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들어와요.”
세완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영혼 없이 말했다.
사실 들어오든지 말든지 별 관심도 없지만 상대가 그에게 볼일이 있으니 들어왔다 가겠거니, 그냥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래도 이은이 그의 방을 찾아올 수도 있다 생각했다.
거의 매일같이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서로의 방을 오가고, 매일매일 서로의 하루를 공유했는데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 중요한들 그걸 하루 만에 무 자르듯이 딱 끊을 수 있겠냐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떠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도 어쩌면 거짓말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순진하게 이은의 말을 전부 다 믿기에는 상황이 너무나도 공교로웠다.
이은이 그를 멀리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이은의 방에서 술을 마시고 잠든 그날 바로 그 다음 날의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처음부터 세완을 멀리하고자 했다면 애초에 술과 안주를 든 세완을 방에 들이지 않았겠지!
그래서 세완은 자신이 뭔가 큰 죄를 짓고, 그에 화가 난 이은이 그에게 선을 긋는 거라고 어떻게든 좋게 생각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이은은 달라지지 않았고, 급기야 이은과 윤세는 갈수록 친해졌다.
그리고 요즘은 아주 친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결혼 이야기까지 나오는 모양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는데 나는 걔 안 좋아해요. 그러면 안 되는 사이에요, 우리. 내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윤세 씨 같은 사람일 거예요, 아마.”
세완은 아까 훔쳐 들은 이은과 윤세의 대화를 떠올렸다.
“윤세 씨 같은 사람이라…….”
잠시 그 말을 곱씹은 세완이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짜증이 나고, 헛웃음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세완은 ‘윤세 씨 같은 사람’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윤세는 되고 세완은 안 되는 이유가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그가 공부를 못해서 그런 것일까, 생각 없이 살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전부 다일까!
그는 이은이 결혼을 해도 덤덤할 거라고 생각했다.
제 마음을 자각하지도 못했던 바보 천치 주제에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은이 좋은 사람과 결혼을 한다면 당연히 축복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축하해 주고, 축복해 주고, 어쩌면 그가 부케를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세완과 결혼할 여자가 아니라 이세완 본인이 말이다.
세완은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아유, 우리 세완이 이러다가 이은이 나중에 결혼하면 어쩌려고 그래.”
어린 시절, 이은만 졸졸 따라다니는 세완을 보며 춘천댁이 웃음 반, 걱정 반으로 말할 때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은이가 결혼하면 뭐? 그럼 나는 이은이 남편이랑도 친구 하고, 이은이랑도 친구 해야지! 그래서 매일매일 그 집에 놀러 갈 거야!
어린 이세완은 그렇게 생각했다.
일곱 살, 여덟 살 꼬마에게는 결혼이 너무나도 먼 나라의 일이기에 그런 것도 있었다.
그때는 이은에게 누군가가 생긴다는 것이 이런 느낌일 줄 미처 몰랐다.
“젠장.”
가만히 앉아서 과거를 반추하던 세완의 입술에서 결국 욕설이 튀어나왔다. 고요함을 가장하고 마우스를 클릭하던 남자는 순간 치솟은 반감에 자신도 모르게 마우스를 벽으로 힘껏 던져버렸다.
퍽, 소리와 함께 작은 플라스틱 조각들이 허공에서 흩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 모습에 세완의 화가 조금은 사그라지려는 찰나였다.
“아!”
짧은 단말마가 들렸다. 젊은 여자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가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세완이 깜짝 놀라서 몸을 돌렸다. 이은이었다.
“이은아!”
세완은 처음에는 놀라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다음에는 혹시라도 플라스틱 파편이 이은에게 튀지 않았는지를 걱정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제 못된 성질머리가 이은에게 들통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워서 변명을 주워 삼켰다.
“아니,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마우스 고장 나서……. 그러니까…….”
어떻게든 변명을 하려고 했는데 그 모든 것이 하나같이 덜떨어진 반푼이가 하는 말 같았다.
망했구나!
답답한 마음에 세완이 손을 올려 머리를 벅벅 긁었다.
“미안해. 일이 좀 안 풀려서 성질을 부렸어. 내가 나빴네.”
깨 먹은 것은 세완의 마우스고, 그로 인해 이은이 피해 입은 것은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이은이 놀랐을지도 모르니까 이건 세완의 잘못이다.
세완은 익숙한 모습으로 일단 사과부터 했다. 이은은 말없이 그런 세완을 바라보았다.
마우스를 던지는 모습에 살짝 놀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이 안 풀려서 그랬다니,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이은도 가끔 일이 안 풀리고 속상하고 머리가 아플 때면 들고 있던 펜을 집어던진다거나, 아니면 아예 오락실로 가서 총 게임을 하거나 해서 스트레스를 푼다.
놀란 건 없었다. 그녀 때문에 세완이 이렇게 스트레스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미안할 뿐이지.
계속해서 서서 물끄러미 그를 보는 이은의 모습이 세완은 지독하게 낯설었다. 세완은 어떻게든 예전 두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앉을래?”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예전처럼 제 침대에 앉으라고 권했다.
사실 평소였다면 그가 말을 하기도 전에 이은이 먼저 앉았을 거다. 하지만 제 침대에 앉으라고 권하는 그때, 얼마 전 이은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서로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모를까 이미 생겼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게 예의인 것 같아.”
어떻게 그를 바닥에 두고 갈 수 있냐는 그의 질문에 이은은 자신과 일말의 상관도 없는 다 큰 총각을 과년한 처녀의 침대에 재울 생각이 없다고 했다.
더불어 같은 방에서도 잘 수 없다고 했다.
다 큰 총각을 제 침대에 둘 수 없다고 했으니 반대의 경우도 싫겠지!
어떻게 해야 하나, 세완이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은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괜찮아.”
앉아서 이야기를 할 정도로 긴 용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완은 다르게 생각한 듯했다.
“그래. 내 침대에 앉기가 좀 그렇겠지. 오해받기가 싫으니까.”
그 말을 내뱉은 세완이 벌떡 일어나더니 책상 의자를 그녀에게 양보했다.
“여기 앉아. 의자니까 이건 괜찮지?”
세완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했다.
의자와 침대의 문제가 아니라 앉아서 이야기를 해야 할 정도로 길게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는데 이세완 머리는 자꾸만 다른 쪽으로 생각의 가지치기를 했다.
그녀 입으로 다 큰 처녀 총각들끼리 이제 다시는 서로의 방을 찾지 말자고 했는데 어떻게 그녀가 이 방에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나!
이은은 참 답답하다고 세완을 타박하며 냉정하게 할 말만 하고 방을 나서고 싶었다. 하지만 주인 잃은 강아지 같은 모습의 이세완이 참 마음에 걸렸다.
“여기 앉아. 응?”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연신 앉기를 권하는 세완이 이은은 정말 속상했다.
넌 도대체 왜 그러니! 남들은 계산적으로 여자를 잘만 만나는데 너는 계산도 제대로 못 하고!
이유는 모르겠는데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다 나올 것 같았다.
그녀의 표정이 심상찮아 보였는지 세완은 앉는 게 싫으면 서 있어도 괜찮다고 했다. 혹시 그녀의 다리가 아플까 걱정돼서 권한 거라면서 세완은 양손을 흔들었다.
이 모습도 속상하고, 저 모습도 속상하고…….
답답한 가슴을 두드린 이은은 세완을 바라보았다. 세완은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손가락을 폈다 오므렸다 하면서 내심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이은은 마음을 결정했다.
손을 뻗어 제 옆으로 의자를 당긴 이은이 의자에 앉았다.
고작에 의자에 앉은 것뿐인데 세완은 뭐가 좋은지 환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이은은 자리에 앉기로 자신의 결심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말했다.
“너도 앉아. 할 얘기 있어서 왔어.”
“어? 어!”
세완이 냉큼 제 침대에 앉았다.
침대에 앉은 세완과, 책상 의자에 앉은 이은이 마주 보고 보았다. 이은이 말했다.
“아까 밥 먹을 때, 할아버지가 그러셨거든.”
“……뭐라고?”
“회사 복귀.”
“복귀하게?”
세완의 얼굴이 그녀가 의자에 앉았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바뀌었다. 이은은 그 모습을 애써 모르는 척하면서 세완에게 말했다.
“계속 집에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럼 언제부터?”
“안 그래도 그 부분을 너랑 논의하러 왔거든.”
이 회장은 이은에게 회사에 복귀할 때는 복귀하더라도 그 부분과 관련한 자세한 사항은 세완과 함께 의논해 보라고 했다.
“너는 내가 언제 복귀하면 좋을 거 같아?”
“……네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게 최선이긴 하지.”
세완은 오늘 당장, 지금 이 시간부터 복귀하라는 말을 기도 아래로 꾹꾹 밀어 넣었다. 대신 이은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코자 한다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너는 내가 언제 복귀하든 상관없어?”
“나야 일찍 하면 일찍 할수록 좋지. 하지만 네 몸도 그렇고, 네 의사를 가장 우선해야 하는 거잖아.”
이은의 복귀가 당겨지면 윤세 놈과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든다.
물론 복귀를 한다고 해도 이 회장이 윤세를 자를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소한 둘이 24시간 붙어 있으면서 인간적인 친분을 쌓는 것만큼은 막을 수 있을 듯했다.
세완은 일단 지금은 그거 하나면 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