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시작이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그 물꼬를 트니 그들은 다시 예전과 비슷한 흉내는 낼 수 있게 되었다.
이은은 상무실로 돌아왔고, 세완은 기뻐했으며, 윤 대리는 회장실로 되돌아갔다.
인수인계 문제가 걸리긴 했지만 자리를 비운 기간이 겨우 두 달 남짓인 데다가 윤 대리가 워낙에 꼼꼼하게 정리를 잘 해 놔서 오래 걸리진 않았다.
“그동안 상무님이랑 일 어떻게 하셨어요? 진짜 입에 곰팡이 피는 줄 알았어요. 아니다. 너무 추우면 곰팡이도 못 피겠구나. 아유, 나는 여기 다시는 못 있겠다.”
윤 대리가 이상한 말을 흘리긴 했지만 일이 힘들어서 그랬으려니, 이은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의미 없는 이야기에까지 신경 쓰기엔 그녀는 너무 바빴다.
복귀와 동시에 업무 파악에 들어갔고, 그러고 나니 세완이 회사 두 곳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겸직 금지’라는 근로계약서에 명시된 문구는 도대체 어디에다가 갖다 버린 건지 세완은 당당하게 양다리 중이었다.
그렇다고 뭐라고 말을 하기엔 그는 요즘 지나치게 성실했다.
새벽 4시 반에 BS그룹으로 출근해서 오전 8시 반에 퇴근, 이후 태산에 출근해서 그곳에서 일을 하다가 오후 4시 쯤 다시 BS그룹으로 와서 업무를 이어갔다.
퇴근은 무조건 자정 이후였다.
세완이 바쁘게 열심히 일하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가 아니라 ‘우리 회사 한량 상사가 달라졌어요’였다.
이은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일하는 이세완이 정말로 낯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이래도 괜찮나…….”
이은이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람의 체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수면 시간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 루틴이라면 거의 수명을 깎아 먹으면서까지 일하는 것과 진배없었다.
회사의 업무를 핑계로 그를 말릴 수 없다면 그 다음에 남은 것은 세완의 건강을 걱정해서 그렇다는 말밖에 없는데 그 말을 하기엔 지금 그들의 사이가 문제였다.
물론 선택은 이은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꾸만 과거의 그들 사이가 그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세완의 스케줄표를 보면서, 그리고 그를 서포트하는 일주일 동안 그를 지켜보며 이은은 제 소중한 소꿉친구가 일하다가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어이없는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지금 세완이 30대 초반에 과로사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 또한 진실이었다.
“이런 주제에 도대체 나랑 출퇴근은 어떻게 하려고 한 거야?”
이은이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기에 그저 속상해 한숨만 연거푸 내쉬었다.
비서란 상사의 업무 내외적인 부분을 보좌하는 사람이다. 폭넓게는 건강까지 신경 써서 상사가 최고의 컨디션과 최고의 조건 속에서 업무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궁리하던 이은은 원론적인 이야기까지 끌어와서 제가 세완의 일에 참견해야 하는 근거를 마련했다.
하지만 세완에게 말문을 열 방법이 없어 벙어리 냉가슴만 앓았다.
참 어려웠다.
* * *
이은이 어려운 것은 세완도 마찬가지였다.
윤세와 둘이 있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사무실에 데려다 놨는데 그가 잘못 생각한 건지 공연히 아픈 녀석 부려 먹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이은의 복귀 이후 세완은 많은 부분에서 편해졌다.
윤 대리가 유능하다고는 하지만 이미 손을 맞춰 온 수년의 세월이 있었기에 그는 이은의 일 처리 방식이 좀 더 익숙하고 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편하고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여기!”
“이걸 왜 이윤세 씨가 들고 옵니까?”
“김 비서님이 다리가 아프다고 하셔서요.”
“……나가 보세요.”
그의 눈앞에서 얼쩡거리는 윤세의 모습도 거슬렸고, ‘태산’에 가서 일하는 동안 사무실에 윤세와 이은이 함께 있다는 사실도 거슬렸다.
찬주의 도움을 받아 이은의 옆에 있을 여성 경호원을 고용하기는 했지만 이은의 옆에 있는 존재가 한 명 더 추가된 거지 윤세가 해고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상무님, 태산에 가실 시간입니다.」
오전 8시 반만 되면 그가 이 사무실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인터폰을 통해 일정을 알려주는 이은의 목소리는 정말 반갑지만 그가 떠난 뒤, 윤세와 함께 빈 사무실에 있을 김이은의 모습을 상상하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질투 났다.
물론 전보다는 나았다. 목소리라도 듣고 얼굴이라도 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목소리 듣고 얼굴만 보는 걸로 족할 거면 이은과 함께 찍은 핸드폰 동영상을 보지!
심지어 그쪽 김이은이 훨씬 더 다정했다. 동영상 속 이은은 웃어 주기라도 하지 현실 속 김이은은 매일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그것도 좋다고 실실대는 그가 할 말이 아니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가 태산으로 출근하는 8시 반부터 오후 4시까지 윤세와 이은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세완은 매우 거슬렸다.
그렇다고 태산으로 가지 않을 수도 없고…….
인생이라는 것이 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세완이 지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만약 그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첫 번째로는 엄마 만나러 간다는 이은을 목숨 걸고 말릴 거고, 두 번째로는 이은의 방에 술과 안주를 들고 간 그를 미친 듯이 말릴 거다.
전자는 모두를 위해서, 후자는 그를 위해서.
술이 그를 마신 건지, 그가 술을 마신 건지 잘은 모르겠는데 기억이 완전히 날아가서 세완은 지금도 그날 자신이 무슨 실수를 했고,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은이 변했는지 잘 모르겠다.
뇌를 쥐어짜고, 또 쥐어짠 결과 이은을 보고 못생겼다고 한 기억까지는 어렴풋이 나는데 그다음을 모르겠다.
“설마 못생겨서 앞으로 평생 시집 못 간다고 하기라도 했나…….”
그나마 가능성 있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세완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가 그녀의 외모에 대해 뭐라고 했든 그건 진심이 아니었을 거다. 이은의 또랑또랑한 외모는 객관적으로 봐도 상당히 예뻤고, 주관적으로 보면 엄청나게 예뻤다.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차였지만 이은의 외모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못생겼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니면 혹시 좋아한다고 고백이라도 했나?
그래서 그녀가 그를 피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봤지만 그때는 세완도 자신의 마음을 미처 몰랐을 때였다.
세완은 그날 이후 여전히 차가운 이은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떻게 머리를 굴려도 방법이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좋아하는 사람’을 운운했음에도 아직 윤세와 이은의 사이에는 그다지 진척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매일매일 심리적 거리두기 상태인 그들을 체크하며 안심하지만 또 매일매일 그들이 혹시나 어제보다 얼마나 더 가까워졌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그 자체로 고문이었다.
“자학하는 취미라도 있어?”
혹시 그가 모르는 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느냐고 질문하고 하던 찬주를 떠올리며 세완이 한숨 아닌 한숨을 내쉬었다.
참 어려웠다.
* * *
이은의 복귀는 두 사람 그 어느 누구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일이 힘들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그랬다.
각자가 품고 있는 마음을 몰랐을 때라면 모르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불편한 관계인데 매일 얼굴을 봐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불편한 상황인데 윤세나 새로 온 경호원이 그들의 눈앞에서 얼쩡거리고, 그 와중에 소원까지 이유 없이 그들을 슬슬 피했다.
물론 소원이나 경호원들은 이은과 세완에게 있어 단 일말의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어쨌거나 결론은 자꾸만 그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일들이 주변에 산재해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앉아도 가슴이 답답하고, 서 있어도 가슴이 답답하고, 회사에 있든 집에 있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슴이 답답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꾸역꾸역 어떻게든 이 관계를 이어나가려고 노력했다.
이대로 서로를 피하게 되면 정말 남남이 될까 두려워서 두 사람은 표면적인 관계로나마 가족 혹은 친구로 존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박 팀장으로부터 세완에게 전화가 왔다.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에 들어간 박 팀장으로 인하여 갑자기 상황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 * *
백희경은 이은의 친엄마가 아니다? 사실.
백희경이 이은의 손을 잡고 보육원에 데려다줬다? 사실.
이은을 죽이려고 하는데 백희경이 한 손 거들었다? 사실.
백희경이 이은의 친모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세완은 이 회장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상황을 원점으로 되돌려 전수조사를 시작했다.
그들은 25년 전, 백희경이 이은을 맡겼던 보육원에도 찾아갔다. 그리고 백희경에 대한 정보를 구했다.
원장의 말에 따르자면 이은의 친모가 언니, 백희경이 동생이라고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혹시 백희경이 이은의 친모를 죽였을 가능성에 대하여 물어 보니…….
“그럴 리가요. 얼마나 사이가 좋은 아이들이었는데요.”
그녀가 그 모든 것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라고 부정했다.
“제 손으로 기른 아이들입니다. 제가 가장 잘 알아요.”
천애 고아로 함께 보육원에 들어온 두 자매는 어지간히도 사이가 좋았다고 했다. 그리고 마음도 착해서 두 사람 모두 성인이 된 이후로도 주기적으로 보육원을 찾아 봉사했다고 했다.
기댈 어른 없는 두 자매는 가끔 고민이 있을 때면 보육원을 찾았기에 원장은 두 사람과 적잖게 친분이 있었고, 그래서 망설임 없이 이은을 받아 줬다고 했다.
원장은 부정했지만 그럼에도 세완은 의심을 지울 수가 없어서…….
“백희경이 이은이를 데리고 왔을 때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세완이 물었다.
“글쎄요,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원장은 25년 전의 일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