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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99)화 (99/100)

99화

그 과정에서 몸싸움을 하다가 두 남자가 죽었다고 했다. 죽이려고 죽은 것은 아니고 화를 내는 그들을 피하려다가 옆에 있던 망치를 휘둘렀다고 했다.

“그럼 포항형님은요?”

“네가 형님을 어떻게 알아?”

“어쨌든요.”

“……돈은?”

“이야기해 주면 줄게요. 나는 진실을 바라요.”

이은이 말했다.

그녀는 포항형님이라는 사람은 그냥 그녀를 도와 줬을 뿐이라고 했다.

장독대에서 굴러 크게 다친 그녀를 구하고, 그들의 시신을 숨기는 것을 도와 줬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돈이 필요해. 1억, 아니 3억만 줘. 3억만 주면 저기 지방에 가서 다시는 안 올라올 거야.”

그녀의 전 재산이 오피스텔 하난데 그걸 팔아도 3억은 없었다. 이은의 친모는 순진한 건지 멍청한 건지 돈에 있어서는 상당히 흐리멍덩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이은은 납치‧감금되어 있을 때 여자의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건 확실히 백희경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백희경의 말처럼 그녀가 부상을 당했다면 그렇게 카랑카랑하고 멀쩡한 목소리이지는 않았을 거다.

백희경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장독대에 흥건하던 피가 마음에 걸렸다.

제 엄마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종종거리던 소원의 모습과.

이은은 어쩌면 백희경의 남편을 그 포항형님이라는 사람이 죽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뭔가 더 정보를 캐내기 위해 그녀에게 말을 걸려고 할 때였다.

“너 나쁜 애구나!”

갑자기 백희경이 소리쳤다.

“왜 자꾸 내 남편한테 관심을 보이는 건데?”

“아니 그게 아니라…….”

“네 엄마를 닮아서 그래. 그 나쁜 년! 내 남편 뺏어간 년!”

갑자기 백희경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는 손에 쥔 칼도 집어 던지고 이은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나쁜 년! 이 나쁜 년!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래?”

그녀는 이은을 자신의 동생, 그러니까 ‘백희경’과 착각을 하는 것 같았다.

아니라고 이은은 어떻게든 해명을 하려고 했다. 돈을 준다면서 그녀를 달래 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백희경의 손힘이 지나치게 강했다.

“죽어! 이년, 너 죽어! 내 남편이랑 바람핀 년!”

목을 누르는 백희경의 손힘이 점점 강해졌다. 이은은 어쩐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은은 제 마지막이 너무 억울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고작 이런 모습으로 죽기 위해 버텨 온 인생이 아니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꺼져 버리라고 아득바득 살아온 인생이 아니다.

그리고 고작 이런 여자에게 죽으려고, 세완에게 그토록 모질게 군 인생이 아니었다.

“컥!”

이은은 어떻게든 희경을 손을 자신의 목에서 떼어 내려고 했다. 하지만 백희경은 반쯤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그녀는 지금 이은을 이은이 아닌 자신의 동생으로 보고 있었다.

백희경이 말했다.

“어떻게 나한테 이래. 내가 널 얼마나 좋아했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니.”

백희경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애절하고 간절하고 애달프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 제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이은은 세완의 환상마저 보았다.

‘이은아!’

목소리는 안 들리는데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달려오는 모습은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녀는 정말 환상을 보는 것 같았다. 너무 미안해서 그런 것 같았다.

이은은 주마등처럼 자신의 인생이 머릿속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기억에 언제나 세완이 있었다.

사실은 나도 네가 싫지 않았는데 말이야…….

싫지 않은 게 아니라 약간은 좋아했던 것도 같다.

사실 사무실에서 팔을 걷어 올리고 일하는 모습에 조금 설렌 적이 있기도 했다. 남매라면서 의식적으로 그 마음을 죽였지만.

어째서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솔직해지는지 모르겠다며 이은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갈 때였다.

갑자기 백희경이 그녀의 배 위에서 치워졌다.

“허억!”

목이 졸려 산소공급이 중단되어 있었던 이은은 갑자기 밀려오는 산소에 크게 헉, 소리를 냈다.

머리가 멍하고, 손이 덜덜 떨렸다.

그때 옆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났다. 그리고 때를 함께 해 사람들이 그녀의 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김 비서님!”

윤세가 먼저 뛰어왔고, 황 실장과 춘천댁, 이 회장도 뒤따라왔다.

“이은이부터 보호해요.”

세완이 소리쳤다.

그리고 모든 것이 굉장히 갑자기 순식간에 종료가 되었다.

* * *

백희경과 몸싸움을 하고 있는 세완에게 윤세와 황 실장이 합류했고, 장정 셋이 뛰어들자 모든 것이 순식간에 종료됐다.

경찰들이 신고를 받고 왔고, 이은은 이 회장의 주치의에게 진료를 받았다.

“목이 눌려서 충격을 좀 받았습니다만 이 정도면 괜찮습니다. 양호합니다.”

“그래도 한 번만 더 봐 주세요. 정말 괜찮은 거 맞습니까?”

“한 번만 더 보게. 내가 보기에는 안 괜찮아. 안 괜찮다고!”

세완과 이 회장이 함께 주치의를 괴롭혔다.

김 박사님을 그만 좀 닦달하라며 이은이 말을 하려는 찰나였다. 그녀의 팔목을 잡은 김 박사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제가 잘못 봤네요. 약 먹고, 링거 맞고, 사흘 동안 푹 쉬면 됩니다.”

이은의 진단을 새로 내린 김 박사가 그녀에게 작게 소곤거렸다.

“영양제야. 걱정할 필요 없으니까 좀 쉬게. 저 두 양반들이 너무 걱정이 많아서 말이야.”

그는 하늘이 무너질까 두려워서 장도 못 담근다는 두 남자에게 이은에 대해서 조심해야 할 것들을 알려 줬다.

첫 번째 이은의 잠을 방해하지 말 것, 두 번째 이은에게 말 걸지 말 것, 세 번째 이은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것!

어쩐지 세 가지가 모두 동일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은은 그냥 모르는 척했다.

이 집의 두 남자는 너무 말이 많고, 걱정이 많고, 관심도 많았다.

이은이 그렇게 두 사람의 집중 관심을 받고 있는 반면에 소원은 취조와 비난을 받고 있었다.

“엄마가 괜찮다고 했어요.”

딸과 옷을 바꿔 입고 소원인 척, 저택에 잠입한 희경으로 인해 소원은 천고의 죄인이 되었다.

“믿을 이야기를 믿어야지! 그리고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우리를 속여서는 안 됐던 거다. 소원아, 아줌마는 그렇게 생각해.”

춘천댁은 지극히 상처받은 표정으로 소원을 비난했다. 소원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죄인이 된 것은 또 한 사람, 윤세 또한 마찬가지였다. 경호 대상이 위협받는 동안 맷돌로 콩이나 갈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는 스스로에 대한 직업적 자부심마저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죄송합니다.”

윤세는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그녀에게 사과했고, 세완은 이참에 그를 해고하라고 속살거렸다.

참 한결같은 위인이었다.

“이건 경호원이 경호원 자격이 없는 거지!”

“……네가 소개해 준 경호원분도 나 못 도와 주셨거든.”

세완이 고용한 경호원은 개인 사정으로 인해 사흘 뒤부터 입주 경호원으로 들어올 예정이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자 세완이 조금 시무룩해졌다. 이은이 그를 달래듯이 말했다.

“그리고 애초에 집 안이었잖아. 그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

이번 일은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라고, 윤세의 탓이 아니라고 그녀가 윤세 대신 변명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윤세는 더더욱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세완은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이세완 좀!

결국 이은은 조용히 윤세를 내보낸 뒤 세완의 팔을 때렸다.

“너는 진짜, 사람 무안하게!”

이은이 그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세완은 처음에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헤벌쭉 웃는 얼굴이 되었다.

솔직히 이은은 그 순간, 백희경과 몸싸움을 하다가 세완의 머리 어딘가가 잘못된 줄 알았다. 설마 세완이 머리를 다쳤는가 싶어 이은이 주치의인 김 박사님을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세완이 그때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네가 화냈잖아, 나한테. 평소처럼.”

“……마조히스트야?”

이은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마조히스트란 상대에게 가학당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는 사람을 뜻한다.

혹시 네게 내가 알지 못한 어떤 정체성이 있느냐는 이은의 물음에 세완이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발작하듯 부정하는 모습에 이은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때 세완이 말했다.

세완은 평소 그녀가 자신을 대하던 모습이 참 그리웠다고 했다.

윤세와 함께 있는 모습도 짜증 났지만 저에게 냉담한 그 모습이 더 가슴 아팠다고 했다.

여느 남자들처럼 말을 유창하고 조리 있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솔하기는 했다.

좋아한다는 말도 대놓고 못 하고, 심지어 그녀와 손끝이 닿는 것도 우물쭈물하는 순진한 남자를 보며 이은이 쓰리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내가 실수한 것.”

“뭐가 미안한데?”

“뭐가 됐든 전부 다! 네가 화났다면 그건 내가 잘못한 걸 거야.”

세완은 그날 잘못한 것이 없었다. 정말 단 하나도 없었다. 그가 한 말이라고는 자신이 너무 부족한 남자라서 속이 상한다는 뉘앙스를 가진 말, 그리고 김이은은 그나 윤세보다 훨씬 더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는 말 딱 그것뿐이었다. 

이은은 그녀의 순진하고 착하고 바보 같은 소꿉친구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도대체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번 일은 순전히 그녀의 눈치가 너무 빨라서 시작된 일이었다. 그녀는 세완에게 불편한 고백을 받기 전에 그를 잘라 낼 셈이었다.

결혼도 못 하는 고작 연인 관계로 얽히기에는 세완이 너무 소중했고, 이 회장과 춘천댁이 너무 소중했다.

그래서 시작하기도 전에 그 모든 감정을 끝낼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녀 자신의 마음 그 어딘가에 그와 비슷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그 또한 묵살하려고 했다.

이성이 감성을 지배하고, 그 이성이 그녀를 좀 더 높은 곳에 올려 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BS그룹 회장의 전 여자 친구보다는, BS그룹 회장과 남매처럼 자란 그룹 계열사 대표 쪽이 이은은 좀 더 마음에 들었다.

불같은 사랑에 몸을 던지고, 그것에 휘둘리기에 그녀는 너무 현실적인 여자였다.

“다시는 안 그럴게. 미안해. 다시는 술 안 마실게. 정말이야.”

그리고 세완은 지독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남자였다.

착해 빠져서는!

이은은 자신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세완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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