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물론 지금까지도 찾긴 했다. 하지만 세완의 반응으로 보건대 지금 세완이 한 말은 무슨 수를 써서든 없는 증거라도 만들어 오라는 명령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일거리를 이렇게 물고 온 주제에 양심도 없이 나보고 25년 전 살인 사건 증거까지 찾으라는 거냐며 찬주가 눈으로 욕했다.
“……무린가?”
“문제의 포항형님 부분을 포기하면 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포기할 수 있어?”
찬주가 물었다.
문제의 ‘포항형님’은, 박 팀장이 물고 온 김이은 납치‧살인미수에 대한 또 다른 단서였다.
그녀는 섬으로 들어가기 직전 세완과 이은이 식사를 한 식당의 주인이었다. 그리고 조사 결과 백희경 남편의 전처이기도 했다.
세완과 이은이 섬으로 들어가는 날에 ‘포항형님’이 섬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추측건대 아마 모든 일을 마친 백희경을 보호하고, 죽은 두 납치범의 시신을 숨긴 것은 그녀일 것이다.
여전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백희경과 함께 이은이를 죽이려고 하는 공범이 포항형님인데, 우리 세완이가 과연 포항형님이 포기가 될까 하는 그게 좀 궁금하네.”
느물거리며 속을 긁는 찬주에게 새완이 옆에 있던 종이 뭉치를 집어 던졌다. 망할 자식.
“하나씩 해결하자. 일단 백희경 살인 사건은 형사한테 넘겨.”
“어떤 형사?”
“네가 소개시켜 준 형사 있잖아. 서울경찰청 정찬형.”
“……그 사람 경제관데?”
“그럼 그 사람이 알아서 형사과에 넘기겠지.”
세완은 그런 사소한 건 네가 알아서 하라며 찬주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찬주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하지만 오케이. 그는 선대의 일은 외부 인력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럼 이제 문제는 김이은인데…….”
“이쪽이 골치 아프지?”
찬주와 세완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고민에 빠졌다.
정말이지 그 어떤 상황도 멀쩡하고 평온한 것이 없었다.
처제와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그것에 분노한 언니가 두 사람을 죽인 뒤 새 출발을 시도했는데 정작 그녀는 남편의 전처와 형님 동생 하는 사이란다.
“이쯤 되면 동물이 더 순수하고 순결하겠다.”
찬주가 빈정거리면서 말했다.
난잡하고 복잡하게 관계를 풀어서 적어놓은 화이트보드를 보던 세완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저 포항형님이 소원이 친엄마일까?”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보통 전처와 후처가 자주 연락을 할 일이 없지 않아?”
전처는 전남편을 지긋지긋해할 거고, 후처는 혹시라도 전처와 현 남편이 다시 눈이 맞지 않을까 거슬릴 거고…….
하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 사이에 아이가 있다면 그들은 무조건 서로와 연락을 해야 했다.
“딸 때문에 백희경을 도왔다는 것이 좀 더 합리적으로 설명이 되겠지?”
“내 생각에도 그렇다.”
물론 형님 동생 하면서 지낸다는 게 좀 우습긴 하지만 현 남편의 상태가 워낙에 불량에, 하자투성이다 보니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안다고 두 사람이 친분을 쌓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어지간히도 복잡한 관계들이다 보니 세완은 다시 한번 그들의 상관관계를 제 머릿속에 주입했다. 그리고 세완에게 말했다.
“백희경이랑 포항형님의 위치는 여전해?”
“그렇지. 둘 다 저택 주변에 서식하고 있음. 낮밤 가리지 않고.”
백희경 혼자일 때는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누군가 그 핸드폰을 주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포항형님’이라는 존재까지 추가되니 세완은 우연보다는 잠복의 가능성을 좀 더 믿기로 했다.
하나면 모를까 친분 있는 두 사람의 핸드폰을 동시에 주워서 보관하고 있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차라리 이은을 노린 두 사람이 동시에 저택 주변에서 그녀를 노리고 있는 것을 믿는 게 낫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구석은 존재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란 말이야.”
찬주가 작게 중얼거렸다.
골목 전체를 다 뒤졌는데도 모두 하나같이 새로 들인 고용인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 두 사람은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지 모르겠다.
“어딘가에 있겠지. 저 네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복잡할 줄은 어디 알겠냐.”
세완이 씁쓸한 목소리로 찬주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분위기를 환기하듯 말했다.
“아무튼 그런 관계로, 포항형님 쪽은 네가 계속해라. 백희경은 내가 조사할 테니.”
“그래.”
뒤져도 나오는 게 없다 보니 사돈의 팔촌까지 탈탈 털고, 사돈의 팔촌의 주변 곳곳에 사람들을 보내는 그들의 현재 상황을 떠올리며 찬주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놈의 팔자, 친구를 어지간히 잘못 만났어…….
부모 복 없는 놈은 친구 복도 없는 것 같다며 찬주가 넘쳐나는 일복에 비명 아닌 비명을 지르고 있을 때였다.
- RRR
세완의 핸드폰이 울렸다.
김이은인가 싶어서 잠깐 긴장했던 세완이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긴장을 풀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며 그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구야?”
찬주도 같은 생각을 한 것인지 눈을 반짝이며 세완에게 물었다.
동물의 왕국 타령을 하면서 세상에 둘도 없이 시니컬한 남자 흉내를 내던 찬주지만 만약 전화 건 사람이 김이은이라면 찬주는 지금 그를 휘감고 있는 이 모든 시니컬한 생각을 다 던져 버릴 셈이었다. 그리고 그는 원 없이 세완을 놀릴 생각이었다.
내 친구의 오매불망 짝사랑!
덜 떨어져서 25년 만에 깨달았지만 깨달음과 동시에 차인 불운의 찐사랑!
찬주의 눈이 기대와 설렘을 담고 세완을 바라봤다.
세완은 입술을 비틀며 찬주의 얼굴을 제 손으로 마른세수시켜 줬다.
“악!”
그리고 노랫소리 같은 찬주의 비명을 한 귀로 들으며 박 팀장의 전화를 받았다.
“네, 접니다. 무슨 일입니까?”
박 팀장은 아직 섬에 있었다.
퀵서비스를 보낸 그 하루 이틀 뒤에 집 안을 한번 살펴보고 서울로 올라오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그는 도대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는데 시간을 좀 더 요청했다.
그러더니 며칠 후에는 또다시 전화를 해서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요청했다.
무작정 요청한 것도 아니고 추적의 달인이라고 불리는 프랑스 용병부대 출신 몇 명과, 이라크 전쟁에도 참전했었다는 백전백승의 노장을 선택해서 요청했다.
이상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완은 박 팀장에게도 다 생각이 있겠지, 싶어서 그의 요청을 들어줬다.
그리고 오늘은 그로부터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그가 전화를 받았음에도 박 팀장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째 기분이 이상해서 세완은 한 번 더 그를 불렀다.
“박 팀장님, 안 들리십니까?”
「…….」
박 팀장은 한 번 더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말했다.
「대표님, 한번 내려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
세완은 깜짝 놀랐다.
그의 모습을 본 찬주가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시신이 발견됐대.”
“……!”
찬주도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박 팀장의 다음 말을 기대했다.
* * *
두 시간 전, 세완의 전화를 받은 소원은 더없이 소소하고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세완이 엄마의 목에 점이 있다는 것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건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면 알 수가 없는 부분이다.
때문에 세완에게 그 말을 들은 즉시, 소원은 엄마에게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동안 소원은 엄마의 전화를 피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것인지는 모르겠는데 엄마는 그녀에게 자꾸만 이상한 질문을 던졌다.
「언니는 집에 있어?」
「몇 시에 나갔는데? 몇 시에 퇴근해?」
「언니가 혹시 출퇴근할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니?」
사소하게는 이은과 관계된 질문이었고…….
「집에 경호원은 몇 명이니?」
「본채에는 몇 명이 있고, 별채에는 몇 명이 살아? 현관 비밀번호가 뭐야?」
처음 한두 개 정도는 대답을 했는데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엄마의 질문은 이해가 가지 않는 것뿐이었다.
“엄마는 내 성적은 안 궁금해? 모의고사 결과나…….”
「그건 나중에 얘기하자. 그래서 지금 집에 몇 명이나 있니?」
어떻게든 엄마의 관심을 돌리려고 했는데 엄마의 관심은 자꾸만 한 방향으로 흘렀다.
“엄마, 진짜 왜 그래! 나 자꾸 이상한 기분 든단 말이야!”
소원이 엉엉 울면서 매달려도 봤지만 엄마의 반응은 똑같았다.
「나중에 크면 엄마가 왜 그랬는지 알 거야. 소원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엄마 나쁜 짓 하려는 거 아니야. 엄마를 좀 믿어!」
그녀는 도리어 소원을 다그치면서 왜 자신에게 협조를 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래서 소원은 엄마를 피했다.
소원은 엄마를 정말 너무 많이 좋아한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이 엄마였다. 가끔 포항 이모가 그녀에게 엄마가 그렇게 좋으냐고 물을 때면 소원은 이렇게 답했다.
“엄마랑 나는 내가 배 속에 있을 때부터 연결된 운명인걸! 나는 우리 엄마 없이는 못 살아요. 만약 엄마가 사람을 죽였다고 해도 이해해 줄 수 있어. 우리 엄마잖아요.”
설마 정말 범죄를 꿈꾸고 있을 줄은 몰랐지만 소원은 그 정도로 엄마가 좋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이은에게 미안했다.
처음에는 이은이 미웠다. 그리고 그녀를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다.
엄마의 입으로 말했음에도 우리 엄마가 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 자식을 보육원에 직접 보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아빠와 함께 이은을 죽이려고 했다고 할 때는 더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아빠는 도박과 술만 관계되면 정도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긴 했다. 하지만 엄마는 아니었다.
심지어 그녀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피투성이가 된 엄마의 모습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모든 것이 오해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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