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그래서 희경은 동생의 호적을 훔치기로 결심했다.
모든 것은 간단했다. 이미 경찰은 동생을 그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희경은 그들에게 자신이 죽은 언니의 쌍둥이 동생인 ‘백희경’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됐다.
그 후 재산을 정리하고, 모든 것을 챙겼다.
법정비율에 따르자면 배우자를 1.5로, 자녀를 1로 계산해서 유산을 분배한다지? 헛소리!
희경은 그 어느 누구와도 재산을 나눌 생각이 없었다.
그건 그녀가 피땀 흘려 가며 모은 재산이었고, 동시에 남편으로부터 받아야 마땅한 위자료였다. 희경은 그 돈을 파렴치하다 못해 짐승과도 같은 동생의 딸에게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녀의 딸이라고 생각할 때는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스럽던 아이가 동생의 딸이라고 생각하니 세상 그 무엇보다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이은은 뱀을 닮았다. 닿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고 끔찍한.
그래서 희경은 이은을 보육원에 데려다줬다.
그래도 키운 것도 정이라고, 아무 데다 맡기지는 않고 그녀가 자랐던 보육원에 데려다줬다.
그리고 그 후 그녀는 반쯤 정신을 놓은 것처럼 돌아다녔다. 조금은 문란하게도 살았고, 조금은 경박하게도 살았다.
도박으로 적잖은 돈을 날리기도 했고, 모르는 남자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술을 마시고 길거리에서 잠든 적도 있었고, 노숙자들 사이에서 잠든 적도 있었다.
남편을 만난 것은 그때였다. 남편은 희경에게 예쁜 아가씨가 도대체 왜 이렇게 사느냐고 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인생 막장인지라 제정신 같았으면 희경은 남편을 피했을 거다. 하지만 그때 정말 희경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남편과 동생에게 받은 배신으로 모든 것을 놔 버렸고, 그러다가 중간에 멀쩡한 정신이 돌아오면 그때는 그녀가 직접 보육원에 데려다준 이은의 생각이 났다.
동생의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도합 7년을 그녀의 손으로 보살핀 아이였다.
말문이 트였을 때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린 것도 그녀고, 아이의 첫걸음마와 첫 심부름을 함께한 것도 그녀였다.
희경의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이은과 함께였다. 그런 이은을 놓아 버렸으니 희경이 제정신일 리가 있나!
그 후로 그녀는 남편과 결혼했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여자와 인생 막장인 남자가 결혼을 해 봤자 멀쩡한 인생을 꾸릴 리는 만무했고, 그때 포항형님이 그녀를 찾아왔다.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남편의 전처!
그녀는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기 위해 찾아왔다고 했다. 자신은 절대 혼자서 아이를 못 기른다고.
도박꾼 남편은 길길이 날뛰었다. 도망간 년이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도대체 어느 놈 자식을 임신해서 자신에게 맡기려고 하는 거냐며 그가 전처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찰나에 희경이 말했다.
“제가, 제가 키울게요!”
그 후로 희경은 소원을 제 배 앓아 낳았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믿음이 가끔은 착각을 일으켜서 너를 낳느라 너무 고생했다, 진통만 40시간 가까이 걸렸다며 포항형님이 겪었던 일을 제가 겪은 것처럼 말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소원이 그녀의 딸이 아니라는 것을 그 어느 누가 알까!
소원은 기록에 의하면 그 무엇보다 확실한 그녀의 딸이었다.
그것도 한 번 해 봤다고 두 번 하니까 전문가 비슷해지더라.
희경은 포항형님을 제 이름으로 입원시키고, 출산시켰다. 그리고 그렇게 낳은 소원을 제 딸로 출생신고했다.
그리고 희경은 그렇게 다시 행복해졌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는 정말 ‘백희경’이 되었다.
어린 소원을 키우고, 보듬고, 재우면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그녀 자신처럼 소원 또한 신장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정말 소원이 그녀의 딸 같았다.
아니, 전생에 그녀의 딸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결과는 나올 수가 없었다.
소원이 아프다는 사실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이 슬프면서도 그녀를 닮은 딸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소원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했다.
무거운 어구와 어획물을 운반하는 아르바이트도 했고, 쪼그리고 앉아서 굴을 까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술을 파는 식당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도 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삶이 나아지지가 않았다. 소원은 점점 더 아파 가고…….
그래서 이은을 찾은 거였는데 그 계집애가 모든 것을 다 망쳤다. 제 어미 아비를 쏙 빼닮아서는…….
이은은 그녀에게 빚이 있었다. 그녀는 이은을 키워 준 값을 받아야 했다.
희경이 고개를 돌려 창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전부 다 똑같이 으리으리한 대저택임에도 그 속에 유난히 더 크고 으리으리한 대저택이 보였다. BS그룹의 회장이 사는 곳이라고 했다.
사모님이 그녀에게 그랬다.
“아유, 어디 우리 같은 사람이랑 비교나 돼? 단위 수가 다른걸. 우리가 이만 얼마, 삼만 얼마짜리 알약 하나 팔 때 그쪽은 몇백만 원짜리 냉장고를 파는걸. 어디 냉장고만 파나?”
진짜 재벌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이은을 거둬서 키운 그 사람밖에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양반은 이은을 꽤나 총애한다고 했다.
가난한 부모를 만나서 고생만 하고 큰 소원과 달리 증오하는 두 사람의 자식은 부유한 집에서 고생 하나 하지 않고 크다니 이런 불공평한 일이 어디에 있을까…….
희경은 새삼 분노하며 주먹을 쥐었다. 그녀는 정말 빚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받아야 했다.
* * *
박 팀장의 전화를 받고 놀란 세완은 섬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길은 찬주와 함께였다.
갑자기 출장을 가야 한다는 그의 말에 이은은 자신도 함께 가길 원했지만 일전에 갔을 때 이은이 당했던 납치가 트라우마처럼 세완의 머릿속에 박혔다.
세완은 반드시 오늘 안에 귀가를 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섬으로 내려왔다.
심상찮은 박 팀장의 반응을 고려해서 보안요원 몇 명과 경호원 몇 명 그리고 용역업체의 사람들도 몇 명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깜짝 놀랐다.
두 구의 시신이 있는 장소는 이은이 납치를 당해 갇혀 있던 창고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단순히 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바로 옆이었다.
장독 안에 구겨져 있는 두 구의 시신을 보고 일동은 욱, 하고 그 자리에서 구토를 했다.
놀란 속을 진정하고 나니 이번에는 놀란 가슴이 문제였다. 세완이 놀란 나머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사후경직은…….”
“사후경직이 되기 전에, 시체가 말랑말랑할 때 이 안에 넣었겠죠.”
“아니, 날씨가 덥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시신이 거의 썩지 않고…….”
“그래서 소금을 넣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젓갈로 만들었다.
옛날이야기에 그런 내용이 있긴 했다.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모시고 있던 왕자가 왕위 다툼 중 살해되어 젓갈로 만들어져서 공자에게 보내졌고, 이를 본 공자는 다시는 고기젓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는 뭐 이런 이야기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옛날이야기였다. 어떻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며 세완이 기가 막혀 하자 박 팀장의 연락을 받고 지청에서 왔다는 담당 경찰이 말했다.
“알고 그랬겠습니까. 아무도 모르게 시신을 숨기려고 했는데 그게 저지르고 나니 인육젓갈이 된 것이겠죠.”
하지만 단순히 우연이었다고 하기에는 그 시신의 상태가 너무나도 참혹했다.
세완과 찬주가 데려온, 한때 깡패로 이름 날렸다는 용역업체의 인력 몇은 아직까지도 구토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범인은 혹시 밝혀졌습니까?”
“……시신도 오늘 발견되었는데요?”
“죄송합니다.”
세완의 마음이 너무 급했다. 경찰은 웃으며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그 끝에서…….
“팀장님께 들으셨는지 모르겠는데 이 시신이 우연히 발견된 게 아니라서요.”
“……우연이 아니면요? 누가 장독 뚜껑을 열어 놨다고 하던데요.”
경찰이 말했다.
세완이 깜짝 놀라 박 팀장을 돌아보니 박 팀장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안 그래도 어딘가에서 자꾸 이상한 냄새가 나서 집 안을 뒤지던 중이었다고 했다. 그것을 위해서 사람을 보내 달라고 한 것이라고도 했다.
그렇게 거의 온 집 안을 다 뒤지고, 심지어 나무 바닥까지 들어냈다.
하지만 그런 그들조차 설마 집 안에 있는 장독 안에서 시신이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했다.
“개인적으로 추측하건대 이건 여자가 범인입니다. 두 사람 이상이었을 수도 있군요. 여자 혼자서 장정 둘을 옮기는 건 힘들거든요. 특히 죽어서 축 늘어진 시신이요.”
경찰은 제 의견을 세완과 찬주에게 잔뜩 늘어놓았다.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보통 경찰은 지역별로 채용을 하거든요. 그래서 지청에 있다가 서울경찰청으로 가는 경우가 정말 불가능한데, 또 빽이 있으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제가 들은 기억이 나거든요.”
그 말을 뱉은 경찰이 세완과 찬주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예.”
네가 한 일이 뭐가 있다고 서울경찰청으로 발령내 달라는 말을 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세완은 일단 안면을 붉히지 않는 것을 최우선으로 할 생각이었다.
일단 이 회장과 이은에게 이 일에 대해 알리고, 범인의 딸이기도 한 소원에게 제 아버지의 사망을 알리고…….
할 일이 제법 많았다. 세완이 머릿속으로 제가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이상하네. 장독 뚜껑은 도대체 누가 열었지?”
장독 뚜껑만 안 열어놨어도 시신을 발견하는 데 훨씬 더 많이 시간이 걸렸을 거라며 그가 혼잣말을 할 때였다.
“꺄아악!”
갑자기 고음의 비명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