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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100)화 (100/100)

100화

입술만 깨문 게 아니라 눈시울도 뜨거워졌다. 바보 같은 세완은 깜짝 놀라 왜 그러냐며 그녀에게 다그치듯 캐물었다.

이은이 세완에게 말했다.

“고마워.”

그러고 보니 아직 감사의 인사도 못 했다.

백희경의 집까지 갔다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그녀를 구하러 왔다던가? 

이은은 그가 그녀를 구해 줘서 고마웠다.

“정말 고마워.”

세완의 세상은 김이은을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이은은 25년 내내 그녀가 혼자라는 것을 느끼지 않아도 됐다.

엄마에게 버림받은 뒤, 채 울지도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서 울어 주던 그 어느 날부터 이세완이라는 순진한 도련님은 25년에 걸쳐 그녀를 보호해 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이은은 백희경에게 목이 졸리던 그 상황에 오직 세완만 생각났다.

당연히 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야 한다고 믿었는데 그녀의 생각보다 이세완은 김이은의 인생에 훨씬 큰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은은 세완을 향해 뜨거운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한편, 세완은 이은의 감사가 어째 불안했다. 그동안 워낙 당한 것이 많아서일까?

“야, 왜 그래? 나 또 뭐 잘못했어? 일단 미안해. 무조건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은의 의심처럼 정말 마조히스트인지 그는 그녀의 감사 인사를 순순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세완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이은을 바라보았다. 참 예쁜데 이럴 땐 조금 무서웠다.

세상 그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는데 세완은 어째서인지 김이은 앞에서는 항상 작아졌다. 그리고 포식자 앞의 피식자처럼 많이 두려웠다.

세완이 어떤 말로 이은을 달래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세완아!”

갑자기 이은이 그를 불렀다.

“응, 왜?”

세완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대답했다.

지나치게 즉각적인 그의 반응을 보고 찬주가 그랬다. 시골 똥개도 너처럼 주인님한테 충성하진 않을 거라고.

하지만 그게 뭐? 왜? 뭐?

어차피 멍멍이와 개목걸이, 혹은 문제견과 개 조련사의 관계인데 여기서 조금 더 납작 엎드린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 회장이 그랬다. 인생 전반을 꿰뚫는 목표가 있는 남자라면 자존심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또 한마디를 더 했다.

정말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자존심 같은 것 챙기는 거 아니라고.

물론 김이은은 아직 그의 마음 같은 건 모를 거다. 하지만 옆에서 이렇게 입 안의 혀처럼 굴다 보면 조금은 그를 알아 주지 않을까?

세완이 얄팍하니 속이 훤히 보이도록 계산기를 두드렸다.

인생은 길게 가는 거다. 이은이 윤세를 좋아하면 뭐 어때? 결혼만 그와 함께 하면 된다.

10년 기다려서 70년 함께 살면 그게 남는 장사지 다른 게 남는 장산가?

공부도 못 하고 일도 못 하고 말도 더럽게 안 듣는다고 이 회장에게 온갖 구박은 다 받고 자란 세완이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은 다 배웠다.

세완은 김이은이라는 목표를 향해 백년대계를 세울 계산을 했다. 그가 어떻게 윤세와 이은의 사이를 방해해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넌 내가 왜 좋니?”

“……!”

이은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세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니, 아니, 누가 그래? 내가 너 좋아한다고! 아니, 그렇다고 싫다는 건 아닌데, 그건 아닌데……. 그냥!”

세완이 말을 더듬었다. 당황한 데다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것을 못 해서 그런지 눈가에 눈물까지 맺혔다.

눈에 띄는 미남이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완이가 마조히스트가 아니라 내가 사디스트였나?

이은이 고민했다.

단 한 번도 그런 고민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세완이 우는 모습이 이렇게 예뻐 보이나 모르겠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입을 열었다.

“연애만 하는 거면 괜찮아. 비밀 유지는 당연한 거고.”

“……?”

“고민 끝나면 얘기해. 반지 사이즈는 11호고, 오래는 못 기다려.”

이은이 먼저 고백해 버렸다.

세완은 바보처럼 큰 눈을 데굴거렸다. 그리고 이내 그의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

그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정말이지 표정 하나는 지독하게 솔직했다.

“나 이제 잘 거니까 나가 봐.”

세완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며 이은이 말했다.

여기까지 떠먹여 줬으면 그다음은 네가 알아서 해야지!

이은은 우아하게 먼지 털 듯 세완을 내보냈다. 아니, 내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 먼지가 제 마음대로 다시 데구루루 굴러들어 왔다.

“야, 정말이야? 정말이지? 이은아, 정말이야? 내가, 사실 다른 건 없는데, 뭐 제가 받아 준다니 사귀어 주기는 할게.”

“윤세 씨 부를까?”

“……몇 캐럿을 원해? 나 이번에 암호화폐로 돈 많이 벌었어.”

사람 참 투명하기는.

하지만 투명하긴 해도 속은 시커멨다.

“이은아, 그럼 이번 기회에 이 팀장 해고하는 건 어때? 이제 백희경도 잡았잖아. 해고 좋다, 해고! 아니면 그냥 지사 발령 낼까? 어디 아프리카 같은 곳으로.”

세완은 한국과 비행기가 잘 오가지 않는 아무 먼 나라 이름들을 하나씩 읊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그녀가 처음 들어본 나라도 있었다.

“거긴 또 어디야?”

“남아공의 옆에, 옆에, 옆에, 옆에.”

직항 비행기는 없고, 경유 3회, 가는 데 총 스무 시간 걸린다고 했다.

“거기가 너무 멀면 여긴 어때? 오만이라고 서남아시아의 아라비아반도 동쪽 끝에 있는 나라의 옆에, 옆에, 옆에 있는 나라인데 여기도 직항은 없어. 경유는 한 다섯 번 하나? 비행시간은 열아홉 시간.”

아프리카보다는 그래도 같은 아시아라고, 서남아시아 쪽이 좀 더 낫지 않겠느냐며 세완이 그를 생각해 주는 척 말했다.

하지만 이쯤 되면 알 수밖에 없었다. 세완은 윤세를 옆에 두고 볼 마음이 아예 없었다.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나는 이윤세 씨가 그냥 한국에서 근무하셨으면 좋겠다만?”

“……그럼 부산은 어때? 아, 제주도 좋다. 제주도! 우도!”

얘는 섬이 지긋지긋하지도 않나, 왜 자꾸 사람을 섬으로 보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이은이 그를 향해 눈을 흘겼다.

세완은 모르지만 윤세는 그래도 세완을 위해 그녀를 설득하려고 했다.

“아니, 조건 말고 마음 말입니다.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난 그걸 물었던 거 같은데요?”

“아까 그 남자는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 같던데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고, 험한 꼴도 볼 수 있을 만큼 본 것 같은데 윤세는 참 의외의 구석에서 순진한 남자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그녀가 윤세처럼 생각하고 말았다. 그냥 마음이 끌리는 대로 가 보자고.

물론 이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욕할 거다. 가진 것 없는 고아 주제에 몸 하나로 남자 홀렸다고.

그러나 삶의 마지막 순간일 수도 있는 때에 이은은 그녀의 인생은 그녀의 것으로, 다른 사람들의 뒷담화 같은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기 근데 이은아, S호텔 어때? 여기 야외정원이 그렇게 예쁘대. 신부들이 그렇게 좋아한다네?”

“…….”

“아니면 W호텔 A하우스는? 밥이 맛있대.”

세완을 보면 그녀라도 뒷담화를 신경 써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말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그 사이에 핸드폰으로 예식장을 찾아보고 들이미는 세완을 이은이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나는 연애만 하자고 한 거 같은데?”

“연애하다가 결혼하고, 오빠 하다가 아빠하고, 친구 하다가 신랑하고! 다 그런 거지!”

“아, 오빠 하다가 아빠? 난 그럼 연상을 찾아봐야 하나?”

세완의 얼굴이 또다시 총천연색으로 바뀌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는 거야. 메인은 그게 아니야. 친구 하다가 신랑! 친구 하다가 여보! 응? 야아, 귀 막지 말고!”

세완의 목소리는 생긴 것과 달리 중저음이라 자장가로 쓰기 딱 좋았다.

“이은아, 내 말 좀 들어 봐. 응? 귀마개는 좀 빼고.”

세완은 한동안 안달을 냈지만 이내 포기하고 그녀의 침대 바로 옆에 앉아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다.

“뭐해?”

“아니, 어떤 책에서 봤는데 애들 잘 때 이렇게 머리 쓰다듬어 주면 잘 잔다고 하더라고.”

“내가 애야?”

“크게 차이는 없는 거 같…….”

세완이 두 살이나 서른두 살이나 크게 차이는 없지 않느냐고 말하려던 때였다.

눈 감고 누워 있던 이은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세완의 몸이 기울어졌다. 이은이 세완의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큰 차이가 있는 거 같다고.”

세완이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지?”

방긋 웃은 이은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세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눈치를 보느라 손잡는 것 하나도 제대로 못 하고 머뭇대던 남자가 슬금슬금 이은의 손목과 어깨를 향해 손가락을 전진시켰다.

“나 잠 잘 오는 방법 아는데.”

“난 그거 없어도 잘 자.”

“그럼 나라도 좀 잘 자게 도와주면 안 될까?”

세완이 간절하게 말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시작은 버드키스로 가볍게!

새들이 부리를 부딪치는 것처럼 입술이 살짝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은은 그 어린아이 장난 같은 키스에 키득거렸다.

세완은 살그머니 그녀의 눈치를 보더니 살짝살짝 겉면만 닿던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문질렀고, 옆으로 짓눌렀다. 그리고 미끄러지듯 약하게 그녀의 입 안에 혀를 밀어 넣었다.

세완은 그녀에게 키스를 건네는 그 순간조차 겁내지 말라는 듯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세완만 모르지 연애는 할 만큼 했던 여자 이은은 제가 세완을 덮치는 건 어떨지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보호를 받고 있는 이 느낌도 나쁘지 않아 그냥 눈을 감고 세완에게 협조하기로 했다.

“아이고, 형님! 제 와이프가 실수를 했습니다!”

멀리서 일부러 백희경을 숨겨 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소리치는 어느 가구 회사 회장의 목소리와, 그녀가 범죄자일 줄은 몰랐다며 목청 높여 우는 그 회장의 스물 몇 살짜리 어린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 RRR

“무시해.”

“누군데?”

“찬주.”

“포항형님이라는 여자를 잡아 놨거든. 그 뒷수습 때문에 전화한 걸 거야.”

신명 나게 울리는 핸드폰 벨소리와, 그걸 무시하라고 종용하는 세완의 목소리도 들렸다.

그리고 착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그녀더러 독하다고 했던, 부모 없이 보고 배운 것 없이 자란 아이라서 남자를 몸으로 유혹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던 고등학교 선생의 목소리도 떠올랐다.

하지만 이은은 이내 무시했다. 알게 뭐람. 나만 행복하면 되지.

저 하나만 행복하면 된다고 목청 높여 소리치던 세완을 지금까지 무시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은은 세완의 방법도 좋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한 번 사는 내 인생인걸!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3년짜리 휴가를 되살려 인생을 한 번 화끈하게 즐겨볼까 하는 생각이 이은의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그건 아직 상상일 뿐, 일단 그녀는 키스에 집중하고자 했다. 세완의 입술은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어설픈 구석이 있긴 하지만 그는 제법 키스를 잘했다.

이은은 만족한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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