하는 눈으로 본다 해도, 그는 여전히 유이시엘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삶의 의미였다.

“카드란은 이미 죽었을지 모른다.”

그의 말이 맞다. 수도에서 전쟁터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2주. 하지만 전서구가 날아오는 데 이미 3일을 허비했으니, 그가 어떻게 되었을지 몰랐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유이시엘은 결연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굳은 의지를 본 아르찬은 눈을 감았다.

“카드란은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너는 아직도 그토록 그 아이를 위하는구나.”

아르찬은 안타까워하는 눈을 하고 결국 치료를 허락했다.

* * *

「한 명을 옮기는 것과 여러 명을 옮기는 건 다른 일이야.」

그곳까지 함께 갈 기사는 빠르게 정한 아르첸이 고마웠다. 그런데 성물이 마지막으로 경고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대규모의 공간 이동은 생명력 대부분을 앗아 가.」

“상관없어요.”

자신은 이전에 류크에게서 카드란을 구하기 위해 그를 공간 이동 시켰다. 그때도 많은 생명력을 소모했다. 이번엔 그때보다 더 많은 생명력을 소모할 거라고 성물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이시엘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황궁에서 그녀는 기사들과 함께 성물의 힘을 사용했다. 그녀를 중심으로 푸른 기운이 넘실거렸다.

유이시엘은 눈을 감았다 떴다.

순식간에 전쟁터의 막사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카드란은 중상이었기에 병상이 아니라 병원에 있다고 했다.

기사들은 마차를 태워 그녀를 곧바로 카드란이 있는 곳으로 보냈다.

* * *

전쟁터에 차갑고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바람을 맞고 병원으로 들어가 카드란이 있는 병실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카드란은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상처를 치료하고 붕대를 감아 둔 곳이 눈에 띄었지만, 부상이 워낙 출혈이 심해 목숨이 위태로웠다.

이대로 가면 죽는다.

유이시엘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모두 나가 주세요.”

그녀의 말에 카드란의 수하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며 머뭇거렸지만 유이시엘이 물끄러미 물러나라는 눈빛을 보내자 하는 수 없이 다들 나갔다.

유이시엘은 손을 움직여 카드란의 상처 부근에 손을 댔다. 강한 빛이 생겨나면서 상처가 천천히 치료되었다.

이 정도 부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숨소리가 안정을 찾자 유이시엘은 안도했다.

단지 그의 눈뜬 모습을 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안타까웠을 뿐이었다.

‘나의 란…….’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이제 자신의 란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를 보면 과거의 추억에 잠기고는 했다.

유이시엘은 카드란이 깨어날 때까지만 곁에 있고 싶었다. 그와 이렇게 단둘이 있는 게 평생의 마지막일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카드란이 생각보다 눈을 빨리 떴다는 점이었다.

“……!”

예기치 못한 때에 눈이 마주치자 유이시엘은 순간적으로 동요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빨리 깨어난 이유는 성력을 쏟아부어 치료를 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왜 여기 있냐고 묻는 듯한 냉담한 눈빛의 카드란을 보며 유이시엘은 애틋한 감정을 최대한 감추고 그에게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위급하다고 해서 폐하의 명령으로 치료하러 왔어요.”

“…….”

하지만 감정이 울컥 치고 올라와 목소리가 무척이나 떨렸다. 더 이상 말을 이었다가는 카드란이 이상함을 눈치챌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이시엘은 서둘러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카드란이 그녀의 팔목을 잡았다.

“유엘.”

……익숙한 이름이 들렸다.

어렸을 적 카드란이 유이시엘은 너무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며, 유엘이라고 자신을 불렀던 것이 떠올랐다.

도대체 왜?

분명 기억을 봉인했을 텐데.

“내가 도대체…….”

카드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는 기억을 잃고 유이시엘에게 했던 짓을 떠올렸다.

공식석상에서 유이시엘과 같이한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녀를 무시하고 차갑게 대했다. 증오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를 싫어했던 감정이 밀려와 카드란이 혼란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도대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는 고개를 숙이고 스스로에게 조용히 분노했다.

「일시적으로 되찾은 거야.」

성물이 말을 걸었다.

「곧 다시 봉인될 거다.」

그 말에 유이시엘은 안심하고 잠시나마 카드란의 손을 꼭 잡았다.

“그건 란의 잘못이 아니에요.”

이렇게 말하지만 그에게 상처받은 게 많았다. 유이시엘은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그래도 기억을 찾은 카드란이 미안해해 줬고, 화를 내고 있었다.

그것이 왜 이리 슬프면서 위안이 되는 것일까.

“내가 잘못한 거예요. 내가 란에게 나쁜 짓을 해서 란이 이렇게 된 거잖아요.”

유이시엘의 말에 카드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받은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

그 말은 맞다. 훅 치고 들어온 그의 말에 유이시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이런 것은 반칙이잖아.

“유엘…… 내 기억, 다시 사라져?”

“슬프게도, 그럴 거예요.”

“난 복수를 할 거야. 예전처럼 유엘과 도망칠 수 없어. 널 버릴 수밖에 없어.”

유이시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의 대상에는 너도 포함되어 있어. 기억을 잃은 내가 잔인하게 굴지도 몰라. 그러니 지금 죽게 내버려 두지 그랬어.”

그가 죽어 버리면 자신은 어찌될까.

그런 세상에서 견딜 수 있을까…….

“그래도 란이 없는 세계에선 살 수 없어요.”

“유엘.”

“오늘 일은 잊으세요.”

“……너를 선택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 말을 끝으로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기억을 잃은 카드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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