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차라리 세완이었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라고 백만 번도 더 생각하며 이은은 소원을 제 방 안으로 들였다.
제 방이나 그녀의 방이나 사람 사는 방은 다 똑같을 텐데도 소원은 뭐가 그리 신기한지 휘둥그레 한 눈으로 그녀의 방을 살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눈치를 보더니 시선을 바닥으로 처박았다.
이은은 그 모습을 보니 왠지 가슴이 답답했다.
이제는 소원이 그녀의 혈육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가슴으로 낳은 자식도 자식이니 사촌은 맞는 것 같은데 그 모친 되는 존재가 백희경이다 보니 사촌으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외면을 하자니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아서 그게 참 마음에 걸렸다.
“무슨 일이야?”
그래서 본론만 간단하게, 소원이 그녀를 찾아온 목적만 해결해주고 바로 그녀를 내보낼 셈이었다.
“필요한 거 있어서 온 거잖아. 바로 얘기해. 괜찮으니까.”
딱 잘라서 말하는 이은의 모습은 똑 부러지고 야무져 보였다.
“아니, 필요한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요. 우리 엄마가 왜 그렇게 그쪽을 신경 쓰는지.
소원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키며 그녀를 관찰했다.
엄마가 이상한 말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엄마가 정말 이은에게 해코지를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 집 사람들이 그녀 몰래, 그녀가 듣지 않는 곳에서 엄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안다. 그리고 그게 별로 좋은 내용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소원은 엄마를 믿고 있었다. 그리고 믿고 싶었다.
허나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꾸만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이은을 찾아온 것이었다.
그녀가 무슨 해답을 내려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원이 이은을 보며 우물쭈물하자 이은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런 모습을 보이나 이은이 고민을 하려는 찰나였다.
“아!”
그러고 보니 소원이 찾아올 만한 일이 하나 있긴 했다.
그녀가 바보였다. 소원이 그녀 앞에서 백희경 이야기를 먼저 꺼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백희경이 싫었다. 이제는 그녀의 이름이 언급되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그녀가 소원에게는 그냥 평범한 엄마일 뿐이라는 것은 안다.
적어도 그녀가 본 백희경은 소원에게는 엄마 역할을 하고 있었다. 소원이 제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가져다 달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너희 엄마랑 같이 찍은 사진 얘기하는 거지? 그때 식당에서 얘기했던…….”
그런데 소원의 반응이 이상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두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살짝 벌어졌다.
“왜? 이거 아니야?”
“아니요. 맞아요.”
어색하게 웃으며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소원이 살짝 이상하긴 했지만 이은은 더 이상 그녀와 관계되고 싶지 않았다. 사진만 꺼내서 주면 되겠지, 뭐!
사실 세완에게 맡길 수도 있었지만 왜인지 세완과 소원이 붙어 있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조금 불편하고 귀찮아도 그녀가 움직이는 것이 낫다.
이은이 세완에게 전화를 걸었다. 백희경의 머리카락과 칫솔을 제외한 나머지 물품들을 어디에 두었냐고 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웬일로 세완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쁜가…….”
이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세완이 집에 오지 않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출근했으면 회사에서 일을 열심히 하고 퇴근 시간이 돼서 귀가하는 건 당연한 거다.
하지만 상대가 세완이니만큼 이은은 그가 그녀를 보러 오지 않은 것이 순전히 회사 일이 바빠서 그런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게 맞을 거다.
“따라와. 아마 세완이 방에 있을 거야.”
세완이 그녀를 찾아오지 못한 이유를 확신한 이은이 성큼 걸어 방을 빠져나가면서 말했다.
주인 없는 방에 마음대로 들어가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속전속결로 원하는 것을 줘서 소원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이은이 잠깐 망설이다가 이내 과감하게 세완의 방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문을 열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너무나도 잘 아는 방이었다.
일단 책상!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고, 서랍에…… 도 없고.”
평소에도 세완의 부탁으로 제 방처럼 드나들며 뒤집던 방이었기에 이은의 행동에는 일말의 망설임이도 없었다.
서랍을 다 열어봤는데도 보이지가 않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세완의 방에 있는 금고까지 열어봤다.
하지만 여전히 박 팀장이 보내왔다는 쇼핑백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세완이 그걸 회사에 들고 간 것인가, 이은이 고민할 때였다.
“그런데 그거 아직 안 가지고 오신 거 아니에요? 가져다준다고 하신 거 어제잖아요.”
“……!”
소원의 일리 있는 지적에 이은이 당황하며 동의를 표했다.
“아, 그러네. 그렇지. 내가 날짜를 착각했네.”
워낙에 시급을 다투는 일이라 배, 비행기, 퀵서비스 등 돈을 아끼지 않고 하루 만에 물건을 받아서 그렇지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무슨 수를 써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제 보내셨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는데 만약 택배로 보내셨으면 사나흘 정도 걸릴 거예요.”
소원이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그녀는 섬의 물류시스템을 자신의 말의 근거로 사용했다.
섬에서는 모든 택배가 이장의 집을 통한다고 했다.
택배를 보낼 때는 일단 이장의 집에 택배들을 모두 모은 뒤 배편으로 그것들을 내보내는 방법을 사용하고, 택배를 받을 때도 일단 이장이 그것을 전부 다 받은 후에 각각의 가정에 연락해 택배를 가지러 오라고 한다고 했다.
택배 물량이라고는 섬 전체를 다 합쳐도 하루에 30개를 넘지 않는데 방문해야 하는 범위가 워낙에 넓다 보니 궁여지책으로 나온 방법이라고 했다.
뭐, 합리적이라면 합리적인 방법이었다. 이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건 평생 살 일 없는 섬의 택배 시스템이 아니었다.
어제 섬에서 사진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 리도 없고, 본인도 올 리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럼 내 방에는 왜 찾아온 거지?
이은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원은 그녀가 왜 그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이은이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내 방에는 왜 온 거야?”
이은으로서는 당연한 물음이었다.
그녀와 소원이 아주 친밀한 관계라서 특별히 볼 일이 없는데도 심심풀이 삼아 서로의 방을 오가는 사이도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랬다.
“아, 저기, 그게요…….”
하지만 소원은 정말 특별한 이유 없이 무작정 충동적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머리가 너무 복잡해서, 이은의 얼굴을 보면 어떻게 해답이 나올까 싶어서.
그러나 그 말을 본인 앞에서 할 수는 없어서 입술만 깨물던 바로 그 찰나였다.
- RRR
이은에게 전화가 왔다.
누가 연락을 했나 싶어 이은이 무심코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요즘은 워낙에 스팸 전화가 많기에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은이 고민을 하는 찰나였다.
“전화 받으세요. 저는 올라가 볼게요.”
이은이 미처 말리기도 전에 소원이 걸음아 날 살려라 쏜살같이 사라졌다.
소원은 이은이 잡을까 무섭다는 듯한 속도로 도망치듯이 사라졌다. 전화 때문에 대화가 끊긴 것이 매우 반가운 것 같기도 했다.
“……에이, 설마!”
저나 나나 서로 편한 관계가 아닌데 방까지 찾아왔을 때는 이유가 있었을 거다. 그런데 그 이유도 해결하지 못하고 갔는데 반가울 일이 뭐가 있으랴!
하지만 이은 또한 소원과 대화를 하는 것보다는 인터넷 가입인지 대출 권유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스팸 전화를 받는 쪽이 좀 더 반가운 일인지라 이은은 소원의 ‘볼 일’을 애써 무시했다. 그리고 전화를 받았다.
* * *
빈말이 아니라 세완은 오늘 정말 바빴다.
이은은 세완이 소원과 친하게 지낸다고 질투했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핸드폰 번호를 물을 정도로 그와 소원이 친분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사실 친하게 지낼 마음도 없고, 그럴 일도 없었다.
때문에 세완은 소원의 핸드폰 개통 이력이나 통화 목록 등을 조회하기 위해 찬주를 닦달해서 경찰을 소개 받았다.
“안녕하세요, 이세완입니다.”
“안녕하세요, 서울경찰청 정찬형 형사입니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조회를 하면 불법, 경찰의 도움을 받으면 합법!
물론 경찰을 통해 통화 이력이나 개통 이력을 조회하는 것도 타당한 이유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에게는 백희경이라는 문제적 인물이 존재했다.
경찰은 세완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다.
형사과가 아니라 경제과 출신이라는 것이 다소 아쉽긴 하지만 형사는 세완에게 이름을 빌려주는 것에 대하여 거리낌이 없었다.
덕분에 세완은 마음 놓고 형사의 이름을 사용했다.
개인 정보 조회가 합법이 된 상황인 데다가 그 통신사의 사주(社主) 아들이 세완의 학교 선배였다.
세완은 자신을 재벌가 아들이나 손자들이 다닌다는 명문 학교에 꾸역꾸역 보냈던 이 회장에게 처음으로 감사했다.
그리고 잠시 후, 인맥과 학연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느끼며 세완은 소원의 핸드폰 개통 이력과 통화 목록을 받아들었다.
개통된 번호는 하나였고, GPS 위치추적 결과 소원의 핸드폰이 현재 평창동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니 소원이 사용하는 번호가 맞았다.
문제는 통화 이력이었다.
어제와 그제, 양일 동안 소원이 누군가와 통화를 했는데 세완이 볼 때는 그 상대가 백희경인 것 같았다.
‘포항형님’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이름이 윤세화인데, 공교롭게도 그 번호가 윤세화의 명의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윤세화가 전화를 건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소원과 통화한 번호의 개통이 이은의 납치가 있었던 날로부터 사흘 뒤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