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눈치가 빠른 남자는 최악이다.
눈치가 빠르고, 머리가 잘 돌아가고, 잔머리가 잘 굴러가면서 사람의 감정을 꿰뚫어 보는 그런 남자.
깜짝 놀란 이은에게 윤세가 말했다.
“험하게 자라서 그래요. 아시잖아요. 눈치 보고 크면 이렇게 저처럼 돼요. 눈치만 빨라지고.”
“……그리 좋은 집안에서 자란 거 같지는 않긴 하네요.”
“평범한 집안에서도 못 자랐죠. 최악 중의 최악인데.”
그는 제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도리어 이은이 그의 눈치 빠름을 이해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제법 험하게 자랐노라,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소개를 했다.
“설마 제가 김 비서님에게 생긴 일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죠?”
“…….”
“대충은 이미 알고 있었고, 이 집에 있으면서 이래저래 들은 이야기도 있고. 그런데 저 김 비서님 동정 안 합니다. 김 비서님은 행운아잖아요.”
윤세는 이은이 좋은 머리를 타고난 것도 남들보다 더 큰 복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했고, 그녀가 이 회장에게 거둬진 것도 남들보다 더 큰 복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는 김 비서님보다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알아요.”
“부모가, 부모에게, 핏줄한테 죽을 뻔한 사람이 어디 김 비서님 한 분뿐일까요.”
이은은 순간 정색했다.
당신 지금 선을 넘었다고,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느냐며 윤세에게 경고를 하려고 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아버지한테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 누나, 동생 모두 죽임을 당한 사람도 있는데요.”
깜짝 놀란 이은이 윤세를 바라보았다.
“하여튼 사망보험금 그거 문제라니까요. 그거 때문에 안 죽어도 될 생때같은 목숨이 얼마나 죽었어.”
물론 도움을 받은 사람도 적지 않지만 그로 인해 제 가족은 모두 죽어야만 했다고 윤세가 덤덤하게 말했다.
본의 아니게 그의 가족사를 알게 된 이은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윤세가 말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요. 그냥 그렇다는 거지.”
그가 이은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원 그 어딘가에 앉아 멍하니 잔디들을 바라보고 있던 이은이 홀린 듯 윤세의 손을 잡았다.
그가 이은의 팔을 당겨 그녀를 일으켜 주면서 말했다.
“엇차! 이제 들어가죠. 그리고 동정하라고 한 말 아니에요. 그냥 그런 삶도 있다는 거지. 스스로를 너무 불쌍하게 여기지 말라는 거예요.”
자신의 잘못도 아닌 핸디캡 때문에 자기혐오에 빠져 주저앉아 존재들을 윤세는 제법 알고 있다고, 그래서 이은은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지랖을 한번 부려 봤다고 했다.
“애초에 내 목숨 내놓고, 남의 목숨 빼앗으면서 돈 버는 게 이쪽 일인데 부모 형제 다 있는 멀쩡한 사람이 이 일을 할 리가 없잖아요.”
윤세의 말 속에 숨은 자괴감이 언뜻 엿보였다. 그 순간 이은은 윤세가 그녀에게 당신은 행운아라고 했던 뜻을 알 것 같았다.
정말이지 세상 부모들은 다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책임지지 못할 거면 낳지를 말지!
돈의 유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이 성장할 때까지 따뜻한 눈빛으로 지켜봐 주지 못하는 것, 그것을 말하는 거다.
그게 윤세에겐 혈족 살인이라는 형태였고, 이은에게는 부모의 죽음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다.
생때같이 어린 자식을 두고 눈을 감아야 하는 부모의 심정도 오죽하겠냐마는 혼자 남아 이 거친 세상을 살아야 하는 자식은 편하게 원망할 수 있는 존재가 부모밖에 없어서 그들을 탓한다.
“부모를 그리워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요. 그리고 그 감사할 수 있음에 또 감사하며 일어나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래야 하니까.”
윤세는 그렇게 이은을 위로했다.
결코 위로는 되지 않았지만 이은은 자신의 경호원이 제 나름대로 그녀를 위로하려고 했다는 것은 이해했다.
그렇게 몇 번의 위로가 오가고, 몇 번의 감사가 오가고, 그들은 친구 비슷한 관계가 되었다.
“아! 이거 너무 수지타산이 안 맞는데……. 비서님이랑 친구하면 제가 너무 손해지 않습니까, 내가 해준 위로만 해도 얼만데!”
윤세는 이은과 친구가 되면 계속 공짜로 위로하고 격려해 줘야 하냐면서 억울해했지만…….
“나랑 연관되면 적자지만, 회장님한테 받는 월급으로는 흑자잖아요. 그쯤에서 타협해요. 사람이 살다 보면 적자도 보고, 흑자도 보는 거지.”
너 월급루팡 아니냐는 말을 대놓고 하는 이은의 말에 윤세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부정할 수는 없었기에 그들은 그렇게 서로에게 타협했다.
* * *
오랜만에 일찍 퇴근을 했더니 이은과 윤세가 또 함께 있었다.
“빨리 좀 못해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요리 좀 하셨다면서요. 마늘 좀 빨리 까요. 닭백숙에 마늘이 없으면 어쩌자는 건데요.”
주방보조를 다그치는 듯한 이은의 말에 윤세가 울컥했다.
“그럼 진작 사 놓던지요. 까 놓은 거 팔잖아요.”
“까 놓은 건 덜 맵단 말이에요. 빨리 까 주세요. 아주머니 기다리신단 말이에요.”
이은과 윤세가 툭탁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세완은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꽤 오래전, 윤세가 매운탕 타령을 했을 때처럼 그들 사이에 끼어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신과의 사이를 오해받고 싶지 않다는 이은의 말이 자꾸만 세완의 귓가를 맴돌았다. 이은은 친구보다는 좋아하는 사람을 우선하고 싶다고 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직접 말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어쩐지 처음부터 그렇게 기분이 나쁘고 경계심이 피어오르더니 이러려고 그런 것이었나 보다.
세완이 냉소적인 눈으로 윤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그보다는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이은을 바라보았다.
타박상이 조금 나았나? 병원을 잘 다니고 있는 건지 깁스며 붕대는 그대로지만 아스팔트에서 구르면서 벌겋게 성이 올랐던 살갗이 조금은 진정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하고 싶은 말은 수도 없이 많은데 막상 그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너무 늦어 버렸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머리가 나쁘면 몸과 마음이 고생한다고 하더니 옛말 하나 그른 것이 없었다.
왜 몰랐을까, 왜 진작 깨닫지 못했을까.
그리고 왜 저 남자일까…….
차라리 아예 괜찮은 남자, 잘난 남자면 이해를 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신 같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머리도 좋고, 똑똑하고, 부모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서 이은이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부모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는 그런 시부모님을 가진 남자.
물론 저 남자도 머리는 좋을 거다. 의대를 나왔다고 했으니까.
하지만 시큐리티 소속 특수팀치고 멀쩡한 가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세완은 그 사실이 불만이었다.
물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윤세가 마음에 들 일은 없겠지만 이은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저 남자가 세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
친구가 되기로 합의한 이후, 이은은 마음껏 윤세를 부려먹었다.
고구마 줄기를 다듬고, 김치 담그는 것을 돕고, 깻잎단을 손질하고…….
낚시를 취미로 가진 거지 가사에 취미를 둔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평생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일들인데 그걸 이은으로 인해서 모두 해 봤다.
이쯤 되면 경호원이 아니라 가사도우미로 취업을 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은이 그와 친구가 되기로 한 것은 순전히 놀고먹는 그의 월급이 아까워서라는 이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윤세는 일을 조금 더 해도 좋으니까 얼른 눈앞에 있는 저 남자를 좀 치워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축한 볼에서 마늘을 꺼내고, 껍질을 까고, 꼭다리를 다듬으면서 윤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은에게 말했다.
“저기, 저치 좀 치워주시죠?”
“모르는 척해요.”
세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하긴. 모르기에는 너무나도 압도적인 외모긴 했다.
배우, 혹은 아이돌 출신 가수.
그가 세완이 누군지 몰랐더라면 아마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로 유별나게 잘생긴 외모긴 했다. 만약 그가 여자라면 무급이라도 좋으니 그의 경호를 맡게 해달라고 매달릴 정도로.
하지만 그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고, 성 정체성이 지극히 XY인 남자의 입장에서 같은 남자가 뜨겁다 못해 태워 죽일 것 같이 열렬한 눈으로 보는 것은 굉장히 불편한 일이었다.
“뜨겁다 못해 태워 죽일 거 같은데 어떻게 모르는 척합니까?”
“아직 안 죽었잖아요. 그럼 모르는 척해도 되는 거예요.”
“타 죽기 전에 칼에 찔려서 죽을 거 같은 느낌도 있습니다.”
“우리 세완이는 착해서 그쪽이랑 달라요.”
친구라고 이름 붙여 주긴 했어도 친분의 단계는 저쪽이 좀 더 높은 모양이었다.
윤세가 구시렁거리면서 마늘을 까는데 문득 이은이 말없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이은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 세완이 서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세완이 도대체 언제 2층으로 올라갔는지는 모르겠는데 이은은 하염없이 그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윤세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일방통행이 아니었나……,’
지금까지 그는 이 모든 것이 세완의 일방통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은이 그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으려고 한 것은 세완을 떨쳐 버리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누가 봐도 괜찮은 남자를 줄기차게 거절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제 핸디캡 때문에 자기혐오에 빠져 인간관계를 거부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특수팀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무지성으로 이성을 만나는 사람, 혹은 아예 이성 자체를 만나지 않는 사람.
양극단으로 갈린 대조적인 존재들인데 의외로 그 원인은 동일했다. 지독했던 유년 시절로 인해 가족을 혐오하고, 인간을 혐오하고, 자기 자신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이은도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나 보다.
“설마 마음이 있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