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눈치가 빠른 게 때로는 단점이 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좋은 남자 만나야 한다, 그나 윤세보다 훨씬 나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런데 자신은 왜 이렇게 부족한 남자인 것일까!
세완이 내뱉은 이야기는 이 세 문장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흘리자면 흘릴 수도 있는 이야기인데 이상하게 이은의 귀에는 다른 뜻으로 들렸다.
차라리 세완이 대놓고 그녀를 좋아한다고 했다면 이렇게까지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관계가 관계인지라 이은은 일단 부정부터 했다.
‘에이, 설마! 말도 안 돼!’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이은과 이세완이다.
그들은 남매처럼 자랐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남녀 관계는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다가도 헤어지면 남이 되지만 가족은 아니었다. 평생 함께할 수 있는 관계였다.
이은은 세완과의 사이에서 가족이 아닌 관계는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일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결코 그런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다.
설사 그 결심으로 인해서 다시는 세완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놀란 가슴을 애써 다스린 이은이 세완을 바라보았다. 이은은 어떻게든 그를 다그쳐 그녀가 한 생각이 모두 다 착각일 뿐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세완은 술기운이 올라 온갖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다 내뱉더니 이제는 어느새 그런 과거를 잊고 혼자서만 방 모서리 구석에 처박혀 속 편하게 잠들어 있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두들겨 패 깨워서라도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25년 동안 쌓은 정이 그걸 막았다.
이은이 복잡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 한숨을 쉬며 방 밖으로 나갔다. 일단 오늘은 손님방에서 자야 할 것 같다.
* * *
아침이 밝았다. 뜨거운 햇살이 창문을 통해 따갑게 내리쬈다.
세완은 어째 몸의 이곳저곳이 두드려맞은 것처럼 아프다고 생각하면서 눈을 떴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목도 아프고, 머리도 깨질 것 같이 아파 왔다.
아직 잠에 취해 있는 세완이 습관처럼 핸드폰을 찾아 주변을 더듬거렸다.
“……?”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평소처럼 푹신하고 아늑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세완이 잘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낯선 천장이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단단한 원목으로 된 침대의 수납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세완은 깨달았다. 바닥에서 잤구나!
내 방은 아니고 누구 방인가 싶어 잠결에 눈을 끔벅였는데 정신을 차리고 좌우를 둘러보니 결론은 쉽게 나왔다. 이은의 방이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밤에 이은의 방에 와서 술을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끙! 세완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다음이 기억이 안 난다.
이은이 워낙에 소맥을 좋아해서 따라서 마시고 있긴 하지만 정말이지 소맥은 언제나 최악이다.
와인을 마실 때면 거의 취하지 않는 세완도, 소맥 앞에만 서면 알코올 쓰레기라는 표현에 딱 걸맞은 모습으로 변하고 만다.
“내가 어제 뭘 했지…….”
세완이 고민했다.
평소라면 세완을 그의 방에 던져 놓기라도 했을 이은이 자신의 방에 그대로 두고 간 것을 보면 세완 자신이 무슨 짓을 하기는 한 모양인데 기억이 선명하지가 않으니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대상이 찬주라면 그가 욕설을 했다는 가정도 성립될 수 있었지만 상대가 김이은이니 그건 아닌 거 같고…….
세완은 끊어진 기억 속에서 금주를 다짐하며 기억의 끝자락을 어떻게든 잡아당기기 위해 노력했다.
* * *
한편, 세완이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 방 건너편에 있는 방에도 고민하는 청춘은 존재했다. 바로 이은이었다.
집에 주인 없는 방이 적지 않았기에 잘 곳이 없지는 않았다.
손님 대접을 잘해야 한다는 이 회장의 평소 신념으로 인해 말이 빈방이지 모든 방은 지금 당장이라도 손님을 받을 수 있을 정도의 상태를 유지해야만 했다.
때문에 화사하고 깔끔한 인테리어와 고급 매트리스를 사용한 침대는 머리가 복잡한 이은도 단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로 포근하고 아늑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은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젊은 애들을 저렇게 붙여 놓으면 어떡해요? 저러다 눈 맞으면 어쩌려고.”
“회장님이 마음이 너무 좋아서 그러시죠. 머리 검은 짐승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데……. 저러다가 돈 노리고 들러붙으면 어떡해요?”
“그러니까요. 남자애들은 안 그래도 혈기 왕성한 나이인데 여자애가 몸으로 들이밀면…….”
세완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수도 없이 수군댔다.
그녀가 결코 그럴 마음이 없음에도 사람들은 모두 색안경을 끼고 그녀를 바라봤다.
아무리 성적이 좋고, 아무리 태도를 단정하게 해도 사람들은 그녀를 나쁘게만 봤다.
‘여자애가 저렇게 독해서 어디에다가 쓰냐.’, 혹은 ‘저러다가 큰 사고 터지지. 세완이랑 좀 떨어뜨려 놔라.’
고아에게 뒷말은 숙명 같은 것이다.
입 다물고 튀지 않게, 조용히 중간만 하면서 살아도 사람들은 그들의 흠을 잡았고, 이은처럼 특출한 모습을 보여도 사람들은 그녀의 흠을 잡았다.
있는 흠, 없는 흠 가리지 않고 눈을 세모로 뜨는 그들의 모습에 이은은 결심했다. 어떻게든 저들보다 그리고 저들의 자식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 될 거라고.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저들의 말처럼 이 회장이 저를 데려다 키운 것을 후회하게 만들지는 않겠다고.
사람들의 뒷말은 이은의 평생을 관통할 신념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은은 지금까지는 그것을 잘 지켜 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아닐 거야. 말도 안 돼. 세완이가 뭐가 모자라서.”
이은이 중얼거렸다.
보통은 자신이 뭐가 모자라서 그런 사람을 좋아하느냐는 말을 하지만 이은의 경우는 반대였다. 세완이가 뭐가 모자라서!
학교 다닐 때 성적이 좀 나쁘긴 했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인서울은 성공했고, 직업 번듯하고, 본인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투자의 귀재라 적지 않은 재산을 벌어들였다고 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돌아가신 부모님께 받은 유산이며, 이 회장이 증여한 재산들, 앞으로 물려받을 재산까지 세완의 재산은 어마어마했다.
BS그룹의 유일한 후계자이니만큼 집안은 당연히 좋고, 키 크고 외모 번듯해서 인기도 많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좋은 머리 하나밖에 없는 그녀와 달리 세완은 능력, 외모, 집안 등 결혼을 염두에 둔 보통의 여자들이 관심 있어 하는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고 성격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개차반 같은 재벌 3세들이 오죽이나 많은가!
더부살이든 뭐든 재벌가에 소속되어 있다 보니 들려오는 이야기라는 것이 모두 ○○그룹의 장남이 마약을 했다더라, XX그룹의 막내딸이 사람을 팼다더라, △△대법관의 장손이 도박을 했다는 등 뭐 대충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뿐이다.
외부에 노출되었다가는 그 즉시 신문 헤드라인에 대서특필될 그런 내용밖에 없었다.
불과 며칠 전에는 □□그룹의 둘째 아들에게 아이를 임신한 여자가 동시에 세 명이 찾아왔다는 그런 믿지 못할 이야기도 있었다.
화끈했던 마약 파티와 그보다 더 화끈했던 쾌락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 지극히 건전한 생활 패턴과 건전한 사고방식, 제 식구에게 최선을 다하고 다정한 세완의 성격은 가점 외에는 줄 것이 없었다.
날백수에 날건달이라고 구박은 하지만 기본적으로 세완은 성실한 타입이었다. 그리고 일단 시키면 했다.
시켜도 안 하는 사람들이 즐비하다는 것을 떠올리면 세완은 적당한 매뉴얼만 입력해 주면 나쁘지 않은 결과 값을 뽑아냈다.
아무리 시켜도 일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인하여 스트레스를 받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큰 장점인지 안다.
당장 회장님 비서실의 박 과장만 해도 양말을 똑바로 벗어서 빨래통에 넣으라는 것, 그것 하나를 지키지 않아서 결혼 내내 잔소리를 듣다가 3년 차 되던 해에 사니 못사니 이혼을 한다는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고 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이렇게 저렇게 주워들은 것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이은은 세완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래서 더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차라리 몸 어디 한 구석이 불편하거나 마약이나 도박에 찌들었던 적이 있는, 그런 하자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멀쩡한 남의 집 손자를 어떻게 그녀가 감히 건드리나!
부모가 없다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나쁜 조건인지라 보통 사람들도 꺼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재벌가? 이 회장?
언감생심 그런 일은 있어서도 안 되고, 일을 수도 없었다.
국어를 잘해서 주제 파악을 잘하고, 수학을 잘해서 분수를 잘 알고, 지리를 잘해서 그녀의 위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이은의 입장에서 세완과 그녀가 그런 관계가 된다는 건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거야말로 머리 검은 짐승이라는 이야기를 듣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모든 일은 순리대로 흘러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세완의 순리는 그와 비슷한 집안 환경에서 자란 괜찮은 여자와 결혼하는 거다.
이은은 그 옆에서 시누이 비슷한 존재로, 아니 시누이도 아니긴 했다. 그냥 세완의 부하직원으로 그를 보좌하면서 그를 닮은 아이들에게 ‘이모’라고 불리는 그런 것이면 족했다.
‘……그걸로 족해?’
아주 잠깐 헛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은은 고개를 흔들어 망상을 떨쳐 냈다.
이걸로 족하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그녀를 위해서도, 세완을 위해서도, 이 회장을 위해서도, 그리고…….
“저도 누나처럼 될 수 있을까요?”
“저도 언니처럼 멋있는 커리어 우먼이 돼서 성공하고 싶어요. 꼭 그렇게 될 거예요.”
그녀를 보며 자신도 꿈을 꾸게 되었다고 말하던 보육원의 수많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그러니까 이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