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섬사람들은 좀 찝찝하고……. 여객선 선장한테 맡기죠.”
세완이 말했다.
박 팀장은 섬사람 중 한 명에게 머리카락과 칫솔, 가계부, 그리고 소원이 가져다 달라고 했던 몇 가지 물품을 맡기고, 그이가 뭍으로 나와 그것들을 퀵서비스 기사에게 맡기고, 또 그 퀵서비스 기사는 서울의 세완에게 물품을 전달하는 방법으로 가자고 했다.
그리고 퀵서비스 기사에게 물품을 전달한 섬사람은 다시 여객선을 타고 돌아와 여객선은 박 팀장을 위해 대기하는 것으로!
그러나 섬사람들로 인해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없었지만 세완은 그 사람들이 묘하게 수상하고 찝찝했었다.
그는 박 팀장에게 물품을 맡기는 것은 여객선 선장에게 하고 되도록 외부인, 그러니까 섬의 원주민이 아니라 뭍에서 온 사람들과 함께 있으라는 말을 전달했다.
“그리고…… 만약 위기상황이 생기면 발포하세요.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세완은 대한민국 최고의 로펌과 최고의 변호사를 활용하겠다고 약속했다.
전관예우는 물론이고 BS그룹과 관련된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서라도 반드시 정당방위를 받아내겠다며 그는 박 팀장을 안심시키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박 팀장의 관심사는 다른 곳에 있었다.
「저기 그럼 보너스는…….」
월급의 100%였다. 박 팀장은 직장인의 애환을 담아 간절하게 질문했다.
세완은 잠시 고민했다.
오후 6시까지 도착하면 200%, 오늘 안에 오면 100%라고 했었나?
“300% 드리죠.”
「네?」
생각도 못 한 금액에 박 팀장이 크게 놀라 반문했다. 세완이 태연하게 답했다.
“방금 말씀하신 단서, 팀장님이 아니었다면 찾지 못했을 겁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세완은 보너스가 이번 달 월급에 포함되어 지급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 팀장은 뛸 듯이 기뻐했고, 기뻐하는 박 팀장을 보며 세완도 기뻤다.
이 회장이 그랬다. 돈을 지급한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노력에 걸맞은 대가라고.
10만 해도 되는 사람이 12만큼 해내면 그 2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주어야 그 사람은 물론이고 그 주변 사람들까지 더 열심히 일을 한다고 그랬다.
세완은 이 회장의 가르침에 의거해서 보너스의 액수를 결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이은과 마주했다.
스피커폰이었기에 이은도 세완과 같은 것을 들었다. 거두절미하고 세완이 물었다.
“어떻게 할래? 그 포항 형님이라는 사람 말이야. 소원이한테 물어볼까?”
세완이 말끝을 흐리며 이은의 눈치를 살폈다. 세완의 말을 들은 이은은 고민이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어보는 게 좋을 거 같긴 한데 제대로 대답을 해줄 거 같진 않네…….”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하나 그것이 문제였다.
소 닭 보듯이 서로에게 데면데면했는데 궁금한 게 생겼다면서 쪼르르 가서 질문하면 걔가 참 잘도 대답해주겠다!
그리고 그것은 질문자가 세완이라고 해도 별다를 것 같지 않았다.
세완과 이은이 어떻게 에둘러 ‘포항 형님’에 대해 알아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한여름 납량특집도 아니고 갑자기 왜…….
세완은 자신도 모르게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이상한 것이 있나 살펴봤다. 그리고 그 순간 현관문이 열리는 것을 발견했다.
“……!”
윤세가 현관을 열고 나오고 있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식스센스, 그러니까 육감이라고 불리는 여섯 번째 감각이 있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나 보다.
세완은 윤세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은과 함께 있는 윤세를 보고 싶지 않았다.
고백조차 못 하는 덜떨어진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은이 그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왜 고백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분명한 건 윤세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타. 집에 다시 들어갈 거 아니잖아. 밥이나 먹으러 가자.”
세완이 스마트키로 차에 시동을 걸면서 이은에게 말했다.
하지만 무심한 말투와는 달리, 만약 그녀가 안 간다고 한다면 매달려서라도 어떻게든 그녀를 데려갈 생각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안 것인지…….
“집이 코앞인데?”
“잔소리 감당할 자신 있어?”
“아!”
이은은 짧은 감탄사 한 마디만 남기고는 성큼성큼 걸어 차에 올라갔다.
“뭐 해? 안타고?”
김이은도 이 회장의 잔소리는 싫은 모양이었다.
세완은 어쩐지 우스워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대문 주변을 살펴본 윤세가 차고가 있는 방향으로 오고 있었다.
세완은 지체 없이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 * *
한편, 저택의 대문 앞에서 세완과 이은을 찾던 윤세는 바로 옆의 차고 문이 갑작스레 열리자 깜짝 놀랐다.
하지만 차고의 문이 열리기 무섭게 까만 세단 하나가 기세 좋게 빠져나와 저택을 벗어나자 저 차에 탄 것이 누군지, 그리고 누가 차를 운전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저들이, 정확하게 말하면 세완이 윤세가 이곳에 있는 사실을 알면서 일부러 도망갔다는 것에 대해 그의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도망가게 둘까 보냐, 그는 헛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차를 쫓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뜀박질을 시작하자 세단의 운전자는 액셀을 밟아 폭발적인 속도로 골목을 빠져나갔다.
“……하!”
힘껏 뛰었지만 차의 속도를 이길 수가 없었다.
허리를 반쯤 굽힌 윤세가 가쁜 숨을 정리했다. 그리고 차의 뒷모습을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어지간히 경계하는구먼.”
아무도 듣는 사람 없는 속에서 윤세가 마음의 소리를 내뱉었다.
누군가 지금 이 광경을 보면 윤세가 나쁜 놈이라고 착각할 거다. 사이좋은 연인 사이에 끼어들려고 하는 나쁜 놈이라고.
하지만 맹세컨대 그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 두 사람도 아직 연인이 아니다.
이은에게 살짝 호기심이 생기고, 한번 끼어들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생각만이고, 세완이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것도 아닐 건데 이렇게 만날 사람을 피해서 도망 다니면 그가 뭐가 되나!
능력 있는 배테랑 경호원이지만 세완과 이은의 잦은 도주로 이 회장에게 커리어를 의심받고 있는 윤세가 이미 차가 사라진 골목길 그 어딘가를 보며 낮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 * *
같은 시간, 소원은 죄송하지만 더 이상 아르바이트를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주인아주머니께 막 이야기를 한 참이었다.
갑자기 그러는 법이 어디에 있냐고 화를 내던 아주머니였지만 막상 발목을 절뚝거리는 데다가 손까지 베여 붕대를 둘둘 감고 있는 모습을 보자 더 이상 타박하지 못하고 불편한 표정만 지었다.
“죄송합니다.”
소원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아주머니는 못마땅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알았다고, 이만 가보라고 했다. 며칠 동안 일한 돈은 정산해서 월말에 통장에 넣어준다고 했다.
돈이 급한데 그냥 오늘 정산을 해주시면 안 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아주머니가 심기가 불편한 것이 눈에 확연히 보여서 소원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맑고 한 달 전과 별 차이가 없는데, 그녀의 신세는 너무 많은 것이 바뀌어버렸다.
「우리 딸, 엄마가 많이 사랑해. 알고 있지?」
일시적인 거라며 조금만 참으라던 엄마의 목소리가 생각난다.
하지만 어젯밤 통화 이후 엄마는 더 이상 전화를 받지 않았다.
바빠서 그럴 거라며 애써 마음을 다독여 봤지만 몸이 아파서 그런지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를 않았다.
요즘 소원은 정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었고, 모든 것이 그녀 모르게 수상하고 기이하게 돌아갔다.
「엄마랑 통화한 건 절대 들키지 마! 알았지?」
「네 언니가 혼자 어디 갈 거 같으면 엄마한테 얘기 좀 해주지 않을래?」
엄마는 모두 다 소원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소원은 도대체 뭐가 그녀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녀의 소원은 다 필요 없으니 하루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것, 딱 하나인데 엄마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엄마는 괜찮은 거 같으니 다행이지, 뭐.”
이은은 몇 번이나 했던 생각을 다시 읊조렸다.
아빠가 살해당했다고 난리를 치던 세완과 이은이 떠올라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그녀의 아빠도 곧 엄마처럼 그녀의 앞에 짠, 하고 살아 돌아오지 않을까 소원은 기대한다.
그나저나 돈이 문제긴 문제였다.
처음에 이 집에 왔을 때 이은이 20만 원을 줬으니 세완이 집에 있는 10만 원까지 가져다주면 총 30만 원!
그녀 지갑에 있는 3만4천 원을 추가하면 전 재산 33만4천 원이었다.
그런데 세완에게 월세를 내기로 했으니 거기에 마이너스 25만 원!
즉, 이제 소원은 급여가 들어올 때까지 8만4천 원으로 한 달 가까이를 버텨야 하는데 이 돈으로 과연 버틸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핸드폰 요금과 교통카드 대금만 해도 엄청 많아 보이는데…….
소원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벗어나고 싶어도 도무지 벗어날 수 없는 돈 걱정에 소원이 하늘을 보며 여러 번 한숨을 내쉴 때였다.
갑자기 까만 세단 한 대가 소원 앞에 멈춰 섰다.
되게 좋아 보이는데 저 차는 얼마나 나갈까, 하는 생각을 하며 멀뚱한 눈으로 차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차창이 스르륵 내려갔다.
운전석에 있는 사람이 고개를 내밀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뭐 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존재의 등장에 소원은 깜짝 놀랐다.
“어?”
“뭐가 ‘어’야? 사람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놀라 눈만 끔벅이고 있는데 그가 여상스럽게 말했다.
“아르바이트 간 거 아니었어?”
“어, 그게…….”
소원이 머뭇거렸다.
아르바이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뒀고, 백수가 돼서 지금 길바닥에서 돈 걱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현재 상황인데 이것을 말로 풀어서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소원이 제 부족한 어휘력을 탓하며 끙끙거리고 있을 때였다.
“일단 타. 타서 얘기하자.”
또 다른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이은이었다.
소원은 깜짝 놀라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방금 엄마와의 통화를 생각해서 그런가, 지은 죄도 없는데 이은을 보니 소원은 어쩐지 도망가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