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세완은 별생각이 없다면서 식사를 거절했고, 남은 사람들만 모여 저녁을 먹었다.
“맛있는데…….”
이은이 슬쩍 2층을 보며 미련을 떨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그렇게 무참하게 잘라낸 주제에 2층까지 백숙을 배달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은이 깨작거리며 백숙의 살점을 뜯어 먹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이 회장이 식사를 하다 말고 불쑥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복귀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구나.”
“……?”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싶어 일동의 시선이 이 회장에게 모였을 때, 그가 이은을 보며 질문했다.
“푹 쉬었지? 한 일이 년은 쉬게 두려고 했는데 회사 돌아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말이다. 아픈 네게 다시 돌아오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부담이 될 것은 알지만…….”
“아니요! 전 괜찮아요. 복귀하고 싶습니다!”
이은이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복귀 이야기는 진작부터 꺼냈음에도 계속해서 이 회장이 쳐 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가족들 중 이 회장만 반대했다.
하지만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다 보니 이 회장의 의사를 무시할 수가 없어서 이은은 계속 쉬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이 회장의 입에서 복귀라는 말이 나오다니,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이은이 기뻐하며 반색했다.
그 모습을 이 회장이 복잡한 눈으로 바라봤다.
“내가, 늙은이가 욕심 때문에 너에게 회사에 나오라고 하기는 하는데 조심해야 한다.”
“네?”
“세완이가 말 안 해 주더냐? 그, 백희경 말이다.”
이 회장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세완의 이름이 나오자 이은은 순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회사에 복귀한다는 것은 세완과 24시간 거의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말과 동일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세완과 한껏 불편한 관계이니만큼 자타공인 워커 홀릭 아가씨는 제 복귀를 조금 더 미뤄야 하지 않나 하는 답지 않은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차피 부딪혀야 할 일이었다.
이은은 어서 복귀해서 필드에서 뛰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피어날 자신의 가치를 키워 나가고 싶었다.
아주 조금은 세완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도 있긴 했다.
이은도 이게 도대체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다. 세완의 마음이 부담스러워서 대놓고 그를 밀어내고 피해 다녔는데 막상 세완을 보기 어려워지니까 궁금해지는 것 말이다.
‘25년을 매일 같이 봤는데 몇 주째 이 상태니까 보고 싶을 수도 있지 뭐.’
애써 자신의 행동에 타당성을 부여했지만 거부하면 거부하는 거지 뭘 또 보고 싶어하는 마음까지 섞이나!
이은은 어떻게 애를 써도 제 마음을 모르겠다.
그렇게 이은의 머릿속이 잠깐의 쉼도 없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그 사실을 모르는 이 회장이 입을 열었다.
“이은아, 세완이가 말이다? 노력을 많이 했어.”
그는 세완의 근황에 대해서 이은에게 알려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은은 자세를 바로 하고 이 회장의 말을 경청했다.
백희경이 누군가의 고용인으로 들어갔다고 판단한 이후, 찬주와 세완은 직접 평창동 골목의 각 저택들을 방문했다.
한쪽은 BS그룹의 유일한 후계자, 또 한쪽은 현금 보유량으로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힌다는 현금 부자의 막내아들이었다. 부업으로 제3금융권을 겸하고 있는 소위 깡패 집안의.
그 어느 쪽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때문에 두 사람은 자신들의 배경에 감사하며 얼굴에 철판을 깔고 이웃들을 찾아가서 혹시 새로 들인 고용인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렇게 하면 질문을 들은 상대방은 모두 당혹스러워하면서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할 수가 없어서 두 사람은 죄송하다며 고개만 조아렸다.
저택의 주인들은 모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집사나 가사도우미를 불러 그들의 질문을 전달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느 누구도 새로 고용한 고용인이 있다는 대답을 한 사람이 없었다. 그것이 현재 상황이었다.
상대에게 빚질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온 동네에 있는 집들을 다 돌았는데 소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때문에 세완은 이후, 이 회장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이번 일은 이 회장으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사람들은 종종 재벌은 모든 것이 다 가능한 줄 안다. 그들에게는 불가능이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부러워한다.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다.
돈이 어려움을 조금 감해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남들이 어려운 일은 그들도 어려웠고, 남들이 못 하는 일은 그들도 못 했다.
자식 내외가 죽었을 때, 세완이 공부를 하지 않고 엇나갈 때, 이은이 납치당해 다쳤을 때…….
이 회장은 돈과 인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을 겪어 왔다. 백희경 사건 또한 그랬다.
연고가 없는 존재가 작정하고 자취를 감추니 아무리 돈이 많아도 찾기가 어려웠다. 백희경이 나타날 곳을 특정할 수가 없어서 더욱더 그랬다.
그나마 소원이 그들과 함께 있어 어느 정도 완충이 되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기대가 있긴 했지만 그들은 아직 백희경이 어째서 이은의 노리는지도 알아내지 못했다.
때문에 이렇게 모든 것이 미궁인 경우에는 피해의 가능성이 있는 존재가 좀 더 조심해야 했다.
제 손자가 불쌍해서, 그리고 욕심을 감출 수가 없어서 이은을 복귀시키지만 동시에 이은이 걱정되는 것 또한 사실인지라 이 회장은 몇 번이고 이은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아가, 조심해야 한다. 알았지?”
“네, 걱정 마세요.”
이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마음이 가라앉지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이은과 세완 모두 거대한 요람을 만들어 그곳에서 키우고 싶었다.
두 살 꼬마가 아닌 서른두 살 처녀 총각을 이 회장은 그렇게 키우고 싶었다.
다 큰 성인 남녀에게 도대체 무슨 망발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회장에게는 두 사람 모두 한없이 어리고 또 어린 존재들이라 그렇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에그, 늙으면 죽어야지.”
이 회장은 속 시커먼 노인네들이 자식을 휘두르기 위해 주절거린다던 그 말을 제 입으로 했다.
사실 모든 욕심을 다 접고 이은을 복직시키지 않는 방향도 생각해 보긴 했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쩌겠는가, 젊디젊은 사람을 집 안에만 가둬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백희경이 10년 동안 안 잡히면 그 10년 동안 이은을 집 안에만 둘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고민으로 인해 10년은 부쩍 늙은 얼굴을 한 이 회장이 재차 이은의 손을 잡고 당부했다.
“꼭 조심해야 한다. 이 할애비 마음 알지?”
“알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은이 순한 목소리로 그를 위로해서 이 회장은 더욱더 속이 불편했다.
쯧쯧. 이렇게 착한 녀석을…….
“내가 미안하다, 우리 아기! 내가 미안해.”
이 회장은 이은의 손을 두드리며 연신 사과의 말을 건넸다. 그리고 잠시 후, 고개를 들어 이은 옆에 있는 산 도둑놈 같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답게 생긴 정석 미남인지라 꽤 인기가 많은 윤세를 순식간에 산 도둑놈으로 만든 이 회장이 그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자네는 우리 이은이 잘 지키고!”
기운 없는 목소리로 다 죽어가더니 윤세를 향할 때만 그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입 다물고 얌전히 백숙을 먹은 죄밖에 없는 남자는 조금은 억울한 심정이지만 이내 심드렁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새끼와 남의 새끼가 다르다는 거야 뭐 옛날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 않나!
“이은이 옆 떠나지 말고!”
“네.”
“나쁜 놈들이 오면 차라리 자네가 다쳐! 우리 아기는 다치면 안 돼!”
“네.”
“목소리에 영혼이 없지 않나!”
“네.”
“이보게!”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윤세는 이 회장에게 잔소리 폭탄을 맞았다.
이 회장은 윤세에게 그렇게 정신을 빼놓고 살아서 어떻게 이은을 지키려는 거냐며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지적했다.
지금까지 다른 건 몰라도 일 처리가 부실하다고 타박을 들은 적은 없었던 윤세인지라 억울한 마음은 하늘 같지만 금융 치료가 그를 지원했다.
윤세는 마음을 비우고 월급 통장에 찍힐 숫자만 생각하기로 했다.
* * *
이은의 복귀가 결정된 바로 그 시간, 세완은 일을 하고 있었다.
이은과 말이라도 한번 하고 싶어서 일찍 귀가한 것이긴 하지만 이미 그건 요원한 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시 회사로 가고 싶지는 않았다.
회사에 가면 이 집에 이은과 육세, 두 사람만 남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집에는 이 회장도 있고, 춘천댁도 있고, 별채에 있는 고용인들까지 하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집에 거주하고 있지만 세완의 마음이 그렇다는 거다.
때문에 세완은 옷을 갈아입거나 씻을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회사에서 그랬듯 컴퓨터를 켜고 책상 앞에 앉았다.
일을 하다가 머리가 좀 맑아지면 씻고 잠이 들 생각이었다.
세완은 양복 재킷을 의자에 걸치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고, 넥타이는 살짝 느슨하게 한 뒤 트리플 모니터 앞에 앉아서 일에 열중했다.
첫 번째 모니터에서는 찬주와 ‘태산’의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보내 주는 자료가 초 단위로 업데이트됐고, 세 번째 모니터에서는 BS그룹의 시큐리티에서 보내 주는 자료들이 축적되고 있었다.
세완은 그중 알짜배기들만 뽑아서 두 번째 모니터로 옮긴 뒤, 직접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시뮬레이션 1과 시뮬레이션 2, 시뮬레이션 3…… 시뮬레이션 12.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상황과 가정, 가설들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BS전자 연구소에서 빌려 온 AI 프로그램이 열심히 제 몫을 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발 유의미한 결과 값이 좀 나와라, 세완이 피곤한 눈으로 컴퓨터를 조작하고 있을 때였다.
-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