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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90)화 (90/100)

90화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 의사보다는 네 의사가 먼저라는 세완의 말에 이은은 왠지 모를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그녀는 세완의 이런 배려를 그가 그저 다정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물론 이세완이 다정한 사람인 것은 맞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그녀의 의견에 모두 맞춰 주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그녀가 많이 어리석었다.

어째서 사람은 지나고 난 뒤에야 앞전에 있었던 일들의 의미를 깨닫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이은이 생각했다.

만약 내가 진작 네 마음을 알았다면…….

그래서 네 마음을 진작 잘라내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너는 나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이은이 세완을 바라보았다.

세완은 말간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가정이다.

이은은 망상을 떨치고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세완에게 전달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는 건 알아. 그런데 나는 내일 바로 복귀를 했으면 하거든.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거 같아. 넌 어떻게 생각해?”

“내일?”

세완은 도박 하우스에 있다가 로또 1등에 당첨된 걸 안 사람처럼 억지로 기쁨을 가리려고 애쓰면서 말했다.

하지만 점점 위로 올라가는 입꼬리는 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은은 그걸 애써 모르는 척하면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굳이 내일이 아니더라도 빠를수록 좋을 거 같아. 이쪽 일도 감이라는 게 중요한데 너무 오래 쉬어서 현장 감각이 떨어지면 어떻게 해?”

이대로 세완을 보좌하다가 비서실장직을 맡고, 좀 더 나이가 들면 계열사 대표 직함 하나 정도는 달 계획을 세우고 살았던 이은이다.

어쩌면 계열사 몇 개를 분할 받을 수도 있고.

어쨌거나 오직 커리어 우먼으로 사는 미래만 보고 살아온 자타공인 워커홀릭은 세완에게 자신의 직장 복귀를 요구했다.

“물론 쉬운 일 아닌 건 알아. 지금 상무실 비서로 있는 윤 대리 문제도 있고…….”

“윤 대리는 문제없어!”

문제가 있더라도 없게 만들어 주겠다는 의지를 담아 세완이 소리쳤다.

“너만 복귀하자고 하면 뭐가 문제겠어. 내일부터 나랑 같이 출근하자.”

세완은 제가 이은의 기사가 되어 출퇴근길을 책임지겠다며 기운차게 말했다.

보통 상무와 비서가 함께 움직일 때면, 비서가 상무의 운전기사직을 수행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이지 상하 관계에 대한 편견이 없는 상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이은이 거절했다.

“미안해. 윤세 씨랑 같이 움직여야 해서.”

이 회장 가라사대, 저택 주변에 경호원들을 깔아놓은 것처럼 회사 내에도 경호원들을 배치하고, 보안에 특별히 신경을 쓰겠지만 그럼에도 밀착 경호원은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니 어딘가로 이동할 때면 윤세와 꼭 함께 움직이라며 이 회장이 신신당부를 했다.

이은은 이 회장이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를 세완에게 그대로 전달했다.

“……그러면 그 사람이랑 너랑 나랑 셋이 움직이는 건?”

경호하는 사람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으냐고 세완이 질문했다.

BS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상속인, 그룹 본사의 젊은 상무!

세완은 현재 제 직함과 위치도 잊고 누군가 이은을 공격하려고 하면 제 몸으로 그것을 막겠다며 제 튼튼함을 자랑했다.

‘나 다치는 거보다 너 다치는 게 더 무섭다만…….’

이은이 다치면 인터넷 기사 한 줄 나오고 말겠지만, 세완이 다치면 전 세계의 경제지에 기사가 난다.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매년 선정하는 세계 부자 순위(The World's Billionaries)에서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는 이 회장의 위엄을 생각하면 나오고도 남았다.

이은이 세완에게 말했다.

“그냥 둘이 갈게.”

“그 사람이 운전을 못할 수도 있잖아.”

몸이 약해서일까, 이은은 차를 오래 타면 멀미를 한다.

최대한 차가 흔들리지 않게 하면 그 횟수나 정도가 줄어들지만 그나마도 한 시간 이상 차를 타면 그녀의 몸이 녹초가 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 사람 운전 잘해. 병원 갈 때 몇 번 타고 갔잖아.”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랑 둘이 타고 가는 건데…….”

“함께 산 지 벌써 두 달도 훨씬 넘었는걸. 아예 모르는 사람은 아니지. 그리고 할아버지가 고용한 사람인데 못 믿을 이유가 없잖아.”

질척거리는 세완의 미련을 이은이 합리적으로 제거했다.

세완은 그나마도 부족한 듯 어떻게든 이은의 마음을 돌려세우려고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복귀만으로도 감사하다!

아예 몇 주째 얼굴도 못 보던 것을 생각하면 상무와 비서의 관계로나마 그녀와 얼굴을 볼 수 있다는 데에 감사할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개인적으로 경호원을 고용하는 건 괜찮지? 찬주가 그러는데 여자 경호원도 필요하대. 화장실 갈 때나 뭐, 여자들만 있을 때 말이야. 그럴 때 위험할 수도 있대.”

세완은 찬주를 팔아 여성 경호원을 영업했다.

이은은 뭐 하러 자기 때문에 돈을 쓰냐고 손사래를 쳤다. 출퇴근할 때는 윤세와 함께이고, 무엇보다 아이디 카드가 없는 사람은 회사 건물 출입을 할 수가 없었다.

이은은 굳이 이러한 상황에 추가로 경호원이 더 필요한가, 고민했지만 부득불 경호원이 화장실을 가고 싶을 때도 있지 않느냐며 교대 근무의 필요성을 우겨대는 세완의 주장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세완은 출퇴근할 때를 포함해 윤세와 이은만 한 공간에 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마냥 기뻤다.

그렇게 복귀와 관련한 사항들에 대해 하나씩 합의가 이뤄졌다. 그리고 최종 단계에서 이은과 세완이 손을 마주 잡았다.

“잘 부탁해!”

“나도!”

서로가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민 악수라기보다는 세완이 반강제로 요청한 합의 후 악수였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만족했다.

이은이 이제 볼 일 다 봤다며 몸을 일으켰다.

“음, 좀 더 있다가 가도 되는데.”

세완은 미련이 가득한 모습으로 졸졸졸 이은을 따라왔다.

그는 문을 열어 주고 닫아 주면서 어떻게든 이은의 불편을 덜어 주고 싶은 듯했다.

그 마음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보여서 아직까지는 예전과 같이 생각할 수 없는 이은이 아스라한 표정을 지었다.

“세완아, 미안해.”

“뭐가?”

“그냥. 여러모로.”

마음 못 받아 줘서 미안해. 그런데 너만 아픈 거 아니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

나도 어쩌면, 시나브로, 널 좋아했을지도 몰라.

세완도 이은도, 두 사람 모두 달리 연애하는 일 없이 둘이서만 붙어 다니는 건 아마 그 이유 때문인 것 같다.

세완이 제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았듯이 이은도 그녀의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았다.

그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은 생각에는 다행 같다.

철없는 사춘기 풋사랑으로 이어져 가족으로도 남을 수 없는 사이가 되는 것보다는 지금 이대로,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로 남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머리 검은 짐승이라는 말이나, 가진 거 없는 여자애가 은혜도 모르고 몸을 들이밀었다느니 하는 그런 천박한 소리가 듣기 싫어서 한 선택이긴 했지만 이은은 세완을 위해서라도 그녀의 선택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 여러모로가 무슨 뜻인데?”

그녀의 말에서 뭔가 이상한 감정을 느꼈는지 내내 저자세이던 세완이 갑자기 날카로움을 드러냈다.

“무슨 뜻이긴.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그리고 이은은 그 날카로움을 억눌렀다.

“별 의미 없어.”

“별 의미 없는 게 아닌데…….”

“내가 의미 없다면 없는 거야. 자, 내일 출근해야지. 이만 자고 내일 보자.”

세완은 계속해서 날카로움을 엿보였지만 내일 보자는 그녀의 말에 순식간에 제 날카로움을 억눌렀다.

하여간 단순하긴 엄청 단순했다.

“잘 자.”

“응, 너도. 잘 자. 좋은 꿈 꾸고. 내일 꼭 늦지 말고.”

이은의 한 마디에 세완의 말이 네 마디, 다섯 마디가 붙었다.

말 많은 이세완은 자러 간다는 그녀를 붙잡고 방 안의 에어컨은 너무 에어컨 온도를 너무 낮추지 마라,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감기에 걸릴 수도 있다, 배가 차가우면 배앓이를 할 수도 있으니 이불을 꼭 덮고 자라는 등 80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할 걱정까지 모두 들어놓았다.

“너는 손이 차가우니까…….”

그녀의 손을 차마 놓지 못하고 온갖 이야기들을 주워 삼키는 세완의 모습에 이은은 이 굿나잇 인사의 마지막을 장식하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세완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내면서 말했다.

“잘 자.”

자러 가는 것뿐인데 구구절절한 인사가 뭐가 필요할까, 이은은 세완의 손에서 제 손을 야무지게 빼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가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에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세완인 듯했다.

이은은 그대로 방문에 몸을 기대고 주르륵 주저앉았다.

어리석긴, 그리고 바보 같긴.

이유는 모르겠는데 어째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그녀는 이세완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쩌면 좋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안 좋아한다.

한없이 다정하고 부드러운 그가 그녀의 마음을 조금 들썩거려 놓았고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세완이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평범한 부모를 가진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랐을 수 있다. 그녀처럼 기댈 곳 없는 고아로 태어나, 지지리 궁상으로 살았어도 이야기가 좀 달라졌을 것 같긴 하다.

전업주부 남편 하나 정도는 먹여 살릴 능력이 있는 여자다, 김이은은.

하지만 재벌가의 유일한 후계자인 이세완을 만날 자신은 없었다.

세상 누구와도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고, 어떤 전투에서든 승리할 자신이 있는데 이 회장에게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었다는 그 말만큼은 들을 자신이 없었다.

“미안해.”

나는 너를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래도 내가 더 소중해.

이은은 세완을 사랑하기 위해 그녀의 세계를 부수는 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세완이 들을 수 없는 사과만 조용히 아무도 몰래 읊조렸다.

이것으로 됐다. 괜찮다. 그들은 그냥 친구관계인 것이 가장 좋다. 이은은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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