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세완은 먼저 지사에 연락을 해서 헬기를 띄웠다.
올 때처럼 차를 타고, 배를 타고, 다시 차를 탄 뒤 비행기를 타고, 또다시 차를 타 서울로 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시간이 없었다.
수배한 헬기에 올라탄 그는 그 즉시 서울로 향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각 보안업체 경호원들, 심지어 지구대에까지 연락을 돌렸다.
“네. 아직까지 수상한 사람은 보이지 않다는 이야기죠? 알겠습니다. 제가 도착할 때까지 누구도 집 안에 들이지 말아 주세요.”
“당분간 경호원분들이 밤에도 근무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밤에는 일곱 분 정도만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열다섯 분 전부 다는 아니더라도 최대한 많은 분들이 집 주변을 좀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집 주변을 이상한 사람들이 맴돌아서요. 동네를 한 바퀴 돌아 주셨으면 합니다. 네, 평창동 중앙로 1번가입니다.”
지구대에까지는 연락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완은 너무 불안해서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었다.
오늘이 아닐 수도 있었다. 아무리 남편과 불편을 벌인 동생의 딸이라고 하더라도 제 손으로 키운 것이 7년이니 기본적인 모성애가 있다면 자식을 죽일 리 없었다.
찬주는 세완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백희경의 남편과 그 공범의 머리에 무거운 것을 휘둘러 이은이 도망칠 수 있도록 도운 사람이 백희경이지 않을까 자신은 추측한다면서 이은은 괜찮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세완은 자꾸만 불안했다.
그가 불안해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백희경은 지금 정상이 아니었다.
인간으로 젓갈을 담근 것을 보고 혹시나 싶어 올라오는 길에 그녀의 병원 기록을 조회했더니 약 1년 전 날짜로 정신과 치료 병이력이 있었다.
다녔다 말았다 반복해서 그렇지 그녀의 병력은 꽤나 오래된 것처럼 보였다.
세완은 혹시라도 그녀의 정신이 이상을 일으켜 이은에게 해코지를 할까 그게 가장 불안했다. 그래서 이은에게 그와 함께 귀가를 하자고 묻기 위해 전화를 했는데…….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이은과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비서는 직업 특성상 24시간 핸드폰을 켜 놓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연락이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경우가 벌어질 리 없었다.
믿을 수 없었던 세완은 혹시나 해서 회사로 연락했다.
「이미 퇴근하셨습니다.」
상무실에서 전화를 받지 않아 회장실로 연락해 임시로 사람 하나를 내려보냈더니 확인하고 와서는 이은의 퇴근을 말했다.
“아니 도대체 시간이 몇 시인데……. ”
벌써 퇴근을 하냐고 화를 내려고 했더니 6시가 넘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아까 박 팀장에게 전화를 받고 섬으로 가는 길, 오늘은 많이 늦을 테니 그를 기다리지 않고 일찍 귀가해도 된다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
너무 되는 일이 없다 보니 이제는 욕도 안 나왔다. 세완이 긴장과 초조함 속에서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무 일 없을 거다. 당연히 아무 일 없어야지!
세완은 불안한 마음을 꾹꾹 눌러가면서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이은이 귀가하면 그녀에게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좀 전해 달라는, 그 말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 띠- 띠- 띠-
통화 중인 모양이었다.
그래서 5분을 기다리다가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여전히 상태가 똑같았다.
세완은 춘천댁과 이 회장의 개인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번에도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상황이 이쯤 되니 집에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됐다.
그래서 그는 방금 통화했던, 그의 집의 보안을 전담하고 있는 황 실장에게 전화해서 본채로 좀 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말만 전해드리면 됩니까?」
“전화 좀 받으라는 말도 같이 좀 부탁드립니다. 가족들 전부에게요.”
세완이 잇새로 말을 뱉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은이에게, 그러니까 김 비서에게 이윤세 팀장과 떨어지지 말라는 이야기도 함께 전달 부탁드립니다.”
세완은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그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윤세가 정말 꼴 보기 싫었다. 그는 그 남자가 너무 싫었다. 아마 전생에서부터 무슨 지독한 악연 같은 것으로 얽힌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기 상황에서는 그가 고용한 여성 경호원보다는 그가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가 고용한 경호원은 단순히 신체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 경호를 한다면, 이윤세 팀장은 조금 달랐다. 그는 필요하면 사람도 죽였다.
시큐리티 서류에 따르자면 그는 정말이지 일당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60대 초반 중년 여자가 하나가 뭐 그리 위협이 될까마는 그래도 세완은 이은이 0.01%의 위험에 빠지는 것도 싫었다.
어차피 그의 속은 썩어 문드러질 대로 썩어 문드러진 상황이었다. 여기에서 조금 더 썩는다고 해도 별 차이는 없었다.
이은만 다치지 않으면 되고, 이은만 건강하면 된다.
세완은 쓰린 속을 달래며 제발 그가 도착할 때까지 이은이 안전하기만을 바랐다.
* * *
콩국수를 먹자며 회사로 전화를 한 이 회장의 호출로 이은은 평소보다 이른 귀가를 했다.
세완을 제외한 온 가족이 모여 앉아 맷돌을 돌렸다.
정확하게 말하면 윤세가 맷돌의 손잡이를 돌리고, 이은이 그 앞에 앉아 콩을 부었다. 이 회장은 소파에 앉아 부채질을 했다.
“지금이 21세기인데 말입니다.”
윤세의 표정이 묘해졌다.
“알아요. 누가 뭐래요?”
“믹서기 없어요? 이 으리으리한 집에 믹서기가 없다고 하면 거짓말일 테고…….”
윤세는 도대체 왜 이 집에서 1950년대 시골의 풍경을 느껴야 하냐고 물었다.
“요즘은 시골도 맷돌이 아니라 믹서기 씁니다.”
“어느 분이 맷돌이 좋다고 하셔서요. 맛이 다르다고 하시네요.”
이 회장을 향해 고갯짓한 이은이 맷돌에 콩을 부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감자전도 강판에 갈아서 해 먹는 걸요. 돼지기름에 구워서.”
“…….”
세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요즘 세상에 도대체 왜요?”
그는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었다.
“그러게 말이야. 왜 그러시나 모르겠다.”
불 앞에서 콩을 삶으며 춘천댁이 추임새를 넣었다.
“할아버지, 윤세 씨가 그렇다고 하는데 할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거 보라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 집의 식단을 보면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서 우리도 좀 주방 도구 및 레시피를 현대화시키는 것은 어떠냐며 이은이 은근슬쩍 이 회장의 의견을 물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그녀의 말을 수용하고, 수용해서 변화를 시도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거기! 속도가 느리다. 좀 더 열심히 갈게.”
이 회장은 세완 대신 윤세를 구박해 그의 노동력을 콩국수에 갈아 넣었다.
“이건 정말 시간 외 수당 주셔야 하는 겁니다.”
“대신 밥 주지 않나!”
“하!”
윤세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보면 볼수록 이은과 이 회장은 닮았다.
한 명은 그의 월급이 비싸다고 마늘 까는 무급 노예로 취업시키고, 또 한 명은 콩 가는 노예로 취업시켰다.
물론 이 집에 있는 동안 잘 얻어먹고, 푹 쉬고는 있지만 그가 이런 단순 노동을 하는 존재는 아닌데 말이야…….
윤세가 자신의 직업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있을 때였다.
딩동, 소리와 함께 누군가 현관 앞에서 서 있었다. 콩을 삶던 춘천댁이 손을 앞치마에 닦으며 인터폰으로 다가갔다.
“별채의 황 실장님이신데요?”
그녀의 말에 이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관이 열렸다. 황 실장이 이 회장의 앞에 성큼 걸어와 세완의 부탁을 전달했다.
“……전화?”
“네. 연락이 안 된다고 걱정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확인하니 아닌 게 아니라 부재중 전화가 와 있긴 했다.
“아니, 내 전화가 안 되면 집 전화로 하지! 다른 사람들 전화도 있는데!”
이 회장이 합리적 의혹을 꺼냈다. 황 실장이 답했다.
“모두 다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집 전화도 안 된다고요.”
그들이 콩국수 때문에 조금 시끄럽기는 했다. 핸드폰 진동 따위는 못 들을 수도 있을 정도로.
하지만 아무리 못 들어도 어떻게 집 전화를 못 듣나!
“내가 보기엔 그놈 핸드폰이 고장 났어!”
이 회장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며 집 전화의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 띠- 띠- 띠-
하지만 빈말이 아니었는지 이 회장이 들어 올린 수화기에서는 오랫동안 수화기가 제 자리에 안 놓이고 이탈을 했을 때 들리는, ‘띠-띠-띠-’ 라는 기계음이 들렸다.
“어흠!”
이 회장이 헛기침을 냈다.
“하여간 그놈 유별이야, 유별. 그래서 할 말이 뭐라던가? 많이 늦는대?”
이 회장이 질문했다. 황 실장이 답했다.
“상무님께서는 지금 포항에서 헬기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달 사항으로는 상황이 좋지 않으니 가족들 모두 조심하시고, 전화를 좀 받아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황 실장이 이은을 향해 몸을 돌렸다.
“김 비서님께서는 이윤세 팀장과 떨어지지 말라는 이야기도 함께 전달하셨습니다.”
“이은이는 왜?”
“아마, 걱정돼서가 아닐까요? 외부인을 경계하라고 하셨으니까요.”
황 실장이 제 다름대로의 해석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현관이 열렸다. 황 실장이 한 이야기가 있다 보니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현관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외부인이 아닌 소원이었다. 아까 밖에 나갈 때 입었던 옷과 똑같은 옷차림이었다.
소원은 사람들이 자신을 바라보자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하고는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3층으로 올라갔다.
“좀 있다 내려와서 콩국수 먹어.”
그 뒷모습에 대고 춘천댁이 소리쳤다.
하지만 소원은 뭐가 그리 바쁜지 후다닥 위로 올라가기 바빴다.
“저 녀석은 또 뭐가 그리 바빠서…….”
그 모습을 무심히 넘기며 이 회장이 투덜댔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소원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놈은 언제 온다고?”
“지금 포항에서 올라오시는 중이라고…….”
“그럼 늦겠군. 한 그릇 남을 거 같은데 자네도 콩국수 좀 먹겠나? 맷돌로 갈아서 이게 참 맛있어!”
이 회장은 귀가 시간이 늦은 손자는 알 바 아니라는 듯 귀한 콩국수를 남기지 않기 위해 황 실장에게 영업했다. 황 실장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젖어 들었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던 소원이 멈춰 서서 그런 그들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