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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98)화 (98/100)

98화

좋은 집이었다. 누가 봐도 돈을 발라 놓은 것 같은 으리으리한 집이었고, 그 와중에 화목하기까지 했다.

솥뚜껑 열어 보면 근심 걱정 없는 집이 없다지만 이만한 대저택에 살며 콩국수를 해 먹겠다고 온 가족이 모여서 저렇게 하하 호호하는 집은 드물었다.

소원의 옷을 입고, 소원의 모자를 뒤집어쓴 희경은 새삼 이은이 지나치게 운이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속에서 웃고 있는 이은의 모습을 보며 어쩌면 제 기대가 충족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희경은 큰 욕심이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소원과 단둘이, 돈 걱정하지 않고 살 정도만 되면 됐다.

물론 포항형님은 되도록 많이 뜯어내 우리도 한 번 떵떵거리면서 살아 보자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희경은 그 돈이라는 놈이 얼마나 사람을 무섭고 피폐하게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지라 그저 그들 모녀가 단둘이 행복할 정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2층. 가장 안쪽 방.

그리고 그것을 위해 소원이 가르쳐줬던 이은의 방을 찾았다.

올 때처럼 조용히, 돈을 가지고 나가는 것만이 그녀의 유일한 욕심이고 소원이었다.

* * *

이 회장의 콩국수 예찬에 황 실장은 당혹스러워했다.

“제가 밀가루는 잘 안 먹어서요.”

“왜!”

이 회장이 대노했다. 밀가루가 얼마나 좋고, 귀한 건데!

“살찝니다. 소화도 안 되고.”

황 실장이 근육 증량을 위해 단백질 쉐이크를 자주 먹던 모습이 이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몸 만드는 것에 열중하는 사람이면 그럴 수 있지 뭐.

이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 실장의 근육이 어떻든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녀의 관심사는 세완이었다.

이은은 황 실장에게 윤세와 떨어지지 말라는 말을 부탁했다는 세완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어떤 심정으로 그런 부탁을 했는지도 생각했다.

이 회장과 세완이 백희경을 신경 쓰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세완의 입에서 윤세와 떨어지지 말라는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너는 바보인 걸까, 아니면 그냥 나를 좋아하는 걸까.

이은은 그녀 스스로가 더 중요해서 세완을 밀어냈다. 그런데 세완은 그 자신보다 이은이 더 소중한 모양이었다.

이은이 윤세와 함께 있을 때면 누구보다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녀에게 윤세와 함께 있으라고 하는 것을 보니.

“바보 같긴.”

이은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때 그녀의 옆에 있던 윤세가 물었다.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 말도요.”

그는 자신에게 말을 한 줄 알았나 보다.

무슨 말을 했느냐고 묻는 그에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은 이은이 몸을 일으켰다. 요즘 세완을 생각하면 늘 그렇듯이, 그녀의 머리가 제법 복잡해졌다.

“어디 가십니까?”

“방에요.”

“같이 갈까요?”

윤세는 그와 함께 움직이라고 했다는 세완의 말을 떠올리며 이은을 따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은이 고개를 저었다.

“맷돌 돌리셔야죠. 회장님 화내세요.”

이은의 눈짓을 따라 윤세의 눈이 움직였다. 이 회장은 여전히 황 실장에게 콩국수를 영업하고 있었다.

“세완이가 전화를 한 모양인데 확인 좀 하고 올게요. 콩은 이 컵으로 떠서 넣으시면 됩니다. 둘 다 하실 수 있죠? 월급도 많이 받으시니까!”

이은은 2인분의 작업 분량을 윤세에게 미뤘다.

이은의 말에 윤세가 울컥하며 뭐라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이 회장이 소리쳤다.

“뭐 하나! 손이 느리잖아!”

……이쯤 되면 정말 경호원이 아니라 노예로 취업을 한 것 같았다.

윤세는 들어 올리려던 엉덩이를 다시 하강시켰다. 그리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시 맷돌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은은 그 모습이 우습기도 우습고, 미안하기도 미안해서 조언 하나를 남겼다.

“그거만 마저 다 갈면 끝일 거예요. 세완이가 오면 걔를 시켜도 되고. 바로 내려올게요.”

그녀는 그저 세완이 했다는 그 부재중 전화가 궁금할 따름이다.

온 가족이 콩국수에 매달려 있느라 춘천댁도, 이은도, 이 회장도 모두 전화를 안 받았으니 그 성격에 조급할 만했지!

물론 그렇다고 세완에게 다시 전화를 할 생각은 없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전화로 목소리 들어서 뭐 하려고.

다만 그냥 궁금할 뿐이었다. 세완에게 온 전화가. 그 기록이 보고 싶었다.

이은이 몸을 일으켜 2층으로 올라갔다. 

아마 가방 속에 있을 거다. 그녀의 핸드폰은.

이은은 발걸음 경쾌하게 2층으로 올라갔다.

* * *

세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서울에 도착하라고 조종사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조종사는 그의 명령을 매우 완벽하게 수행했다.

포항에서 서울까지 비행기로 한 시간이었다. 잡다하게 배를 타고, 차를 타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시간은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한 시간도 안 돼서 완수했다.

조종사의 능력에 감탄하며 세완은 옥상 헬기장에 거의 날듯이 뛰어내렸다.

조종사와 지사의 직원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지금 당장은 이은이 먼저였다.

시끄러운 헬기 소리에 집집마다 몇 명씩 고개를 빼고 어느 집인가 하고 살펴보는 것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완은 옥상을 통해 1층으로 내려갔고, 1층에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자신을 뜨악한 표정으로 보는 가족들을 한눈에 훑었다.

“너 왜 이리 일찍 왔어? 포항이라며?”

“이은이는요?”

이 회장의 질문을 무시한 세완이 목적에만 집중했다.

“이은이야 2층에 있…….”

그리고 이 회장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뛰듯이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 모습이 너무 심상찮아서 이 회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저기, 무슨 일이 있는 거면 저도 2층에…….”

세완의 모습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것은 윤세도 마찬가지이기에 그는 세완을 따라 2층으로 가고 싶었다.

솔직한 이야기로 맷돌도 그만 갈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은 원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아니, 자네는 맷돌 갈아. 자네가 가면 누가 하나. 늙은 내가 할 거야, 연약한 춘천댁이 할 거야?”

정정하신 모습만 보면 맷돌은 물론 절구도 충분히 빻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동방예의지국 출신인지라 윤세는 억울한 듯 입만 벙긋거리고 이내 다시 맷돌 손잡이를 잡았다.

* * *

한편, 이은은 핸드폰을 확인하기 위해 방에 들어온 참이었다.

“핸드폰이…….”

그녀가 가방을 뒤지고 있을 때였다.

“이은아!”

그녀가 상상도 못한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희경이 있었다.

“꺄……!”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데 그녀가 이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해코지하려고 온 거 아니야. 부탁이 있어서 왔어.”

그녀는 소리를 지르지 않으면 이은을 놔준다고 했다. 이은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희경이 이은의 입에서 손을 뗐다.

이은은 그 즉시 방문을 향해 뛰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희경이 좀 더 빨랐다.

“너 정말!”

희경이 이은의 몸을 짓눌렀다. 희경에 손에 들린 칼이 보였다.

“……!”

“형님이 챙겨 준 거야. 내가 챙긴 거 아니야.”

아마 가계부에 적혀 있던 포항형님이 챙겨 준 것인가 보다.

희경에게 꽉 붙들린 채로 이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원하는 게 뭐예요?”

“……너 얼마나 있니?”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예상을 벗어나지를 않나!

이은은 이가 갈렸다.

정말이지 생각 같아서는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면서 대거리라도 하고 싶었다. 친이모라면서 도대체 어떻게 나한테 이래요?

그녀에게 마구잡이로 달려들어 몸싸움이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은의 희미한 이성이 그것을 말았다.

“나 돈 얼마 없어요.”

“이런 집에서 살고, 대기업에 다니면서 돈이 없다고?”

그녀는 이은에게 믿을 만한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

하지만 이 집은 이은의 집이 아니었다. 이은은 그저 얹혀사는 입장일 뿐이고, 아무리 대기업이라고 하지만 일개 직장인이었다.

그리고 사실 그녀가 얼마를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가 됐든 주고 싶지 않았다. 내가 왜! 당신 따위가 뭐라고!

그런 이은에게 희경이 말했다.

“넌 나한테 빚이 있잖아. 그러면 안 돼.”

“빚은 무슨 빚이요?”

버려졌을 때 이은의 나이가 일곱 살이었다. 일곱 살짜리가 빚은 무슨 빚이 있고, 무엇보다 백희경이 그녀 부모님의 유산을 모두 가져갔다.

상대에게 받아야 할 것이 있는 이는 희경이 아니라 이은이었다.

이은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제가 생각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읊었다.

내 부모님의 돈을 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이대로 조용히 사라지면 신고하지 않겠다는 말도 함께 했다.

백희경은 그때 소리를 질렀다.

“아니야!”

이은은 깜짝 놀랐다.

이은이 큰 소리를 낼까 봐 입을 틀어막았던 주제에 자신이 소리를 지르다니…….

그런데 놀랄 일은 바로 그다음이었다.

“그 여자는 네 엄마 아니야. 내가 네 엄마야.”

"……."

"걘 낳기만 했어. 기른 건 나라고!“

백희경이 갑자기 울면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은은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다른 게 아니라 백희경의 정신이 살짝 불안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서직 복귀를 한 이후, 세완이 알고 있는 것은 이은도 모두 알고 있다. 태산에서 보내온 자료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은은 기억을 되짚었다.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백희경의 정신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이은이 생각했다.

그녀는 잠시 백희경이 처벌을 받지 않으려고 이러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재 칼자루는 그녀에게 있었다.

처벌은 잡힌 뒤의 일로, 지금은 아직 거기까지 상관할 상황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려던 찰나 이은은 섬에서도 백희경이 다소 이상한 측면을 보인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울부짖으면서 너는 나한테 빚이 있다고, 그러니까 섬에서 무조건 1년을 살아야 한다고 매달렸을 때가 바로 그때였다.

“…….”

이은이 백희경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동생은 이은의 친모가 아니라고 했다. 이은은 그녀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백희경에게 달래듯이 말을 건넸다.

그녀는 저들이 안고 있는 진실, 그것이 궁금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이은은 경악했다.

태어난 것은 미혼모로부터, 입양되었더니 양아버지와 친어머니가 불륜을 하고, 그 와중에 양어머니는 친어머니의 호적으로 신분을 세탁했다고 했다.

시작이 어려웠던 것뿐이지 백희경은 제 감정에 취해 있었던 일들을 주저리주저리 모두 꺼내 놓기 시작했다.

그녀를 버린 존재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보자면 안타깝다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기구한 삶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은은 자신의 납치, 살인미수와 관련된 진실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돈을 노리고 그녀를 초대했는데 순순히 돈을 줄 것 같지 않자 백희경의 현 남편이 세탁소 아저씨와 함께 그녀를 죽이려고 했고, 그래도 기른 정이라고 백희경이 이은을 도우려고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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