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네가 그 애를 집 안에 들였잖아!”
이은은 억울했다.
애초에 그 부분에 있어 이은과 관련한 지분은 없었다. 인질 운운하면서 자기가 데려와 놓고!
하지만 이은이 억울하거나 말거나 세완은 호쾌하게 전부 다 쫓아내고 쓸어버리자는 말만 반복했다.
이은만 ‘가족’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전부 다 쫓아내고, 멀리하고, 우리끼리만 잘 먹고 잘 살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백희경 등 그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나쁜 존재들이 있긴 하지만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세완이 다 무찔러 버릴 거라고 했다.
“네가 어떻게?”
“……잘?”
구체적으로 방법을 물어보니 세완의 동공이 거칠게 방황했다.
이세완의 큰소리는 실현 가능성 없는 뻥 카드였나 보다.
그럼 그렇지, 이은이 피식 웃어 버렸다.
“인마! 그래도 그렇게 대놓고 비웃으면 내가 뭐가 되냐?”
세완이 항의했지만 이미 터진 웃음보는 멈출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갑자기 정색한 세완이 이어 아빠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렇게 웃으니까 좀 보기 좋네. 인마, 그만 심각해해. 소원이가 백희경 친딸이든 아니든 그게 무슨 상관인데. 어차피 가족도 아닌 사람들이잖아.”
세완은 그녀를 아프게 한 사람들은 모두 벌을 받을 것이라며 더 이상 가치 없는 사람들로 인해 아파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이 뭐라고 이은은 갑자기 눈물이 울컥 나오는 것을 느꼈다.
쉴 새 없이 동공이 흔들리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그 모습에 놀란 듯 세완이 차를 갓길에 세웠다.
이은은 자신을 조심스레 바라보는 세완을 보며 더욱 더 크게 울어 버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는데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그냥 눈물이 흘렀다.
사는 게 지독하게 힘들었다.
머리가 나빠도 좋으니까, 가난해도 좋으니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엄마,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만 하나 있길 바랐는데 그게 참 어려웠다.
서류에 사인 몇 번 하는 것으로 인생을 전부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나 보다.
이은은 세완의 품에 안겨 세상에서 가장 서러운 울음을 토했다.
* * *
김포공항에서 출발해서 포항경주공항, 그리고 그곳에서 바로 여객선터미널!
긴급을 요하는 사안으로, 금전적인 부분은 신경 쓰지 말고 최대한 빨리 복귀를 하는 것만 염두에 두라는 세완의 지시가 떨어졌기에 박 팀장은 비행기와 택시, 배를 거치며 현재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한 여행 중이었다.
이런 속도와 경로면 오늘 안에 복귀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며 운송객이라고는 그 하나밖에 없는 배 한편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을 때였다.
- RRR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인 줄 알고 부랴부랴 핸드폰을 집어 들었는데 전화가 아니라 문자였다.
뭔가 하고 내용을 확인하니 인심 후한 상무님이었다.
「획득 후 최대한 빠른 복귀 요함. 6시 이전에 복귀 시 기존에 약속한 특별보너스의 2배를 지급할 것임.」
문자를 확인한 박 팀장이 환호성을 질렀다.
“이게 웬 떡이야!”
실현 가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특별보너스가 2배면 도대체 돈이 얼마냐며 그가 희희낙락하려는 찰나였다.
「단, 다음날 복귀 시 감봉조치 들어갑니다.」
기쁨이 순식간에 공포로 변했다.
“켁! 켁!”
너무 놀란 나머지 라면이 식도에 걸려 사레가 들렸다.
박 팀장은 물 한 잔으로 목에 걸려 있던 라면을 모두 배 속으로 내려보낸 뒤 다시 한번 문자를 확인했다.
그러나 눈을 씻고 다시 봤음에도 단어 하나, 토씨 하나 변하는 것이 없었다. 그가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오늘 새벽, 그를 포항으로 내려보낼 때부터 세완은 꾸준히 오늘 내에 복귀하라고 요구하긴 했다.
오늘 안에 복귀하면 특별보너스도 준다고 했다. 그런데 몇 시간 만에 또, 왜 갑자기 상황이 변했나!
이건 가능하면 오늘 안에 서울로 복귀를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안에 서울로 들어와서 그에게 칫솔과 머리카락을 넘기라는 말이었다.
“끙!”
박 팀장이 신음을 흘렸다.
요즘은 국민들 눈치를 보느라 군대도 인권교육을 소홀히 하지 않는데 어쩌자고 이 회사는 군대도 아니면서 사람을 이렇게 굴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었다.
평범한 직장인, 박 팀장은 어떻게 하면 상사의 지시에 완벽하게 따르는 동시에 월급의 200%라는 특별보너스를 받을 수 있을지에 대하여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박 팀장에게 문자를 보낸 세완이 울다 잠이 든 이은을 바라보았다.
섬에서도 느낀 거지만 평소에는 철의 여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단단한 이은은 잠이 들면 유난히 어려 보인다.
그 모습이 일곱 살 그 어느 시절과 비슷해 보여서 이은을 보는 세완은 마음이 참 찹찹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지독하게 쉬운 무엇인가가 이은에게는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모르겠다.
세상은 이은에게 유독 가혹했다. 그래서인지 이은은 누구보다 더 빨리 어른이 되었다. 그 모습이 서러워서 세완은 일부러 더 철없이 굴었다.
그러다가 시나브로 시간이 흘러 그게 제 천성인지 아닌지 헷갈릴 정도가 되었고, 이대로 그들의 모습이 굳혀지나 했는데 백희경의 등장으로 모든 것이 무너져버렸다.
그의 비서가 되어 단단한 어른 여자를 연기하던 이은은 다시 일곱 살 어린 소녀가 되었고, 그는 그런 이은이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너는 도대체 언제쯤 편해질까.”
세완이 작게 중얼거렸다.
가슴이 답답해서 흉부에 담고 있는 말을 내뱉어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는데 막상 내뱉고 나니 현실이 무거워서 가슴이 더욱 더 답답해졌다.
세완은 습관처럼 이은의 잔머리를 정리해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울어서인지 개구리처럼 퉁퉁 부어있는 두 눈덩이가 귀여워 보였다. 눈만 부었을까, 얼굴도 부었다.
“참 못생겼다.”
사실 못생기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 예쁘다는 말이 안 나왔다.
“못난이 인형 같단 말이지.”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옷을 입고 엉엉 울고 있는 유치원생 꼬맹이 모습의 인형들.
이은은 그중에서 초록색 옷을 입고 얼굴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막냇동생 모습을 닮았다.
다들 이은이 누나 같다고 하는데 세완이 보기에는 이은이 한참은 어리게만 느껴진다.
“너 못생겼어, 인마.”
자는 이은에게 세완은 공연히 심술을 한번 부려보았다.
그리고 그러다가 시계를 보았다.
오후 2시가 조금 넘었다.
“깨워야 하는데…….”
윤세야 기다리든 말든 알 바 아니지만 말도 없이 데리고 나온 거라 노인네가 걱정할 텐데…….
하지만 말과 달리 세완은 운전대에 팔을 얹고, 손에 턱을 괸 채 본격적으로 이은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세완은 일부러 허공에서 이은의 딱밤을 때리는 흉내를 냈다.
허공에서 때리는 것조차 이은이 아파할까 봐 세게는 못 때리고 약하게, 아주 약하게!
그러다가 잔머리를 정리해주고, 그러다가 볼을 콕콕 찌르고, 그러다가 작고 도톰한 입술을 실수로 살짝 건드렸다.
세완은 화들짝 놀라서 손을 회수했다. 하지만 여전히 깨지 않는 이은의 모습에 안심하고 다시 손을 그녀에게 가져다 댔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사내자식이 음흉하게 뭘 어쩌겠다는 건 아니고…….
“코코코코, 어디? 코!”
이은의 코만 다섯 번 손가락으로 찍었다.
「모자란 놈.」
어딘가에서 이 회장의 욕설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어쩌겠나, 세완은 이게 좋은데.
친구니 남매니 하는 그런 이름이 좋다는 것이 아니라 이은은 그를 의지하고, 그는 이은을 지켜보는 이 관계가 좋다는 거다. 누구도 끼어들지 못하는.
그와 이은은 서로에게 그 어느 누구와도 대체 불가능한 존재였다. 그래서 세완은 지금 이 관계가 좋았다.
그가 아직 덜 자라서 그런가 보다. 이 회장의 말대로 덜떨어져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이은은 그의 친구이자, 동생이고, 남매였다.
일곱 살 때부터 25년을 함께 자랐는데 그런 마음이 없을 리가 있나!
어쨌거나 세완은 그의 가족들이 이대로 평생 이 모습 그대로 함께이길 소원했다.
하지만 요즘 세완도 그의 마음을 모르겠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모르겠고,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알 것 같기도 하고 조금 그렇다.
이은이 윤세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짜증이 나고, 이윤세 그 양반이 느물거리는 모습을 보면 짜증 나고, 이은이 그를 외면하면 화가 나고 속이 상하고…….
「덜떨어진 놈.」
어딘가에서 찬주의 것과 비슷한 목소리가 그를 욕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그 녀석이야 원래 틈만 나면 그를 욕하는 놈이다.
세완은 머릿속에서 울리는 찬주의 목소리를 가볍게 외면했다. 그리고 대신 이은의 얼굴을 또다시 관찰했다.
눈, 코, 입.
이마, 볼, 입술.
집에서는 화장을 하지 않는 탓인지 이은의 입술은 연한 핑크빛을 띠었다.
“그러고 보니 입술 색이 혈관 색이라고 하던데 핑크색이면 혈액순환이 괜찮은 건가?”
그 언젠가 TV 건강 프로그램을 보며 이 회장이 한 말을 떠올리며 세완이 의심을 품었다.
울고 나면 머리가 아프다면서 까무룩 잠이 드는 일들이 잦은데 혹시 그게 건강이 안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세완의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입술이 마르면 안 좋은 거라던데…….”
이은의 입술이 살짝 마른 것 같기는 했다. 하얗게 껍질도 일어나는 듯했다.
TV 건강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코코넛 오일, 산양유 단백질, 아마씨 오일, 감태 가루, 타트체리 콜라겐 등 온갖 잡스러운 건강식품들을 잔뜩 사 모으는지라 이 회장의 건강 지식을 모두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이은의 몸 어딘가가 좋을 수도 있다는 데 그걸 무시할 수가 없었다.
“말라 있는 거 맞지?”
세완이 손가락으로 이은의 입술을 살짝 눌러봤다. 작고 말랑말랑하고 연약한 입술이 쑥, 하고 눌렸다.
근데 마른 건지 안 마른 건지는 모르겠다.
세완이 대조군으로 오른손으로는 제 입술, 왼손으로는 이은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며 그 촉촉함과 탄성을 확인할 때였다.
“……!”
이은이 눈을 떴다.