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어릴 때부터 세완은 고민이 있을 때면 종종 이은의 방을 찾았다.
“같이 자!”
그는 제 몸보다 더 커다란 베개를 들고 와서는 다짜고짜 그녀 옆에 누워서 조잘조잘 제 고민을 떠들어댔다.
“난 당근이 너무 싫어. 세상에서 제일 싫어!”
“당근이 왜 싫지? 그거 맛있는데! 너 설마 당근 못 먹어? 아기야?”
“나 아기 아니야.”
“아기가 아닌데 왜 당근을 못 먹어? 아기 아니면 당근 먹어 봐. 얼른!”
“……나 아기 아니야. 당근도 안 먹을 거야. 으아앙.”
공감 능력 없는 그녀로 인해 그 결말은 언제나 파국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완은 줄기차게 그녀의 방을 찾았다.
“이은아, 이은아! 내가 좋은 걸 배웠거든?”
“뭔데?”
“나 오늘 시험에서 10점 받았잖아. 그거 펜으로 요렇게 살살, 그으면 40점이 된다? 요렇게 하면 70점이고! 어때? 멋있지?”
“…….”
“내가 지금 40점으로 만들까, 70점으로 만들까 고민이거든. 넌 어떻게 생각해? 둘 중 뭐가 좋을 거 같아?”
“할아버지, 세완이가 성적표 고치려고 한대요!”
그녀는 공감 능력만 없는 게 아니라 의리도 없어서 세완의 비밀을 지켜 주는 법이 없었다.
그녀를 믿고 성적표 조작 계획을 고백했던 세완은 공부도 못하는 녀석이 못된 잔머리나 굴린다면서 이 회장에게 두 배로 혼났고, 이은은 상으로 아이스크림을 받았다. 아이스크림은 맛있었다.
그 정도로 당했으면 찾아오지 않을 법도 하련만 학습능력이 없는 세완은 매주, 매달, 매년 그녀의 방을 찾았다.
나이가 듦에 따라 베개가 아닌 만화책, 게임기 등 들고 오는 물품의 종류는 바뀌었지만 세완에게 이은은 여전히 제 고민을 토로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리고 그건 지금 이 순간에도 현재진행형인 모양이었다.
퇴근하자마자 남의 방에 술에다 안주까지 들고 온 세완을 보며 이은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가 네 방이야?”
“네 방이 내 방이고, 내 방이 네 방이지.”
세완은 능숙하게 그녀의 컴퓨터를 켜 OTT 사이트에 접속하면서 말했다.
“뭐 볼래?”
“액션.”
“오케이. 그럼 영화 보자. 이거 재미있다고 하더라.”
세완은 요즘 상당히 인기 있다는 영화를 선택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리며 바닥에 주저앉아 잔에 술을 채웠다.
이은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까 영화 장르를 묻는 질문에서는 그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지만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가는 녀석이다.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를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밖에 멀쩡한 블루레이 플레이어랑 소파 내버려 두고 왜 방바닥에 주저앉아서 궁상이야?”
이은이 그의 옆에 쪼그려 앉으며 질문했다.
“그냥. 뭐…… 그런 거지.”
2층 거실에서 영화를 보자고 하면 윤세가 끼어들지도 몰라서 네 방으로 쳐들어왔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어서 세완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알 수 없는 이상한 표정을 짓는 세완을 보며 이은이 미간을 찌푸렸다.
얘가 정말 왜 이래?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대충은 알겠다.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었나 보다.
예전에 그녀의 방을 찾은 세완이 그랬듯, 오늘도 그가 고민을 품고 그녀를 찾아왔음을 깨달은 이은이 세완의 옆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오늘은 술친구나 해줘야지!
그런데 뭔가 이상한 것이 있었다.
“근데 왜 잔이 하나야?”
“……마시게? 아파서 붕대에 깁스까지, 안 한 게 없는 애가 술은 무슨 술이야. 네 건 거기 콜라! 콜라 마셔.”
세완이 제 옆을 고갯짓하면서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뚱뚱한 콜라 캔 하나가 보이긴 했다.
하지만 자기는 소맥에다가 골뱅이소면무침, 해물파전까지 챙겨와 놓고 그녀더러는 캔콜라나 마시라니 이 무슨 비매너인지 모르겠다.
“넌 상도덕이 없어. 남의 방에서 공짜로 취식하려고 하면서 어디 잔을 하나만 들고 와? 어서 가서 잔 하나 더 가져와. 이 소맥은 내가 마실 거니까 잔은 알아서 가져오고.”
이은이 명령하듯이 말했다.
“야, 너 다쳐서 약 먹잖아. 술은 무슨 술이야.”
세완이 그녀를 달래려고 했다. 하지만…….
“캬! 좋다. 그럼 콜라는 네가 마실 거지?”
인생은 선빵필승, 이 잔은 내 잔이로소이다!
잔에 먼저 입술을 가져다 댄 이은을 보며 세완이 투덜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서 영화를 보며 술잔을 기울였다.
“여기 맛있네. 어디야?”
“찬주네 회사 근천데, 맛집으로 소문났더라고. 그래서 퇴근할 때 사 왔지.”
그들은 영화를 보며 사소한 잡담을 나눴다.
“잘했어. 여기 되게 맛있네.”
“그럼 내일 또 사 올까? 똑같은 메뉴는 별로지? 그 집 감자전이랑 두부김치도 맛있는 거 같던데 그거 사 올까? 너 감자전 좋아하잖아.”
안주 이야기를 하고, 그 안주의 맛을 평가했다.
세완은 혹시 더 먹고 싶은 것이 있느냐며 묻기까지 했다.
그런 잡담의 끝에서 이은이 물끄러미 세완을 바라보았다.
“애? 내 얼굴이 뭐 묻었어?”
세완이 제 얼굴을 손으로 거칠게 닦아내면서 물었다. 이은이 고개를 저었다.
사고를 치면서도 언제나 해맑고 기운이 넘치는 것이 그의 장점인데 세완이 오늘은 좀 지쳐 보인다.
그 이유가 도대체 뭔지를 고민하며 이은은 일단 술을 한 잔 목으로 넘겼다. 그리고 가볍게 잔을 내려놓으면서 세완에게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고민이 뭐야?”
단도직입적으로 꺼낸 질문에 세완이 당황했다.
“어? 야, 고민은 무슨 고민!”
세완은 일단 부정하려고 했지만 상대가 김이은이었다.
“너는 고민이 있을 때면 소주를 마시거든. 아니면 와인이고.”
25년을 함께 자랐는데 서로의 취향이나 버릇을 모를까!
태생적으로 타고 난다는 것이 정말 있기는 한 모양인지 소주에 돼지껍데기를 좋아하는 이은과 달리 세완은 정말 누가 뭐래도 도련님 취향이었다.
품격 있는 와인에다가, 그 안주로는 하몽이나 치즈.
세완은 올리브도 좋아했다.
어쨌거나 맥주에 소주를 말아먹는 소맥파는 아니라는 거다.
그런 그가 소주를 마신다는 것은 고민이 지독하게 깊어서 뭔가 쓰고 끔찍한 것을 마시고 싶을 때뿐이다.
세완은 이은이 그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완이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그가 말했다.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네가 날 그만큼 잘 알고 있다는 거.”
이은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뭘 새삼스럽게? 이래 봬도 모르는 거 빼고는 다 아는데.”
이은은 비서가 상사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해 자랑하듯이 늘어놨다. 그 모습을 세완이 다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우리 비서님 대단하네. 이러니까 내가 만날 도망가도 잡혀 왔구나.”
“그렇지. 내가 또 모르는 거 빼고는 다 알거든.”
때로는 의미 없는 잡담이 누군가의 영혼을 위로해 줄 때도 있다고 한다.
이은은 세완의 옆에서 의미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이야기가 계속됨에 따라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어깨가 조금은 이완되는 것이 이은의 눈에 들어왔다.
초반에 연거푸 술을 마신 탓인지 세완은 처음 그녀의 방에 찾아왔을 때보다는 조금 더 솔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벽에 기댄 세완이 천장을 보며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머뭇거린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 못 찾았어.”
“누굴 못 찾아?”
“그 여자. 핸드폰 번호를 알아냈으니 찾아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음……. 없더라고.”
이은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전에 없이 시무룩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기에 무슨 큰일이 난 줄 알았더니 다른 게 아니라 백희경과 관련한 일이었나 보다.
“야, 그건…….”
이은은 그를 위로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했다.
백희경의 존재에 대해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이은과 그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서.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무 말이 안 나왔다.
“…….”
이은이 말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그녀가 많이 울기는 했다. 많이 속상했던 것도 사실이다.
백희경이 그녀의 친엄마가 아니라는 결과는, 그녀가 이은을 죽이려고 했던 것과는 별개로 이제 그녀에게는 이 세상 어디에도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없다는 선고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은은 그래서 운 것이었다.
죽은 제 가족들이 안타깝고, 거짓말쟁이에게 휘둘린 저 자신이 불쌍해서.
하지만 왜 그 눈물 때문에 세완이 아파하는지는 모르겠다.
감정을 삭이고 목을 가다듬은 이은이 천천히 입을 벌렸다. 그녀는 너무나도 감정적이었던 그날 밤에 대한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괜찮으니까 나를 대신해 백희경에게 복수한다고 너의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려고 했다.
백희경은 경찰에게 맡기고, 이은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 중 한 명인 세완이 그녀로 인해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때 세완이 말했다.
“우리 이은이 힘들어하면 안 되는데…….”
이제 슬슬 취기가 올라오는 건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던 조금 전보다 조금 더 취한 모습이었다.
“나 안 힘들어. 괜찮아.”
착한 녀석.
이은은 괜스레 속상해서 어제 엄마를 부르며 울었을 때와는 다른 이유로 눈물이 나려고 했다.
눈물샘이 고장 나기라도 한 건지 요즘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며 이은이 눈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그때 세완이 그녀를 보며 말했다.
“이은이 운다.”
“…….”
“못생겼다, 우리 이은이.”
글썽거리던 눈물이 쏙하고 도로 들어갔다. 이은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완의 술주정이 계속됐다.
“윤세인지 뭔지 그 경호원이랑 친하게 지내지 마.”
취기를 핑계로 이제는 별 이야기를 다 내뱉고 있었다.
그녀의 눈물은 이제 정말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남은 건 어이없음뿐이다. 그리고 어이도 함께 사라졌다.
“우리 이은이는 좋은 남자 만나야 하는데……. 그 자식이나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이은은 세완이 더 취하기 전에 그의 방으로 보내 버릴 생각이었다. 이은이 세완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하려던 찰나였다.
세완이 그녀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까만 머루알 같은 눈동자가 그녀를 보며 해사하게 휘어졌다.
그런데 그러다가 또 그의 눈에 갑자기 눈물이 글썽거렸다. 세완이 말했다.
“이은아, 나는 왜 이렇게 못났지? 내가 좀 더 괜찮은 남자였으면 달랐을까? 헤헤. 우리 이은이 예쁘다.”
이은의 얼굴이 순간 굳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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