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아닌 건 아니라고 단호하게 잘라내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옆에 있는 여자가 자신밖에 없어서 세완이 잠시 착각하고 있는 것을 바로 잡아 주기만 하면 된다고.
그런데 또 막상 세완의 얼굴을 보니 이은은 한없이 마음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혹시 어제 실수했어?”
쭈뼛거리며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세완을 보며 이은이 남몰래 어금니를 깨물었다.
의식적으로 미소를 지은 이은이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적 없어. 네가 실수할 게 뭐가 있겠어.”
“정말?”
“그래.”
“그런데 너 오늘 묘하게 쌀쌀맞다? 실수한 거 맞는 거 같은데…….”
말끝을 흐린 세완이 눈동자를 데굴거리면서 말했다.
“없어. 내가 없다면 없는 거야.”
“그렇다면 다행인데…….”
세완은 아무래도 미심쩍은 모양이었다.
“그러면 왜 나만 네 방에 두고 간 건데?”
평소와 다른 행동에 의문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이은은 이미 준비해 뒀던 답변을 매끄럽게 내놓았다.
“그럼 같이 자? 너 무거워. 나는 너 못 옮겨. 그러니까 그냥 바닥에 둔 거고, 나는 빈방 찾아서 간 거고. 그런 거지 뭘 그렇게 캐물어?”
흠잡을 데 없는 깔끔한 답변이긴 했다. 하지만 세완은 아무래도 미심쩍고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그냥 같이 방에서 자면 되지.”
“너랑 나랑 무슨 사이라고 한방에서 자? 집에 빈방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일견 차갑다면 차가운 이은의 말에 세완이 우물거리며 제 의견을 주장했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서운하지, 25년을 함께 살았는데…….”
“우리 사이는 그냥 친구 사이지.”
세완의 질척임을 깔끔하게 잘라낸 이은이 빙그르 몸을 돌려 세완과 마주 봤다.
뒷머리 까치집이 선명한 모습의 세완이 조금은 귀여워 보였다. 평소였다면 그 뒷머리를 손으로 꾹꾹 누르면서 온갖 장난을 쳤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선을 그어야 할 시간이다.
“남녀칠세부동석 몰라? 남사친, 여사친은 같은 방에서 자는 거 아니야.”
이은은 세완에게 남사친과 여사친은 손가락이 닿고 스치는 일에도 서로를 경멸해야 한다면서 정론을 펼쳤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 봐. 너는 네 와이프가 친구라고 하면서 다른 남자랑 한방에서 자는 거 괜찮아? 나는 안 괜찮거든. 내 남편은 온전히 내 것이었으면 좋겠어.”
미래의 남편을 운운하는 이은의 말에 세완이 순간 얼굴을 굳혔다. 이은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알 것 같다. 세완의 마음이. 그녀가 바보였다.
친구라는 프레임에 갇혀서 그녀는 세완도 자신과 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민박집에서는 같이 잤잖아.”
단호한 이은의 말투에 세완이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항변했다. 이은은 세완의 말에 있는 오류를 정정했다.
“같이 잔 게 아니라 같은 방에서 잔 거! 그리고 그땐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었잖아. 상황이 상황이기도 했고.”
“그래도 그때는 이러지 않았어!”
억울한 듯, 서러운 듯 세완이 그녀에게 따지듯이 말했다.
그는 도무지 이은의 말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이은은 입술을 잘근거리며 세완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그때 윤세가 보였다.
그는 막 1층으로 내려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 순간 이은의 머릿속에 어젯밤 세완이 뱉은 말이 생각났다.
“윤세인지 뭔지 그 경호원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
세완은 윤세를 경계하고 있었다.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이은은 세완과도 그랬지만 윤세와도 특별한 관계로 이어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하지만 그를 이용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가 여자에 대한 마음을 접을 때는 그 여자가 다른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라고 했지?
이은은 짧은 순간에 결정을 내리고 말을 내뱉었다.
“그때와 내가 다르다면 내 마음이 달라졌나 보지.”
“무슨 소리야?”
“내 마음이 그때와 다르다는 이야기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나는 너와의 사이를 오해받고 싶지 않아. 사실 그런 거 좀 싫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이성이랑 한방에서 잠드는 거.”
그녀의 말을 들은 세완은 크게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야……. 그건…….”
세완은 말도 제대로 내뱉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리고 그러다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머리를 긁던 손을 주체하지 못해 허공에서 지휘봉 휘두르듯 마구 휘저었다.
한참을 방황하던 세완이 겨우 진정하고,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녀에게 질문했다.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
“노코멘트.”
“…….”
세완은 방금 전 보다 더 크게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충격요법이 제대로 들어간 듯했다.
이은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는 세완에게 담담하고 뻔뻔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이해해 줄 거지? 우린 친구니까!”
“그래. 그렇지, 친구. 친군데, 분명히 친군데…….”
세완은 바보처럼 똑같은 말만 몇 번을 곱씹었다. 그런 세완에게 이은이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앞으로는 우리 둘 다 조심하자. 서로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모를까 이미 생겼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게 예의인 것 같아.”
“…….”
세완은 말이 없었다. 그는 그저 망연자실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모습이 꼭 부모 잃은 어린아이 같아서 마음에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은은 이게 옳은 길이라고 생각하기에 말없이 몸을 돌렸다.
1층으로 내려오다 말고 이은과 세완의 말다툼을 듣고 관전 모드로 계단에 기대서 있는 윤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뭐가 그리도 흥미진진한지 숨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저 양반도 참 마음에 안 든단 말이지.
가끔 병원이나 가지 대부분 집에만 있는 이은의 경호를 한다는 핑계로 윤세는 거의 루팡 급으로 월급을 빼먹으며 백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월급이 도대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시큐리티 소속인 것으로 보면 분명히 적지는 않을 텐데 도대체 밥값은 언제 하려나!
이은은 못마땅한 고용인을 노려보다가 고용주처럼 예리한 눈초리로 윤세의 모습을 눈동자에 담으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 * *
한편 세완은 커다란 돌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마음이 달라졌나 보지.”
“나는 너와의 사이를 오해받고 싶지 않아.”
“서로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모를까 이미 생겼으면 그 사람을 위해서 조심하고 또 조심하는 게 예의인 것 같아.”
그 어느 문장 하나 충격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가 죄를 지어도 보통 큰 죄를 지은 게 아닌가 보다.
욕을 했나 때렸나,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할 리가 없었다.
백희경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에 대해서 하루 종일 고민하고, 골치를 썩였는데 지금 보니 그건 고민 축에도 못 들었다.
세완은 멍한 표정으로 부엌으로 들어가는 이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내내 그를 헷갈리게 하던 어느 미묘한 감정의 이름을 깨달았다.
세완은 첫사랑만 김이은인 것이 아니었다. 현재의 사랑, 그의 짝사랑, 그의 찐사랑 모두 김이은이었다.
그는 미처 모르고 있었지만 어느새 그의 마음은 그녀를 향하고 있었나 보다.
미처 제 사랑을 자각하기도 전에 이은에게 차였고, 차이고 난 뒤에야 제 마음을 깨달은 남자는 한참 동안이나 그 자리에 멈춰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 * *
그날의 대화가 세완에게는 상당히 충격인 것 같았다. 그는 이은을 볼 때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은은 그것을 의식적으로 피했다.
회사 내외에 큰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닌데 요즘 부쩍 퇴근 시간이 늦어진 것을 보면 요즘 그는 아마 그녀의 일을 조사하느라 바쁜 것 같았다.
중간 중간에 회장에게 무엇인가를 보고하고, 찬주가 길게 통화하고, 밤늦게 들어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회사에 간다면서 나가는 모습을 보면 그녀의 추측이 거의 확실해 보였다.
어쨌거나 그는 많이 바빴다. 섬에서 가져와 달라고 부탁받은 물건들을 소원에게 전해 줄 시간도 없을 정도로.
“아직 택배가 안 왔을까요?”
“아! 세완이한테 한번 이야기해 봐. 아마 왔을 거야.”
“아저씨가 바쁘신 것 같아서요. 요즘 도무지 얼굴을 못 봐서요…….”
하지만 그렇게 시간이 없음에도 세완은 종종 그녀를 찾아와 뭔가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졸리네. 나 먼저 잘게.”
“늦게 왔네. 잘 자.”
매번 그를 피하는 그녀로 인하여 그럴 기회는 없었지만.
그러면 세완은 파김치 같은 모습으로 퇴근했을 때보다 더 지친 표정으로 그녀에게 잘 자라는 이사를 건넸다.
“응, 그래. 너도. 이은아, 좋은 꿈 꿔.”
“고마워.”
그 모습을 우연히 본 것인지 춘천댁이 단답형의 인사만 주고받는 그들에게 혹시 싸웠냐고 물은 적이 있기도 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절대 안 싸웠어요.”
이은은 당당하게 그녀의 추측을 부정했다.
싸운 적 없었다. 싸울 일도 없었다. 싸워서도 안 된다.
그녀가 버스에서 굴러떨어져서 다쳤을 때, 잠깐 세완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던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이번은 그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그때는 그녀가 바보 같아서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심통을 부린 거고, 이번 일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싸웠으면 어서 화해해. 요즘 네 눈치만 살피는 게 세완이 엄청 불쌍하더라.”
“안 싸웠다니까요. 정말이에요. 그냥 세완이가 일이 힘든 것 같아요.”
세완이 이은의 눈를 살핀다는 춘천댁의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이은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안 싸웠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속으로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미안해. 조금만 참아. 네게 다른 사람이 생기면, 그때 내가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할게. 하지만 너도 나 같은 사람보다는 좋은 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가씨와 만나는 것이 훨씬 좋을 거야.’
세완에게 이은이 소중하듯이 이은에게도 세완이 소중했다. 그래서 이은은 세완이 그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집에서, 좋은 부모 슬하에서 사랑받고 예쁘게 자란 사람이 세완의 곁에 있길 바랐다.
이은은 그것을 위해서라면, 그러니까 세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었다.
“이윤세 씨, 혹시 요즘 뭐 해요?”
세완이 질색하는 윤세와 일부러 붙어 있는 것도.
세완이 집을 비웠을 때는 안 그러고, 그가 집에 있을 때만 윤세와 친한 척을 했다. 그러길 며칠, 윤세가 말했다.
“난 이용당하는 것은 별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