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1부 -
프롤로그
소년은 소녀와 도망치길 원했다. 하지만 소녀는 이대로 가면 소년이 위험했기에 도망치는 대신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마도구로 자신과 관련된 소년의 기억을 봉인했다.
〈안녕.〉
소녀는 소년에게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날이 왔다.
마차 안에서 소녀는 무심한 눈으로 창문 밖을 바라보다 맞은편의 남자가 욕지거리를 내뱉자 시선을 살짝 돌렸다.
오늘은 황제가 사생아를 정식 황자로 들이는 날이었다. 사생아가 황태자보다 나이가 많았기에 황태자의 외가인 로이체란 가문에서 반대가 심했지만 황제는 자신의 힘으로 밀어붙였다.
“천한 황자 녀석 따위, 그 얼굴을 봐야 한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황제가 앞에서 버티고 있지만 않았어도 진작 죽였을 텐데.”
류크 로이체란, 황태자의 외삼촌인 그는 황제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은 것에 아직도 분노했다.
그런 류크를 소녀, 유이시엘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검은 단발에 갈색 눈의 그는 인상이 순하고 단정했다. 물론 성격은 더럽고 포악했지만. 사람의 외모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을 그녀는 일찌감치 큰아버지인 류크 로이체란을 통해 배웠다.
그때였다.
“이게 다 유이시엘, 너 때문이다.”
류크의 날카로운 시선이 유이시엘을 향했다. 그가 이런 눈빛을 할 때면 그녀에게 폭력을 휘두르고는 했다. 하지만 유이시엘은 긴장하지 않고 싱긋 웃으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전처럼 매질하실 건가요?”
“뭐라고?”
“오늘부터 제가 황궁에서 머무는 건 아시죠?”
유이시엘의 말에 류크가 입을 다물었다.
록센나 제국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성물이 있다. 기이한 힘을 내는 그 성물을 이용하면 사람을 치료할 수 있었는데, 성물의 힘을 이끌어 내는 사람을 성녀라고 불렀다.
그런 성녀를 처벌하는 것은 황제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류크는 그와 상관없이 성녀인 유이시엘에게 벌을 내리다가 황제에게 들켜 버렸다. 그에 황제가 유이시엘을 황궁에 머물도록 명령한 것이었다.
“성물의 힘으로 그놈을 도망치게 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얼마 전 류크는 유이시엘을 이용해 실제로 황제의 사생아를 죽이려고 했다. 그때 유이시엘이 성물의 힘을 사용해 그를 도망치게 하자, 황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사생아를 황자로 삼고 이번 연회를 열게 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유이시엘의 생각대로이긴 했지만.
유이시엘은 창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청색 머리카락을 귀에 살짝 걸고 하얀 피부와 잘 어울리는 하늘색 드레스를 입었다. 그리고 파란 눈동자와 비슷한 귀걸이를 착용했다. 귀걸이가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오늘 자신은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류크가 오늘 연회장에서 자신과 같이 있으라고 대대적으로 꾸몄으니까.
‘이런 것 따위.’
자신을 무시하고 천대하면서, 유이시엘이 성녀가 되고 나서부터는 대외적으로 자신의 뭐라도 되는 양 유세를 떠는 류크의 존재가 정말로 싫었다.
일단 자신을 이런 놈의 손아귀에 넘긴 어머니가 가장 짜증 나고, 그다음이 류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류크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럼 류크가 유이시엘의 오라버니인 지에렌을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연회장에서 절 에스코트해 주신다고 하셨죠?”
유이시엘이 확인차 묻자 류크가 한쪽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너 따위가 내 에스코트를 받을 자격은 없지만, 성녀니까 참는 것이다.”
그다운 말이었다. 유이시엘은 말없이 웃고는 다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류크가 그토록 싫어하는 사생아의 이름은 카드란 엘리시아 록센나. 짧은 금발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를 지닌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유이시엘의 연인이기도 했다.
“그나저나 오늘 연회는 재미있겠군. 그놈이 자신의 연인이 성녀인 데다 로이체란 가문의 사람인 것을 알면 얼마나 경악할까.”
카드란의 어머니는 류크가 죽였다. 카드란은 그가 원수인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무척이나 증오하고 있었다.
유이시엘이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아직 류크는 카드란이 기억을 잃은 것을 모르지만, 알게 된다면 아마도 폭발하듯 화를 낼 것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제 황제가 지켜보고 있기에 예전처럼 건드리지는 못했다.
문제는 카드란이었다.
‘나도 싫어하겠지.’
카드란은 이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기억을 봉인했기에 바라본다 해도 이쪽을 싸늘한 눈으로 볼 것이 분명했다.
‘하아.’
그는 언제나 다정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주고는 했다.
그랬던 그의 차가운 눈빛이라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무조건 견뎌야 해.’
유이시엘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속삭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 * *
연회장에는 이미 많은 귀족들이 와 있었다. 황제의 숨겨진 아들이 있다는 사실에 다들 궁금증을 안고 이번 연회에 참석한 듯했다.
유이시엘은 류크와 팔짱을 끼고 연회장을 천천히 걸었다.
샹들리에가 천장 곳곳에 매달려 있었다. 천장에 그려진 화려한 무늬가 건물을 아름답게 치장했다.
램프에서 노란색 빛이 나와 연회장을 밝혔고, 사람들은 조명 아래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성녀님이 류크 로이체란 님하고 같이 오다니.”
“류크 님이 성녀님을 총애한다는 게 사실인가 봐요.”
“하긴 공식석상에서 무척이나 아낀다고 말씀하셨었죠.”
다들 웅성웅성 떠드는 말소리에 그녀가 실소를 머금었다. 류크와 닿은 손이 썩어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정말로 불쾌하고 싫은 감각이었다.
다른 이들은 이런 자신의 마음을 모를 것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듣다가는 정신도 같이 망가질 것 같았다. 유이시엘은 주변에 관심을 끊었다.
“황제 폐하 납십니다.”
카드란의 아버지인 아르찬 엘리시아 록센나가 등장했다. 금발을 단발로 자르고 콧수염을 기른 그는 중년의 나이였지만 무척이나 수려하게 생긴 남자였다.
그리고 아르찬의 옆에는 그를 쏙 빼닮은 소년이 있었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선명한 붉은 눈동자를 지닌 소년, 카드란이었다. 연회장에 어울리는 황금색 예장을 한 채 나타난 그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러고 보니.’
황태자 로윤은 몸이 좋지 않아서 오지 않았다고 했다.
‘차라리 잘된 일인지도.’
그는 카드란의 존재를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었으니 카드란에게 좋은 말은 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류크가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카드란에게 다가가기에 유이시엘도 같이 걸어갔다.
심장이 뛰었다.
드디어 기억을 잃은 카드란과의 첫 대면이었다.
카드란의 시선이 류크와 자신을 향했다.
“황자 전하를 뵈옵니다. 전 류크 로이체란이고, 이쪽은 성녀이자 제가 아끼는 조카인 유이시엘 로이체란입니다.”
류크가 웃으면서 인사를 했고 유이시엘 역시 떨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카드란의 눈동자에 뜨거운 감정이 스쳤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누르고 류크와 자신을 바라보다 황제와 함께 다른 곳으로 걸어가 버렸다.
순간적으로 그의 눈에 비친 감정이 너무나도 차갑고 날카로워 유이시엘은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어째서?”
그런데 류크는 카드란이 유이시엘을 그냥 지나가자 당황했다.
그는 얼른 유이시엘에게 분노하며 속삭였다. 그녀가 무슨 짓을 벌였다고 확신하는 듯했다.
“도대체 너는……!”
“그저 기억을 손 좀 봤을 뿐이에요.”
류크는 가문의 마도구에 대해 모른다. 그 존재를 아는 것은 오로지 자신과 로이체란의 가주가 될, 오라버니 지에렌뿐이다. 유이시엘의 말에 류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집에 가서 보자.”
“아니요, 전 오늘부터 황궁에서 지내요. 잊으신 것 아니시죠?”
류크는 평소처럼 감정을 참지 못하고 손을 자신의 어깨에 올리더니 어깨를 꽉 누르며 이를 갈았다. 대외적으로 자신과 사이가 좋아 보여야 하니 공식석상에서는 뭐라고 하지 못했다. 그래서 조용히 경고하고 있었다.
자신을 학대하던 그에게 한 방 먹인 것 같았지만 속이 시원하진 않았다.
그저 방금 전, 카드란의 감정을 억누르던 눈빛만이 기억 속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 * *
유이시엘은 류크와 있으니 정신이 피폐해지는 것 같았다. 그의 손을 잡기 싫었고,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행히 이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기에 류크를 두고 정원으로 나왔다.
밤의 기운이 정원에 머물러 있었다. 꽃들이 아름답게 피었기에 유이시엘의 마음도 조금 나아졌다.
그렇게 하얀 꽃, 노란 꽃, 파란 꽃을 바라보며 걷는데 갑자기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같이 천한 녀석을 형이라고 인정할 것 같아?”
날카로운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황태자의 자질이 전혀 없는데 로이체란 가문의 힘으로 황태자가 된 로윤이었다. 아프다고 하더니 결국은 온 모양이었다.
유이시엘은 소리가 난 곳으로 걸어갔다.
하필이면 그녀가 도착했을 때 로윤이 카드란의 머리에 음료수를 붓고 있었다.
“사생아 주제에.”
어찌 류크와 말투까지 똑같을까.
하지만 모욕을 받은 카드란은 말없이 로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 건방져.”
그에 불쾌해진 로윤이 그의 다리를 차고 침을 뱉은 뒤 사라졌다. 로윤의 발길질에 바닥에 잠시 주저앉은 카드란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감정을 다스려 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다 문득 카드란이 유이시엘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누구냐?”
카드란은 감각이 예민했다. 자신이 온 것을 벌써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나무 뒤에서 나와 카드란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