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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비서의 수상한 휴가 (87)화 (87/100)

87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마세요.”

윤세의 질문에 이은이 화들짝 놀라면서 답했다.

“제가 어떻게 세완이를 만나요. 그냥 친구예요. 어릴 때부터 사이좋게 지낸 친구!”

“아닌 거 같은데…….”

그 어떤 친구가 제 여자사람친구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그 남자를 태워 죽일 것처럼 보고, 그 어떤 친구가 제 남자사람친구가 있던 자리를 그렇게 뜨겁고 열렬한 눈으로 본다는 것인지…….

윤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은은 마치 제 말이 신앙이라도 되는 것처럼 강하게 그의 말을 부정했다.

“윤세 씨도 그렇게 편하게 산 입장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럼 알잖아요. 내 주제에 어떻게 누구를 좋아합니까.”

이은은 그녀를 믿고 키워 준 이 회장을 배신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은 윤세의 표정은 더욱 더 미묘해졌다.

“우리 손자며느리가 말이야…….”

“어때? 예쁘지? 곧 우리 손자며느리가 될 아이네.”

“반하면 안 되네. 알지?”

재계의 늙은 여우라고 불릴 정도로 노회하고 수완 좋다는 대기업 회장답지 않은 주책없는 모습을 보이던 어떤 노인이 떠올랐다.

그는 이은의 경호를 하다가 혹시 시간이 남으면 이은에게 친한 척을 하라고도 했다. 세완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면 더 좋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그 모든 것이 로맨스 좋아하는 노인네의 망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이은 앞에서만 태도가 바뀌는 세완을 보고 이씨 집안 두 남자들의 희망 사항이라고 생각을 정정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틀린 모양이었다. 이은 또한 세완에게 마음이 있었다.

“아니, 조건 말고 마음 말입니다.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난 그걸 물었던 거 같은데요?”

마음이 없는 여자는 이은처럼 굴지 않는다.

여자라는 존재들이 자기가 마음 없는 사람에게는 얼마나 차갑고 냉정한데!

25년이 아니라 250년 동안 함께 자랐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윤세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이은을 봤다. 하지만 이은은 여전히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데 마음이 뭐가 중요해요? 물론 마음 없이는 못 만나지. 그런데 마음만 있다고 그게 이뤄져요?”

그녀가 윤세에게 질문을 던졌다. 윤세는 말없이 마른 입술만 적셨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황금만능주의의 최고봉인 재벌가에서, 정작 그 재벌가의 사람들은 돈보다는 사람을 보고 마음을 보는데 그 상대가 조건을 중요시하다니…….

상대의 조건이 아니라 자신의 조건을 본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사례가 다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윤세는 여자의 서걱서걱 삭막한 마음이 조금 안타까웠다.

“아까 그 남자는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 같던데요?”

그래서였다. 답지 않게 또다시 오지랖을 부린 것은.

그러나 이은은 또다시 부정했다.

“어려서 그래요. 걔가 아직 세상을 안 겪어 봐서. 다른 여자들 만나다 보면 내가 미쳤구나, 하는 순간이 올 거예요.”

“…….”

대놓고 냉소적인 여자의 마음은 지나치게 차갑고 딱딱했다.

그래서 윤세는 일단 세완에 대한 이야기는 제쳐 두고 다시 이은의 마음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갔다.

일단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이은도 세완에 대한 입장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사실은 조금 아깝기도 했다.

운명의 빨간 실을 잇는 월하노인이나, 대한민국 출산율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삼신할매로 전직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들 같은 처지의 사람을 가족으로 맞이하는데 그 어떤 편견 없이 쌍수 들어 환영하는 곳이 어디 흔하던가!

십중팔구는 극심한 결혼 반대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그중 두엇은 불같은 사랑으로 반대를 이겨 내지만 그럼에도 평생에 걸쳐 시댁 식구 혹은 처가댁 식구들의 눈칫밥을 먹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고 끝맺는 동화책 나부랭이를 만들자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에 윤세가 이은에게 거듭 질문했다.

장고 끝에 이은이 대답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는데 나는 걔 안 좋아해요. 그러면 안 되는 사이에요, 우리. 내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윤세 씨 같은 사람일 거예요, 아마.”

이은은 윤세에게 자신은 결혼할 생각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제가 만약 결혼을 한다면 그 상대는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며 동지애로, 전우애로 살 수 있는 사람일 거라고 했다.

덤덤하게 풀어놓은 이야기였지만 그 덤덤한 목소리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상처가 깃들어 있었다.

그가 알기로는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이 회장에게 거둬져서 나름대로 귀하게 자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은은 지나치게 상처투성이였다.

인간을 싫어하고, 결혼을 싫어하고, 사랑을 믿지 않았다.

윤세는 처음에 세완을 봤을 때 그를 두고 성장하지 않은 피터팬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장하지 못한 피터팬은 그쪽이 아니라 이은이었나 보다.

윤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이은이 때맞춰 윤세에게 말을 걸었다.

“뭐 해요? 마늘 안 까고?”

사실 순수하게 대화를 청한 것보다는, 악덕 상인이 노예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하여 채찍을 휘두르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윤세는 더 이상 불편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감사하며 다시 칼을 잡았다.

내 주제에 무슨 조언이냐, 내 코가 석 자인데! 

윤세는 그 어느 날에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어떤 사람을 떠올리며 마늘을 깠다.

“크흠!”

벌써 10년도 더 된 일인데 왜 갑자기 코끝이 찡한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마늘이 매워서 그런 것 같았다.

윤세가 손등으로 코끝을 훔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이은이 볼에다가 마늘을 와르르 붓기 시작했다.

“뭡니까, 이건!”

장사하는 집에서 마늘 까는 노예를 들인 것도 아니고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며 윤세가 정색했다. 그러자 이은이 말했다.

“지금 까고 있는 건 회장님이랑 아주머니랑 우리가 먹을 거고…….”

“지금 부은 건요?”

“세완이도 왔잖아요. 걔도 먹어야지.”

이은이 딴청을 부리면서 말했다.

윤세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은 이 상무가 먹을 마늘이라고 하지만 어째 지금 그들 전부가 먹을 마늘과 양이 비슷해 보였다. 윤세가 질색하면서 물었다.

“상무님은 마늘만 먹습니까?”

“걔 백숙에 마늘 많이 들어간 거 좋아해요. 그리고 복날인데 영양 보충시켜 줘야죠. 얼른 까기나 해요. 바쁘니까.”

저런 주제에 잘도 마음이 없단다!

윤세가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명령 아닌 명령을 내린 이은이 종종종 부엌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춘천댁을 불렀다.

“아주머니, 세완이 왔나 봐요. 닭 한 마리 더 꺼낼까요?”

“어머, 언제 왔대? 얘는 왜 인사도 없이…….”

“방금요. 했는데 안 들렸나 봐요. 마늘도 더 까라고 했어요. 냄비 꺼낼까요?”

세완은 인사 따위 한 적이 없지만 제 소꿉친구가 욕먹는 것이 싫어서 이은은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세완이 먹을 백숙을 준비코자 했다.

이은의 말에 춘천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 그렇게 해. 그런데 마늘은……. 아무리 그래도 경호원인데 자꾸 이렇게 부려 먹어도 되나 모르겠다.”

“밥값은 해야죠. 상관 안 하셔도 돼요.”

이은이 춘천댁의 걱정을 잘라 냈다.

너는 똑똑하니 뭐든지 네가 다 맞겠지, 춘천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만약 윤세가 일하는 것에 아무런 불만이 없다면 백숙 국물에 데쳐 먹을 쪽파도 좀 다듬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은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춘천댁은 부엌일 잘하는 총각이 들어와서 기쁘다고 했다. 춘천댁이 기쁘면 그녀도 기쁘다고 이은이 말했다. 그들은 많이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윤세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름만 경호원일 뿐, 이 집에서 놀고먹는 것은 부정할 수 없기에 말없이 마늘을 깠다.

오늘따라 마늘이 유난히 매웠다. 의성 육쪽마늘이라더니, 정말 명불허전이었다.

* * *

이 회장에게 윤세의 월급 액수를 물어본 이은은 이참에 뽕을 뽑겠다는 것인지 야무지게 그를 부려먹었다.

덕분에 주방은 오늘도 복닥복닥 시끄러웠다.

이 회장은 한 걸음 뒤에서 마늘과 전쟁을 벌이느라 바쁜 윤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윤세의 앞에서 춘천댁과 함께 백숙 이야기를 하는 이은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는 뜨거운 눈으로 이은을 바라보다 2층으로 올라간 세완도 봤다.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인가…….”

늙으면 죽어야지, 노망이 난 게지.

그가 보기에는 이은과 세완, 둘 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는데 도무지 가까워지질 못했다.

그대로 두면 천년만년 친구 놀이나 할 것 같은데 이 회장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의 몸 어딘가에 이상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늙은이의 시간은 젊은이의 시간과 달라 일분일초가 귀하고 아깝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시간을 단축시킬까 하고 윤세를 들인 것이었는데 예상과 달리 윤세와 이은이 지나치게 친해졌다.

세완은 지나치게 괴로워하고 있는 중이고.

아무리 구박을 한들 하나밖에 없는 손자인데 왜 귀하지 않겠는가, 그저 너무 귀하다, 귀하다 그러면 어긋날까 싶어서 되레 엄하게 군것이지.

이 회장이 아무도 없는 2층 계단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하면 그것으로 족했던 그의 세대와 달리 요즘 젊은이들은 왜 이리도 생각할 것이 많은지 모르겠다.

그는 세완이 있었던 2층 계단과 윤세, 이은은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가 아끼는 젊은이들을 위해 큰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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