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피가 반만 섞인 그녀의 이복언니는 소원에게는 많이 불편한 사람이었다.
때문에 얼떨결에 차에 올라타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된 이 상황이 소원은 여러모로 불편했다.
비싸고 좋은 음식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함께 먹는 사람들이 사람이니만큼 음식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소원이 입에 소고기 한 점을 밀어 넣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아르바이트를 근처에서 했나 봐?”
세완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얼른 고기를 삼키고 대답을 하려는데 이은이 그 말을 받았다.
“여기가 젤 가까워서 그런 거 아냐? 나도 여기에서 했어. 맛집 거리라서 사람도 많이 구하고, 시급도 괜찮고, 집에서 가까우니까 교통비도 적게 들고.”
평창동 주변이라고는 죄다 집밖에 없어서 할 만한 아르바이트가 얼마 없다고 이은이 말을 덧붙였다.
“너 이것저것 많이 했잖아.”
“그건 대학 간 이후에! 난 성인이잖아. 얘는 아직 미성년자고.”
잠시 숨을 고른 이은이 그녀에게 할 말을 정한 뒤 조심스럽게 소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백희경…… 너희 엄마 연락은 아직 없지?”
“……어, ……예. 예.”
소원이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백희경의 연락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그들이 궁금해한 것은 포항 형님에 대한 부분이었다.
혹시 그녀가 백희경의 공범일 수 있고, 그렇다면 백희경의 현재 거처를 알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그 판단이 틀린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저히 눈을 못 마주치는 소원을 보고 있노라니 어쩌면 백희경이 그녀에게 연락을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의구심이 든 것이다.
하긴, 그렇게 애지중지했던 딸이니…….
‘말끝마다 우리 딸, 우리 딸, 우리 소중한 딸이라고 했었지.’
백희경의 말투를 떠올리던 이은은 새삼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일단 소원은 그녀의 친혈육이 아니었고, 이렇게 된 이상 백희경도 그녀의 친혈육이 맞는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리고 설사 맞는다고 해도 이은은 그녀의 마음속에서 백희경을 잘라낼 거라고 결심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새삼 가슴이 욱신거리는지 모르겠다.
찹찹한 기분 속에서 이은이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런데 그때 조용히 누군가가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었다.
깜짝 놀라서 보니 세완이었다. 세완은 식탁 아래에서 조용히 위로하듯 그녀의 손을 다독거렸다.
하지만 식탁 위에서는 단 한 번도 이은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뚫어지라 소원만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혹시 엄마랑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몰라? 아르바이트를 한다니 걱정돼서 말이야. 너 재수생이잖아. 대학은 안 갈 생각이야?”
궤변이고 모순이라는 것은 안다. 처음에는 월세도 내라고 그녀를 내몬 주제에 뒤늦게 대학입시 걱정이라니!
하지만 상대는 재수생이었고, 대학이 전부인 그 나이를 이미 겪은 세완은 어떤 말을 해야 소원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지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이렇게 길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 그런데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너랑 어느 정도 정도 쌓였고, 그래서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네. 지금이 가장 중요한 시기잖아.”
곧 수능 9월 모의평가 아니냐면서, 공부는 하고 있느냐고 세완이 질문했다.
“네가 아는지 모르겠는데 지금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시기거든. 물론 대학이 인생의 전부는 아닌데 네 평생이 결정되는 시기잖아.”
정작 자신은 열아홉 살 때, 단 한 번도 인생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없음에도 세완의 입에서는 말이 청산유수로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이은은 입을 벌리고 홀린 것 같은 표정으로 친구를 바라보았고, 소원은 격렬하게 동공이 흔들리더니 급기야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사실은, 저도 너무 불안해서…….”
소원이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세완은 질문하고, 소원은 대답했다. 세완은 백희경의 ‘포항 이모’가 그들이 예전에 갔던 백반집의 주인이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소원은 자신의 내신이 몇 등급이고, 작년 수능점수는 몇 점이, 어느 대학에 응시하고, 어느 대학에 붙고 또 어느 대학에 떨어졌는지까지 모두 이야기했다.
그 순진한 모습에 이은은 어쩐지 가슴이 답답했다.
물론 정보를 캐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소원의 마음을 흔든 것이긴 했지만 그 상대가 사람을 제대로 의심할 줄도 모르는 미성년자이다 보니 이은은 자꾸 가슴이 따끔거렸다.
그녀가 당한 일만 생각하면 소원이 열아홉 살이 아니라 아홉 살이라도 냉큼 집에서 쫓아내야 마땅하지만 집안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맨밥에 말라빠진 김치만 하나 놓고 먹던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가족들 누구 하나 눈치를 준 사람이 없음에도 저렇게 움츠러든 것을 보면 천성이 나쁜 아이는 아닌 것 같은데 참 찹찹했다.
소원이 스무 살만 됐어도 이런 가책 같은 것은 느끼지도 않았을 텐데 빠른 년생이든 뭐든 열아홉 살, 미성년자라는 점이 자꾸만 그녀의 마음을 약하게 했다.
하지만 이은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세완의 취조 아닌 취조는 계속됐고, 세완은 결국 원하는 답변을 모두 다 얻어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원도 마음에 맺힌 것을 털어냈는지 상당히 후련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은의 마음은 오늘도 많이 복잡했다.
* * *
소원을 집에다 데려다준 이은과 세완은 유전자 검사 센터 앞에서 그들에게 백희경의 칫솔과 머리카락 등을 가져다줄 퀵서비스 기사를 기다렸다.
칫솔과 머리카락이 도착하는 즉시 혈족확인검사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센터 운영 시간은 오후 6시까지! 하지만 찬주의 얼굴을 봐서 오후 11시까지는 기다려준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검사를 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있느니만큼 그 이상은 무리라고 했다.
퇴근은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도 내일 출근을 해야 하는데 최소한 서너 시간은 자야 하지 않겠느냐는 연구원의 말에 세완과 이은은 그 어떤 반론도 펼칠 수가 없었다.
현재 시간 오후 10시 50분, 퀵서비스 기사의 예상 도착 시간은 오후 10시 55분!
그 말은 잘하면 오늘 안에 검사를 받아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세완과 이은은 한 마음으로 퀵서비스 기사를 기다렸다.
평소였다면 시시껄렁한 농담 몇 마디는 했겠지만 이은이 긴장한 기색이 너무나도 역력해서 세완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1분 1초가 100분 6000초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퀵서비스 기사가 도착했다.
“나 먼저 갈게.”
이은은 기사가 건넨 쇼핑백을 들고서는 일단 뛰기 시작했고, 세완 또한 지갑에서 잡히는 대로 돈을 꺼내 기사에게 쥐여준 뒤 이은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는 이미 진작 1층에 대기시켜놓은 상황이었다.
이은과 세완은 순식간에 건물의 17층으로 이동했고, 오후 10시 59분! 연구원에게 백희경의 칫솔과 머리카락을 전달했다.
그야말로 인간승리가 아닐 수 없었다.
연구원은 그들을 대단하다는 눈으로 바라본 뒤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연구실로 사라졌다. 그리고 또다시 하염없이 기다리는 시간이 이어졌다.
자정을 넘어 오후 1시, 2시…….
시간은 한없이 흘러갔다. 하지만 잠이 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긴장한 채로 결과만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센터 연구실의 유리문이 열렸다.
연구원이 이은에게 검사 결과지가 담긴 봉투를 건넸다.
이은이 봉투를 개봉했다.
알파벳과 숫자로 이뤄진 검사 결과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무슨 유전자가 몇 퍼센트이고, 무슨 유전자가 몇 퍼센트이고 하는 결과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봐도 모르고, 알아도 거기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이은에게는 맨 뒤에 있는 최종결과만이 중요했다.
이은은 검사결과지의 맨 마지막 장을 펼쳤다. 그리고 빨간색으로 적힌 글자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3촌 관계로 추정.”
이은은 순간 몸을 휘청거렸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그녀와 백희경은 친모녀 사이가 아니었다.
“괜찮아?”
세완이 서둘러 이은을 부축했다. 이은은 괜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지만 정말 괜찮을 리가 있나!
백희경과 관련해서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그녀는 언제나 머리로는 통쾌한 복수극을 결심한다. 너무나도 시원하고 단호하게 다시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처럼 굴다가도 막상 또다시 사건이 벌어지면 혈연이라는 이유로 약해졌다.
그러나 애초에 그럴 이유가 없는 관계였나 보다.
이은은 그동안 고민하고 설렜던 그 모든 일들이 다 기만당한 것이었구나, 싶어서 가슴이 지독하게 시려왔다.
소원이 친딸인지 아닌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백희경이 그녀의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되자 이제야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엄마가 아니니까 죽이려고 한 거겠지!
이은은 자신도 믿지 못할 정도로 그녀가 친엄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잠깐이긴 했지만 그녀가 꺼냈던 키울 때 어쨌다는 둥의 이야기는 다 거짓이었나 보다.
그리고 그녀의 친부모는, 친엄마는 정말로 죽은 게 맞았나 보다.
버림받은 소녀는 머리가 굵어졌을 때부터 제 부모는 이미 죽었다고 그들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미련을 버렸다.
아니, 버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이 정말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왜 이렇게 가슴이 무너지고 눈물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엄, 엄마……. 엄마……. 엄마아!”
이은은 소원이 그랬듯이 ‘엄마’라는 단어를 부르고 또 불렀다. 악을 쓰면서 가슴을 쥐어뜯고,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엄마를 외쳤다.
하지만 예전에도 그랬듯 이은의 ‘엄마’는 결코 그 부름에 답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