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25년이 아니라 25일 전의 일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말한 원장이 흘리듯이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착한 아이들이었어요.”
“…….”
연쇄살인범의 엄마도 제 자식은 착하다고 한다.
세완이 서늘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냉담한 세완의 반응 때문인지 원장이 재차 그를 설득하듯이 말했다.
“그렇게 끔찍한 일을 할 애가 아닙니다. 오해가 있으신 거예요. 가끔 점 때문에 투덕대는 일은 있었지만 진심으로 싸운 적은 없는 애들이에요.”
“점이라뇨?”
세완이 물었다.
“일란성 쌍둥이다 보니 다 똑같은데 유일하게 다른 것이 목에 점이 있느냐였어요. 볼록 솟아오른 갈색 점. 새끼손톱 반 정도 크기의 그런 점 말이에요.”
원장이 말을 이었다.
“큰 애는 그 점이 있고, 작은 애는 없는데 그래서 큰 애가 가끔 작은 애를 시샘했죠. 그러면 작은 애는 또 제 언니를 놀리곤 했죠. 큰 애는 발끈했고요.”
그 나이 또래 애들은 외모에 민감하지 않느냐며 원장은 우스워하면서 말했다.
“아유, 그 점 하나가 뭐라고…….”
그녀는 과거의 추억에 젖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데 그녀의 말을 들은 세완의 표정이 뭔가 미묘했다.
“목에 점이 있는 게 언니 쪽이라고요? 이은이의 친어머니요?”
“그래요. 언니 쪽.”
원장이 확신하듯이 말했다.
“분명합니까? 언니 쪽이 맞아요?”
“그럼요. 큰 애가 워낙에 똑똑하고 야무지다 보니 작은 애가 그 애를 놀릴 수 있는 유일한 게 점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원장은 백희경 자매는 그 점 때문이 아니라면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고 했다. 세완은 순간 머리가 많이 복잡해졌다.
세완은 그 점을 본 적이 있다. 이은의 목에서 봤고, 그 점을 백희경의 목에서도 봤다.
그 사실을 입 밖에 내뱉은 것은 아니지만 내심 모녀라서 비슷한 구석이 있는가,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원장은 백희경이 아닌 백희경의 언니에게 그 점이 있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복잡한 머리로 보육원을 나온 세완은 그 즉시 집에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 끝에 춘천댁이 전화를 받았다.
“아주머니, 혹시 소원이 집에 있나요?”
「있긴 있는데……. 바꿔 줄까?」
“네, 부탁드립니다.”
세완은 그와 이은이 들쑤신 이후, 수능 공부를 한다고 집 안에 있는 소원을 찾았다.
당연히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을 하는 거다.
「여보세요?」
소원이 전화를 받았다. 세완이 질문했다.
“소원아,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엄마 목에 점이 있어?”
「그건 왜요?」
“그게 사실은 네가 충격을 받을까 봐 말을 안 했는데, 엄마를 닮은…… 시신이 있다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와서 말이야.”
세완은 거짓말을 했다. 소원이 헉, 하고 숨 들이켜는 소리를 냈다.
아이가 지나치게 놀라는 것이 미안하고 안쓰럽긴 했지만 당장 범인을 잡는 일이 더 다급하다 보니 세완은 미안한 마음을 애써 숨기고 거짓말을 늘어놨다.
“그런데 안면이 손상돼서 얼굴로는 구분이 잘 안 되고, 특이사항으로는 목에 점이 있다고 하더라고. 볼록 솟아오른 갈색 점. 새끼손톱 반 정도 크기의 그런 점.”
세완은 그가 원장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전달했다.
그가 소원의 대답을 숨죽여 기다렸다.
세완은 소원이 당당하게 아니라고 할 줄 알았다. 왜냐하면 원장이 점이 있는 건 동생이 아닌 언니라고 했으니까.
그는 소원의 부정을 기다렸다. 그런데 소원의 반응이 이상했다.
「엄마, 아니, 엄마, 아니, 아니, 아저씨, 엄마…… 엄마…….」
막 말을 배운 아이처럼 말을 더듬더니 급기야는 울음을 터트렸다.
「우리 엄마, 우리 엄마 점이 있어요. 점이 있는데…… 엄마가 왜 죽어요? 우리 엄마가 왜 시신으로 발견돼요? 우리 엄마 괜찮다고 했는데!」
소원이 비명을 지르듯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세완도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도대체 백희경이 제 신분을 몇 번이나 속였는지 모르겠다.
“아닐 수도 있으니까, 울지 말고, 아저씨가 나중에 전화할게.”
일단 소원을 달래 전화를 끊었고 세완은 머릿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백희경은 이은의 친엄마가 아니다? 사실.
백희경이 이은의 손을 잡고 보육원에 데려다줬다? 사실.
이은을 죽이려고 하는데 백희경이 한 손 거들었다? 사실.
백희경이 이은의 친모가 아니고, 이은을 직접 보육원에 데려다준 당사자이고, 무엇보다 그녀가 이은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
지금까지 그들이 알아낸 것은 여기까지였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할 것 같았다.
현재의 소원의 엄마로 살고 있는 백희경은 ‘원래의 백희경’이 아니다.
이은과 현재의 백희경이 혈연관계라는 것은 명확하다. 유전자검사 결과가 증명한다. 하지만 모녀 관계는 아니고 3촌 관계다.
즉, 조카와 이모라는 건데…….
“젠장.”
지나치게 복잡하고 난감한 관계에 세완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다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 상황을 정리하면 첫째, 그러니까 이은의 친모로 알려진 존재가 자신의 동생의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사실 이은의 친모는 첫째가 아닌 둘째, 그러니까 ‘원래의 백희경’이고.
세완은 그 즉시 찬주를 소환했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까지 모은 모든 퍼즐을 종합했다.
“내 생각에는 백희경이, 그러니까 ‘원래의 백희경’이 미혼모야. 그래서 이은이의 엄마로 알려진 ‘현재의 백희경’, 그러니까 언니한테 딸을 맡긴 거 같아.”
“그리고?”
“김이은은 이모를 엄마로 알고 컸다. 아직까지는 자매의 관계는 괜찮았어. 그런데 바람을 폈다는 얘기가 있잖아? 김이은의 아버지가? 근데 그 바람피운 게 동생 쪽인 거지. 그러니까 처제!”
찬주가 화이트보드 위에서 레이저포인터를 휘두르면서 말을 이어 갔다.
“아버지는 처제랑 바람을 폈고, 언니 쪽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고 분노했다. 자신은 동생의 딸까지 키워 주고 있는데 어떻게 내 남편과 바람을 피우나? 그러면서 두 사람을 살해하고, 이은이를 보육원에 맡기고, 자신은 재산을 정리해서 도주한 거야.”
“그럼 뒤늦게 김이은을 찾은 이유는?”
“돈? 그거 말고 또 있나? 사실 남편이랑 바람피운 동생 딸이 뭐 그리 예쁘겠어. 보육원에 데려다준 게 감사한 거지. 나 같으면 그냥 묻어버리든지 했다.”
찬주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쉽게 이은의 죽음을 언급하는 찬주의 말에 세완이 눈을 날카롭게 떴다.
인생사 다 그렇고 그런 거 아니겠느냐며 시니컬하게 말하던 찬주는 순간 오싹함을 느끼고 자세를 바로 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어쩌면 복수심일 수도 있고. 복합적일 수도 있고.”
다만, 대부분의 퍼즐은 맞춘 것 같은데 백희경이 왜 이은을 죽이려고 하는지는 모르겠다며 찬주가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명확한 건 있지. 인간관계가 복잡해지는 이유는 대부분 돈이야. 아니면 치정 관계. 일단 내가 보기에 첫째랑 둘째 그리고 이은이 아버지. 이 세 사람의 관계는 대충 맞는 거 같다.”
내 인생도 더럽고 꼬였지만 네 인생도 쉽지는 않다며 찬주가 BS그룹 어딘가에 있을 이은을 떠올리며 그녀를 동정했다.
“부모님 대에 있었던 일에 대한 또 다른 가설이 생길 가능성은?”
“뭐, 이쯤 되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않나?”
찬주가 말했다. 세완도 동의했다.
사실 백희경이 이은의 친이모라고 생각하면서도 꺼림칙한 부분이 있긴 했다. 처음 섬에 찾아갔을 때 백희경이 술술 꺼내 놓는 이은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너무 상세했다.
자매이다 보니, 그리고 이모이다 보니 옆에서 보고 들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이은의 양육 과정 전반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원래의 백희경’의 기록 어디에도 출산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으로 봐서 아마 출산하고, 병원에 다니는 그 모든 것을 언니의 이름으로 한 듯했다.
때문에 처음 출산할 떄부터 친엄마에 대한 기록이 바뀌었고, 이은의 양육을 언니인 ‘현재의 백희경’이 했다고 가정하면 그날 그녀가 이야기했던 수많은 기억들을 그들도 이해할 수 있었다.
1. 김이은의 친엄마는 ‘원래의 백희경’이다.
2. ‘원래의 백희경’은 미혼모로 이은을 낳고, 그녀를 자신의 언니인 ‘현재의 백희경’에게 양녀로 보냈다.
3. ‘현재의 백희경’이 김이은을 양육했다.
그리고 그 이후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생과 남편의 바람을 알게 된 언니가 맞은 파국이었다.
“부부○리닉 바람과 전쟁 그 자체구나!”
“사랑과 전쟁이겠지.”
어느 방송사의 인기 프로그램 이름을 정정해 주며 세완이 심란한 표정을 지었다.
워낙에 관계가 복잡하다 보니 이렇게 정리를 해 놨음에도 한눈에 안 들어왔다. 세완은 욕설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 모르지는 않지만 이건 정말 해도 해도 너무했다.
“바람을 피우려면 제대로 숨기던가, 그것도 못 할 거 같으면 아예 생판 모르는 사람이랑 피울 일이지…….”
도대체 어쩌자고 처제와 바람을 피워서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며 세완이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은의 친모 또한, 제 딸을 언니에게 맡겼다면 감사한 줄 알고 살 일이지 뭐 잘했다고 그 남편이랑 바람을 피운 건지 모르겠다.
욕정에 눈이 멀어 온갖 인륜을 다 저버린 존재들을 보며 세완은 이들이 지독할 정도로 금욕적인 이은과 혈연이라는 사실이 정말 의심스러웠다.
“백희경, 아니……. 하아! 누구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네.”
호칭조차 헷갈리게 만든 두 사람, 아니 세 사람을 향해 다시금 욕설을 내뱉은 세완이 찬주에게 물었다.
“‘현재의 백희경’이 이은이의 친부모를 죽인 증거는 찾을 수 있을까?”
“……나보고 찾으라고?”
찬주가 질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